노벨상 유력한 물리학 교수 왜 죽음을 택했나.. 서강대 故 이성익 교수의 비극

2010. 3. 1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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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2월 22일. 대전 신성로 한국기계연구원 본관 대회의실에서 '2010 초전도 공동 워크숍'이 개최됐다. 한국초전도학회와 한국초전도저온공학회 공동 주최로 마련된 행사였다.

# 오후 1시30분. 이성익(58)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가 첫 번째 연사로 등장했다. 참석자 150여명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 23일 오후 1시. 1박2일 일정의 워크숍이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서로 웃으며 악수를 건넨 참석자들은 훗날 모임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 24일 오전 11시2분. 이 교수는 한국연구재단 도약연구사업 2010년도 과제계획서를 재단 측에 제출했다. 14년째 수행하던 연구 작업의 마지막 해 계획서를 보낸 것이다. # 그리고 4시간 뒤. 서울 창전동 A아파트 12층 이 교수 집 창문이 스르륵 열렸다.

초전도 권위자

이 교수는 초전도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포스텍(포항공대) 교수로 재직하던 2001년 1월 MgB2(이붕소마그네슘) 초전도 박막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붕소마그네슘은 절대온도 39도(섭씨 영하 234도)라는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이를 활용한 박막 개발에 뛰어든 가운데 이 교수가 기존 초전도체보다 약 100배 두꺼운 0.0004㎜ 박막 제조에 가장 먼저 성공했다.

연구 성과는 세계적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다. 논문은 9년이 지난 현재 피인용 횟수 330회를 넘겼다. 100회만 넘겨도 대단한 논문이라는 걸 감안하면 '고전' 반열에 오른 셈이다. 이 교수는 논문을 쓴 뒤 "학자로서의 한(恨)이 풀렸다"고 주변에 말했다.

그는 스타가 됐다. 각종 상을 휩쓸었다. 2006년에는 한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제10회 한국과학상(물리학 부문)을 수상했다.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한국인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모험을 감행하다

2008년 3월, 이 교수는 포스텍에서 모교 서강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직은 모험이었다. 학교를 옮기면 2∼3년간 제대로 연구를 하기 어렵다. 실험 물리는 장비가 중요한데, 장비를 설치하고 연구원을 확보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이 교수가 서강대에 부임하기 직전인 2월 18일, 일본 도쿄공업대학 호소노 히데오 교수팀이 새로운 초전도체 재료를 발견했다. 철에 기반한 초전도체로 절대온도 50도에서 초전도 현상을 보이는 물질이다. 추가 연구를 통해 더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체가 되는 물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부풀었다. 상용화의 관건은 고온 초전도체 개발이었다. 학계는 흥분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연구실 규모가 작은데다 포스텍에 그의 실험 장비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십수년간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마련한 15억원 상당의 장비였다. 강원남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는 "공교롭게도 그때가 초전도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포스텍에 계속 있었다면 큰일을 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홈플러스 사태의 파장

그래도 그때까지는 기회가 있었다. 서강대의 지원으로 장비가 들어오고 있었고 적정 규모의 연구실만 마련되면 늦게나마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앞서 서강대는 2007년 인문대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는 구(舊)R관을 허물고 '국제인문관 및 개교 50주년 기념관'을 짓기로 했다. 서강대는 이 교수와 이직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건물이 완공되면 연구실 200평을 우선 배정하겠다"고 약속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홈플러스였다. 해당 건물은 삼성테스코가 860여억원을 들여 지을 예정이었다. 삼성테스코는 그 대가로 6개층에 홈플러스를 입점시켜 30년 동안 무상 사용키로 했다. 학생과 지역사회가 들고 일어났다. '대학 상업화'와 '지역 상권 붕괴'가 반대 이유. 서강대는 결국 지난해 8월 건물 신축 계획을 포기했다. 서강대가 자체 기금 등으로 R관을 국제인문관동과 산학관동으로 탈바꿈하는 공사를 시작한 건 지난달. 완공 시기는 당초 예정된 올 하반기에서 1년 뒤로 밀렸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이 교수의 초조함은 극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서강대 물리학과 학과장인 박광서 교수는 "내년에 완공된다 해도 장비까지 다 갖추고 연구실을 정비하려면 2∼3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나이는 들어가고 외국 교수들은 치고 올라오는데, 이 교수가 큰 무력감에 빠진 것 같다"고 말했다.

"큰 논문을 써야 하는데…"

교수 사회에서 실적은 무척 중요하다. 교수들은 가능한 한 많은 논문을 써 계량화된 수치로 자기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평가 결과에 따라 연구비 지원 규모가 판가름난다. 실적 경쟁은 대학 간 교수 스카우트 경쟁으로 이어진다. 실적이 뛰어난 교수가 연구비를 획득할 수 있고, 그래야 학교에 학생이 몰리기 때문이다. 서강대 역시 우수 논문이 많은 이 교수를 포스텍에서 데려온 덕분에 2009년 3월부터 '두뇌한국(BK) 21' 사업에 중도 합류했다.

당시 이 교수를 뺏기면 타격이 큰 포스텍과 서강대의 실랑이도 대단했다. 스카우트 과정을 잘 아는 서강대 관계자는 "이 교수가 포스텍을 떠날 즈음 갑자기 연구비 유용 의혹이 터졌다. '일종의 보복이 아닌가'하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결국 경찰에서 무혐의 처리됐지만 이 교수가 큰 상처를 받은 것으로 안다. 이때부터 우울증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이런 잡음은 이 교수에게 더 큰 실적 압박감으로 다가온 듯하다. 이는 이 교수의 지난해 논문 편수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지난해 국제과학인용색인(SCI)급 논문 18편을 저술했다. 숫자 상으론 포스텍 시절과 비슷하다. 하지만 연구 환경을 고려하면 상당한 무리였다는 평가다. 그는 입버릇처럼 "사이언스나 네이처 급 논문을 써야 하는데…"라고 되뇌었다. 1997년부터 받아오던 한국연구재단 연구비도 올해가 마지막이었다.

서강대 한 교수는 "한국처럼 교수들을 논문 편수로 압박하는 나라는 없다. 연구가 성숙되기도 전에 과실을 다 따먹을 수밖에 없다. 논문 실적 유지를 위해 중복 게재 등의 유혹에 노출돼 있을 정도"라고 지적했다. 투신

이 교수는 학회 모임만 다녀오면 더 풀이 죽어 있었다고 지인들은 증언했다. 지난달 22∼23일 학회 행사가 점점 초라해지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자리였기 때문일까. 다음날인 24일 오후 3시30분, 아파트 화단에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그를 경비원이 발견했다. 점퍼 안주머니에서 유서가 나왔다.

"큰 논문을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힘이 든다. 가족과 대학생들, 구성원에게 미안하다."

◆Key Word 초전도 현상

초전도 현상은 특정 물질이 저온에서 전기저항을 잃어 전류가 저항 없이 흐를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초전도 물질을 이용하면 전자기기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 손실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개발된 기술로는 극저온일 경우에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세계 물리학계에서는 지금의 초전도 물질보다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 현상을 띠는 물질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가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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