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부정선거 선봉 정치깡패 '철퇴'

2010. 3. 1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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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이승만 정권 주요 사건마다 테러와 폭력 일삼다 된서리

"피고인 임화수 동 유지광 등에 대한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위반 및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 피고 사건에 관하여 본 재판소는 혁명검찰부 검찰관 윤홍열 및 변호인 유병진 김숙현 동 김섭 동 신정언 동 전성환 동 윤만석 동 오승근 동 한윤수 동 김중건 동 강순원의 관여로 병합심리를 마치고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피고인 신도환을 무기징역(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임화수를 사형(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유지광을 징역20년(사형)에 처한다. 서기 1961년 8월 25일 혁명재판소 심판부 제3부…."

정치깡패로 이름을 날린 이정재와 임화수는 혁명특별재판부가 사형선고를 내린지 10여 일 만에 교수형에 처해진다. 반공청년단장 신도환은 다시 재판에 회부돼 징역 20년형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신도환은 23세에 일본 메이지대 법과를 졸업하고, 31세부터 3년 동안 일본 도쿄대에서 국제법을 전공했다. 다시 34세 때는 미국으로 건너가 1957년까지 뉴욕 컬럼비아대 연구실에서 국제법을 연구하다가 귀국, 대구에서 4대 민의원에 당선됐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무학에 극장종업원의 삶을 살아온 임화수의 삶과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이들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걸까.

자유당 반공청년단 정치깡패 집결지

판결문에 따르면 그후 신도환은 1958년 자유당에 입당, '반공청년단'이라는 자유당 전위조직을 만들어 단장에 취임한다. 임화수는 9·28 수복 후 자신이 일하던 서울 종로4가 소재 평화극장을 불하받는다. 영화계의 요직을 하나씩 차지해 나가던 임화수는 '3·15선거 전국극장 문화단체협의회 중앙추진위원회 회장'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등 공직을 맡는다. 반공청년단의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이기붕이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단체는 "1960년 3월 15일 선거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을 당선시킬 것을 결의하고 조직원들에게 선전요령문·선거자금을 비밀리에 배부해 부정선거 실시에 주도적 행위를 하고 청년들을 사주 동원"했다. 유지광 등은 특히 1960년 4월 18일 목봉·쇠갈고리 등 흉기를 소지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하는 등 상해를 가했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이승만 정권 시기는 정치깡패의 전성시대였다. 시작은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다. 1951년 부산에서 열린 국회에 이승만이 낸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된다. 당시 부산 거리에는 '애국자 이승만 박사를 반대하는 반민족의원을 처단하라'라는 전단이 나붙었다.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같은 정체불명의 단체 명의였다. 이들은 심지어 국회를 둘러싸고 의원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당시 이들 단체의 주도자가 누구인지 등은 밝혀지지 않았다.

1965년 6월 야당 정치인 이철승씨(현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는 동아방송 라디오프로그램 〈정계야화〉에 출연해 "민중자결단은 이임호라는 사람이 총지휘했고, 안동 출신 윤재광이 백골단·민중자결단의 총지휘관으로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정재는 1950년대 정치깡패 전성시대의 상징적 인물이다.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씨름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이정재는 상경 후 동대문 일대를 장악한다. 동대문시장연합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하던 이정재는 화랑동지회라는 깡패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동시에 자유당의 각종 정치집회 현장을 누비면서 폭력을 행사했다. 특이한 것은 또 다른 '주먹' 출신 김두한은 야당 지지 입장에서 '경비부장'을 맡았다는 것. 방성수씨가 낸 책 〈조폭의 계보〉에 따르면 다른 정치적 입장에 서면서 두 사람은 결투 직전까지 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정재는 임화수 등과 함께 1961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밖에 시라소니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날린 이성순(1983년 작고)은 해방정국에서 서북청년단 감찰부장을 맡았고, 장면·신익희 등 정치인들의 선거참모를 지냈다. 4월혁명회 회원 김재봉씨(81)의 증언에 따르면 장택상 전 국무총리는 자유당 내의 반공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다. 그러나 이승만-이기붕 쪽에 선 정치깡패들이 출마를 가로막았다. 김씨는 말한다. "당시 장택상씨가 대통령에 입후보하려는 등록서류를 우리가 들고 갔는데 깡패들이 막아서서 돌을 던지면서 서류를 탈취하려는 거예요. 경찰은 그냥 서서 구경만 하고 있고…."

1987년 용팔이 사건이 사실상 마지막

자유당 입장에선 1950년대 정치깡패들은 3·15부정선거에 개입하고 4·18 고려대데모사건 방해에 나서면서 철퇴를 맞는다. 특이한 점은 4·19 이후 제2공화국이 선 뒤 1심재판에서 이들의 형량이 낮게 나오자 정부가 '민생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이라는 소급입법을 통한 개헌으로 특별재판소를 열어 재심했다는 것. 5·16 이후 혁명재판소는 전격적으로 이들 정치깡패와 부정선거 관련자들의 형을 집행한다.

'사회악 일소'를 내세운 군사정부의 정치깡패 척결 작업은 상당한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당시 혁신계도 박정희 장군의 좌파적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있었고, 일반 국민의 경우 혼란한 사회상의 질서가 잡히는 것에 대해 호응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후 상당 기간 '정치깡패'는 모습을 드러나지 않는다. 1960~1970년대 야당 지구당 대회에서 간헐적인 충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김대중·김영삼 등을 중심으로 신민당에서 떨어져 나온 신당 창당이 진행되면서 정치깡패는 다시 표면화된다. 이른바 용팔이 사건이다.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신당 창당 방해 공작을 한 '용팔이' 김용남씨(61)는 2009년에 낸 〈나는 매일 눈물로 성경을 쓴다〉라는 책에서 당시 폭력을 사주한 사람들의 "어려운 때 나라를 구할 사람은 김동지밖에 없다. 나중에 국회의원 자리도 보장하겠다" 등의 감언이설에 속아 앞장섰다면서 "나는 제2의 김두한이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도주한지 1년 5개월만에 잡힌 김씨는 감옥에서 나온 뒤 현재 종교에 귀의하는 한편 간판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008년 촛불시위. 촛불시위에 맞서 가스통 시위 등을 벌인 특수임무수행자회나 "공권력에 도전해 법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공공의 적과 맞서 싸우겠다"며 결성된 국민행동본부 애국기동단 등을 두고 일부에서는 '정치깡패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시사평론가 유창선씨는 "얼핏 보면 과거의 정치깡패와 유사하게 보이는 측면이 없는 건 아니다"면서도 "과거는 정권이 직접 사주한 것이라면 촛불시위 때 일부 보수세력의 움직임은 스스로 나섰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1980년대 이후에도 때때로 정치인과 조직폭력배 간의 관계가 노출되기는 했지만 사실상 권력과 연계된 정치깡패는 용팔이 사건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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