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불안' 덜려다..'스펙 강박' 합병증에 운다

2009. 12.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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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남들 다 하는데 나도…

진학·취업·퇴출의 공포

'묻지마 스펙' 쌓기로

한국 사회는 왜 과도하게 스펙에 목을 매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치열한 경쟁이 불러온 불안감과, 여기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 스펙 열풍을 낳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 만큼, 주변에 휘둘리지 말고 차분하게 자신에게 꼭 필요한 스펙이 무엇인지 찾고, 이를 쌓는 게 필요하다고 권한다.

심리안정 효과 있지만인간 등급화 부작용뚜렷한 목표 우선돼야

# 불안

지난해 초 대학을 졸업하고 2년 가까이 경찰 임용시험을 준비 중인 정성훈(28)씨는 최근 대학 동창회에 나갔다가 잔뜩 풀이 죽었다. 친구들이 저마다 자격증을 서너 개 정도는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만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씨는 "시험을 떨어지고 나니 불안감이 더 엄습해 오더라"라며 "계속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시험과 상관 없는 자격증을 따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직장인이라고 불안감을 떨쳐낼 도리는 없다. 보험 설계사, 헤드헌터로 일하며 안정적 수입을 올리고 있는 임아무개(40)씨는 "갑자기 일감이 없어지고 은퇴를 할 경우, 어떤 것도 나를 지켜줄 수 없다는 불안감에 늘 스스로를 무장하려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했다.

불안감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를 관통하는 열쇳말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사람들을 불안감에 빠뜨려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게 만드는 사회 심리가 문제"라며 "이렇다보니 자신을 계량화할 수 있는 스펙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 항우울증

스펙은 이런 불안을 상품화해 거대한 시장으로 발전했다. 올해 초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김수연(23)씨는 최근 이력서를 쓰는 데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달 초 일본어 능력시험 1급 자격증을 땄기 때문이다. 김씨는 "당장 도움이 안 되더라도 이력서에 자격증을 하나 추가한 것만으로 안도감이 든다"고 밝혔다.

초·중·고생이 쌓는 스펙은 그 안도감이 부모에게까지 확대된다. 서울 광장동에 사는 김아무개(38)씨는 내년 1월부터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한 달 수강료가 100만원이 넘는 영어학원에 보낼 계획이다. 김씨는 "국제중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라며 "결과를 떠나서 당장은 안도감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실제 진학이나 취업 때 스펙이 당락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보기 이전에, 일단 안도감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스펙은 항우울제와도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 허위

그러나 스펙의 '심리적 안정' 효과는 무분별한 스펙 쌓기로 이어지기 쉽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김아무개(27)씨는 "취업 경쟁이 워낙 심하다보니 무엇이라도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바리스타(즉석에서 커피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 자격증 시험도 봤다"며 "주변에는 전공과 상관 없이 파티요리 학원이나 마술 학원에 다니는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입학사정관제를 겨냥한 '거짓 스펙 쌓기'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일부 고등학교에서 봉사활동 확인서가 허위로 발급되거나 무더기로 상장을 남발하는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입시를 앞두고 급히 스펙을 쌓으려는 학생들을 겨냥한 '모의 토론대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철호 '학벌없는 사회' 정책위원장(배문중 교사)은 "입학사정관제, 외국어고 개편안 등 정부의 새 교육정책이 고교에까지 스펙 쌓기 열풍을 부채질하고 있다"며 "학생들이 스펙 쌓기에만 몰입하면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을 기르기 어려워지고 허위의식에 빠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 참스펙

지난해 초 지방대학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 중인 오성규(29)씨는 최근 일본의 요리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오씨는 "그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와 상관 없이 스펙으로 나를 치장하는 데만 몰두했다"며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허탈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결국 오씨는 일식 요리사의 꿈을 안고 '진짜 스펙'을 쌓기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전문가들은 '스펙을 위한 스펙'은 금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헤드헌팅 업체인 미시간컨설팅의 임혁세 부장은 "많은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도 스펙에 지나치게 목을 매는 사람들을 되레 부담스럽게 여긴다"고 밝혔다.

<20대,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를 쓴 허병민씨는 "스펙을 쌓는 것보다 무엇을 위해 쌓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는 게 중요하다"며 "이런 관점으로 접근했을 때 스펙이 진정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 돌아온다"고 강조했다.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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