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뒤에도 웃겠다"던 꿈 끝내..파란만장 63년 스스로 마침표

2009. 5. 23. 21:5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대통령 당선 되기까지

인권변호사→청문회 스타로'지역주의 타파' 대통령 당선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단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 전까지의 삶은 이 한마디로 요약될 만큼 극적인 한편의 드라마였다.

'까마귀도 먹을 것이 없어 울고 돌아간다'는 봉하마을, 그 마을에서도 가난했던 농군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년'으로 자랐다. 학비가 없어 중학교는 4년 만에야 졸업했으며, 장학금이 없었더라면 고등학교(부산상고) 진학은 엄두도 못냈을 정도였다. 고교 졸업 뒤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망회사 취업과 막노동으로 가난을 벗을 수는 없었다. 절망한 노 전 대통령은 71년 군에서 제대한 뒤 본격 사법시험에 도전한다.

스물 아홉살이 되던 해인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하면서 평탄한 삶을 사는 듯했다. 대전지법 판사를 거쳐 조세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지만, 안온한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81년 민주화운동 사건인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그는 시국사건과 노동 관련 사건 등을 주로 맡는 인권변호사 '노변'으로 거듭났다. 이후 송기인 신부 등과 함께 '부산민주시민협회'를 만들면서 아예 재야 운동가로 변신한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엔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5년뒤에도 웃겠다"던 꿈 끝내…

1988년 정치 입문 뒤에도 쉽지 않은 길만 걸었다. '5공비리조사특위'의 청문회 때 일약 스타로 부상했지만, 견고한 지역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한 힘겨운 싸움에 나선다. 그는 여소야대를 인위적으로 뒤엎는 야합이라는 이유를 들어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해 민자당행을 포기하고 야권에 남았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그는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서울 종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1998년 7월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서 재기에 성공했지만, 그는 16대 총선에서 부산 출마를 감행했다가 또다시 지역주의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과감한 지역주의 도전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명예로 보답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직을 그만둔 뒤 힘겨운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는 2002년 3월 시작된 당내 경선에서 지역주의 극복의 대안으로 평가받아,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집권 여당의 후보직을 거머쥐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지지도 추락으로 당내에서 후보사퇴 압력에 내몰렸으나, 정몽준 국민통합 21 대표와의 후보 단일화로 이를 극복하고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희망돼지 저금통 운동 등으로 60억원 이상의 국민성금을 모으는 등 국민참여형 선거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노 전대통령 재임 5년

권위와 거리두고 기득권구조 맞서보수세력 공세에 '탄핵안' 위기도

정치개혁을 내세우며 당선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임 5년은 탈권력, 탈권위를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는데도 검찰·국가정보원 등 사정기관과 거리를 뒀다. 또 기득권세력과 일부 보수 언론과의 싸움도 멈추지 않았다. 국민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대화는 그의 무기였다.

2003년 2월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장관에 임명한 데 대해 검찰이 조직적으로 반발하자, '평검사와의 대화'를 마련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이는 텔레비전 생중계로 가감없이 보도됐다. 그는 임기 내내 사정기관에 대한 권력의 통제의 끈을 끊었다. 국정원장으로부터의 독대 보고도 받지 않았다. 수시로 "검찰 수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주변에선 "권력 기반이 취약한 소수파 정권엔 무리한 시도"라는 반론이 있었으나, 그는 "시대적 요구"라며 그대로 밀고 나갔다.

인사도 파격적이었다. 남해군수 출신인 김두관, 영화감독 이창동씨를 각각 행정자치부 장관·문화부 장관에 임명했다. 광주 와이엠시에이(YMCA) 사무총장 출신인 정찬용씨를 청와대 인사수석에 발탁하는 등 엘리트 사회에서 소외됐던 지방과 운동권 출신의 참신한 개혁인사들을 대거 핵심 요직에 기용했다.

그러나 보수세력의 '비주류 대통령 흔들기'는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2004년 3월12일 한나라당 등 다수 야당은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기에 이른다. 노 전 대통령은 5월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하기까지 63일 동안 직무정지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는 탄핵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 "우리 사회는 학벌사회, 연고사회"라며 "(나는) 일류학교 나온 사람들로 잘 짜인 우리 사회 각계의 판에 돛단배 하나 떠 있는 듯하다"고 비주류로서의 처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이 선출한 권력을 무시한 정치권의 오만은 역풍을 불러왔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탄핵바람을 타고 원내 152석을 차지해 명실공히 집권여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총선 두달 뒤 치러진 6·5재보선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경남도지사와 전남도지사를 잃으며 패배했고, 2004년 10월엔 참여정부의 핵심 정책이었던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렸다. 2005년 6·13 재보궐선거에서 6석을 잃으며 원내 과반수가 붕괴됐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개시는 그의 지지층이었던 진보 진영을 양분시켰다. 노 전 대통령은 보수-진보 모두로부터 고립된 섬으로 입지가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고, 2006년 5·31 지방선거 참패는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결정타가 됐다.

대북송금 특검 등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이어받았다. 2007년 노 전 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서해평화지대 설치 및 한반도 종전 선언 추진 등을 약속한 10·4정상선언을 채택했다.

