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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낙인 40년, 아버지 원망 이젠 내려놔”

한겨레 | 입력 2009.11.03 20:40 | 수정 2009.11.10 17:10 | 누가 봤을까? 50대 남성, 대전

 




[한겨레]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고 권재혁 40주기 추모제

잊으려 했던 아버지 기일
출소한 동료들이 20년 챙겨
재작년 산소 찾았다 알아 < < /p > 진실위서 '고문·조작' 규명
"그리운 아버지, 존경합니다"


가족들은, 한자리에 모여서도 아버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아'자도 입에 올리기 싫었다고 했다. 큰아들 권병덕(59)씨는 혼자서 아주 예전에 한두 번 아버지 묘소를 찾긴 했지만, 가족이 함께 간 적은 30여년 세월 동안 단 한 차례도 없었다.

2007년 11월4일. 38번째 기일을 맞아 처음으로 가족이 함께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 서먹하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 묘소를 향했다. 그런데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의 아버지 묘소 주변엔 이미 낯선 사람들이 모여 추모제를 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권씨의 어머니 이종식(79)씨를 알아봤다. 집에 자주 찾아왔던 이일재(85)씨를 비롯해 아버지의 동료나 가족 일행이었다. 이들은 가족들도 챙기지 않았던 아버지 기일을 해마다 꼬박 챙겨 추모제를 열었다고 했다. 그걸 그제야 처음 알았다. 이일재씨는 아버지 묘소를 가리키며 권씨에게 "너희 아버지는 국가보안법에 걸린 간첩이 아니라 훌륭한 진보학자였다"고 말했다.

아버지 권재혁(당시 43)씨는 1968년 7월 '남조선해방전략당'이란 반국가단체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연행된 뒤, 69년 11월4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앞으로 면회 오지 말아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한마디를 남겼다. 급작스런 아버지의 연행과 죽음도 큰 고통이었지만, '간첩의 가족'이란 세상의 낙인은 끔찍한 '천형'이었다. 홀로 소주 한 병을 들고 아버지 묘소를 찾아 울기도 했다. 연탄가스도 마셔봤다. 그러고 마침내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

그 '망각'의 세월 동안, 이 사건으로 7년형을 살고 나왔던 고 김병권씨는 80년대 말부터 혼자 권씨의 기일에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무덤의 위치도 몰랐기 때문에 사형당한 그곳을 찾아간 것이다. 88년에 20년형을 마치고 출소한 이일재씨도 힘을 보탰다. 10년형을 살고 나왔다 자살한 고 이형락씨의 네째딸 이단아(45)씨도 함께했다. 그러다 서울 근교 공동묘지를 수소문하던 이들은 모란공원에 권재혁씨 묘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2007년 그곳을 처음 찾았다가 우연히 권씨 가족과 연이 닿은 것이다.

지난 1일 아버지 묘소 앞에서 열린 '고 권재혁 40주기 추모제'에는 권씨 유가족뿐 아니라 이 사건으로 형을 살았던 피해자와 그 가족들 30여명이 함께했다. 특히 지난 3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중앙정보부가 1968년 '권재혁 등 13명이 반국가단체인 남조선해방전략당을 조직했다'고 발표한 사건은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고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린 터라 표정은 한결 밝아 보였다. 권씨의 무덤 앞에서 노중선(69)씨는 품에 넣어온 진실화해위의 진실결정 통지문을 읽어 내려갔다. 목소리도, 손도 가늘게 떨렸다. 아들 권씨는 진실화해위의 보고서를 아버지 묘소 앞에 가만히 올려놨다.

추모제를 다 지낸 이들은 묘소 앞에 둘러앉아 각자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살아온 세월을 더듬었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강복씨의 아들은 38년 전 대전교도소에서 암으로 숨진 아버지의 주검을 찾으러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비닐로 싸놓은 시신을 들고 나가려는데, 누가 유언이라면서 '풀잎도 꽃잎도 애비 없듯이, 애비가 죽고 없어도 굳게 자활해 살아라'고 적힌 종이를 줬어요. 그 뒤로 이 말을 신조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나한테 '세상에서 가장 원망스러운 사람'이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듣고 있던 이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양주/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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