정치를 바꾸려는 노 전 대통령의 노력과 투쟁은 계속됐으나, 동력을 이미 잃은 상태여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2006년 7월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2007년엔 대통령 연임제 개헌을 제안했지만 정치권과 국민의 반응은 냉담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보수언론과 끈질긴 전쟁을 벌였다. '일제 36년도 견딘 우리는 참여정부에도 살아남아야 한다', '전체주의적 억압을 획책했다',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등의 독설을 펼치는 <조선> <동아>에 맞서 노 전 대통령은 "불량식품만이 아니고 불량기사도 피해를 주게 된다"고 맞섰다. 청와대가 이들 언론의 취재를 거부하는 극렬한 대치도 빚어졌다.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정치학)은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실패는 부정하기 어렵지만, 민주주의의 진전과 사회복지예산의 강화, 남북관계의 관리, 새로운 발전모델에 대한 고민에서 긍정적 기여도 부정하기 힘들다"며 "노무현 정부에 대한 보수언론들의 공격, 선전선동에 가까운 주장 등 보수의 공세와 불리한 정치적 환경에 노무현 정부가 정치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짚었다.

솔직하게, 또는 거칠게, 사회의 기득권 구조를 타파하려고 했던 그의 노력은 결국 추문에 맞선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를 극한의 선택으로 몰고간 것은 결국 견고한 주류의 성벽을 허물지 못한 후진적인 한국정치였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고향으로 돌아간 '서민대통령'

봉화마을서 퇴임뒤 새 전형 만들려해인터넷 토론사이트 열어 소통 실험도

"대통령직을 좀 잘했으면 어떻고 못했으면 어떠냐. 야~ 기분 좋다." (2008년 2월25일, 봉하마을 귀향 첫 소감)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1년3개월여 봉하마을 생활은 그에게 또다른 실험이자 도전이었다. 62살의 '젊은' 전직 대통령이 된 그는 '생태 농촌 만들기'와 '시민 민주주의 발전'이란 새 화두를 안고 고향 마을에 돌아왔다. 그는 3만1873번째 진영읍민이 됐다. 퇴임 뒤 귀향한 첫 대통령이었다. '현직에서 좀 잘했으면 어떻고 못했으면 어떠냐'는 말엔 '새로운 전임 대통령의 전형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희망과 자신이 담겨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오리농법을 이용한 '친환경 봉하 오리쌀' 농사를 시작했다. 장군차를 심고, 마을 뒷산인 봉화산 나무 간벌에도 나섰다. 마을 앞 화포천의 습지 정화도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엔 8만1천㎡ 논에서 32t의 오리쌀을 거둬 들였다. 노 전 대통령은 "좁게는 제 고향, 넓게는 모든 농촌이 주말이면 손자, 손녀가 놀러올 수 있는 사람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내 밀집 모자와 점퍼 차림으로, 때때로 자전거를 타고 농촌마을을 도는 그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낯설지만 신선한 느낌'을 안겼다. 고즈넉했던 봉하마을엔 때 아니게 관광버스들이 몰렸다. 노 전 대통령은 따로 시간을 정해 관광객과 담너머 대화를 나눴다. 지난 달엔 방문객이 100만명을 넘겼다.

토론을 즐겼던 노 전 대통령은 인터넷에서 활발히 소통하려 했다. 지난해 9월엔 인터넷 토론 사이트인 '민주주의 2.0'을 열었다. 우공이 산을 옮겼듯 끊질기게 '시민 민주주의'란 과제에 매달려보겠다는 듯, 그는 '노공이산'이란 필명으로 전직 대통령이란 권위와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속내를 쏟아냈다. "호남만의 단결로는 영원히 집권할 수 없다", "(촛불 시위의) 정권 퇴진 요구는 헌정질서에 어긋난다", "정치하지 마라, 쏟아야 하는 노력을 생각하면 권세와 명성은 실속이 없고 그나마 너무 짧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순탄치 않았다. 귀향 전부터 일부에선 그의 봉하마을 사저 규모를 두고 초호화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노방궁'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귀향 4달 만인 지난해 6~7월께엔 이명박 정부가 '노 전 대통령이 무단으로 국가 기록물을 봉하마을 사저로 가져갔다'고 주장해 신·구 권력이 감정싸움을 벌였다. 인터넷 글들은 '말로써 말 많았던' 그의 대통령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불필요한 논란을 확산시켜 정치적 반목을 심화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실험은 지난해 12월 형 건평씨가 세종증권 비리에 연루돼 실형을 받자 치명타를 입었다. 노 전 대통령은 그 즈음 관광객 인사도 중단하고 칩거하다시피 했다. 결국, 자신마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등과의 돈거래 의혹에 휩싸여 수사선상에 오르며 실험은 중단됐다.

노 전 대통령은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구속 직후인 지난달 22일 "이제 저는 민주주의나 진보, 정의를 말할 자격을 잃었다. 더 이상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으며,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저를 여러분이 버리셔야 한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이 글은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은 자신과 그런 자신이 추구하기엔 너무나 버거워져버린 '실험'을 향한 절규이자 종료선언이었던 셈이다.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전직 대통령의 마지막 길…왜 조문조차 못하게 하나"

사진설명: 2008년 2월 퇴임해 청와대를 떠나며 배웅나온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설명: 지난 4월30일 검찰에 출두하려고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떠나기에 앞서 "국민에게 죄송하다"며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자료사진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한겨레> [ 한겨레신문 구독| 한겨레21 구독]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