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이, 중국 짝퉁의 화려한 변신

입력 2009. 4. 17. 09:20 수정 2009. 4. 1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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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뉴스 쏙]

기능·디자인 진짜 뺨치고 가격도 저렴

제품 넘어 문화 전반으로 문어발 확장

삼성(SAMSUNG)이 아닌 삼송(SAMSONG), 애니콜(Anycall)과 철자만 다른 애니콜(Anycoll), 아니면 애미콜(Amycoll)과 애니캣(Anycat)까지. 중국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는 '짝퉁'들이다. 우리나라에도 구찌 대신 구짜, 나이키 아닌 나이스 따위의 '짜가'가 판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짝퉁은 예전 한국의 짜가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 중국 최고의 유행어로 등극한 이른바 '산자이'(山寨)가 그것이다.

산도적 소굴에서 나온 말 '산자이'가 경제문화 새 코드로

'산자이'는 산채, 곧 산적들이 머무는 소굴이란 뜻이다. 이 말이 최근 의미가 확장되면서 '강한 모방성과 신속성을 갖춘 저렴한 생산체계'를 뜻하는 열쇳말로 떠올랐다.

산자이의 시초는 휴대전화로 추정된다. 중국 최대의 경제특구인 선전의 전자상가 거리 화창베이루에서는 밀수 완제품 휴대폰부터 유명 브랜드를 모방한 '짝퉁폰'까지 없는 게 없다. 짝퉁폰이 조잡함 때문에 한눈에 가짜인 줄 알 수 있는 '진짜 가짜'라면 밀수 완제품은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만들어진 뒤 반출되지 않고 중국 내에서 판매되는 '가짜 아닌 가짜'다. 하지만 산자이 휴대폰은 이와는 또 다른 '세상에 없는 가짜'다.

유명 브랜드나 또는 비슷한 이름을 붙였지만 정작 해당 브랜드에는 없는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미국 애플의 진짜 아이폰보다 기능은 더 높고 가격은 더 싼 가짜 아이폰인 '하이폰'이나 '마이폰' 등이 여기 해당된다. 애플의 로고인 먹다 남은 사과 모양을 마크로 달았지만 베어 먹은 부위는 다른 상표가 붙어 있는 식이다. 이런 산자이 휴대폰들은 원제품 이상의 성능을 갖춘 것들도 있어 삼성이 짝퉁 휴대폰을 만드는 중국 회사를 찾아내 주문자생산방식 거래를 제안했을 정도다.

한발 더 나아가 구매자가 원하는 브랜드나 구매자 이름을 붙여 나오는 산자이 휴대폰들도 있다. 담뱃갑 모양부터 파인애플, 자동차 모양 등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조잡하긴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발랄한 상상력이 산자이의 또다른 특징인 셈이다. 휴대전화뿐 아니라 노트북, 디지털 카메라, 컴퓨터 마우스, 액정티브이 등에서도 산자이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정품 업체들 못잖은 경쟁력-점점 퍼지는 산자이 문화

흥미로운 것은 산자이 제품들로 피해를 보는 쪽이 글로벌 기업들보다는 중국 토종 기업들이라는 점이다. 중국 기업들이 브랜드 파워가 떨어져 저가로만 승부하는데, 산자이 업체들은 저가이면서도 글로벌 기업들의 브랜드 파워를 베껴다가 활용하고 있다. 또한 토종 기업들은 연구개발과 마케팅 비용에 세금을 내야 하지만, 산자이는 이런 비용들을 거의 쓰지 않기 때문에 원가경쟁력에서 훨씬 앞서게 된다.

여기에 9년여 동안 시행된 휴대전화 생산 면허제도가 지난 2007년 10월 폐지돼 국가 면허가 없어도 일정한 품질 기준만 갖추면 합법 생산이 가능해진 것도 산자이의 등장을 부추겼다. 해외로 파고든 화웨이, 중싱 등을 제외한 내수 휴대전화 업체인 아모이, 버드 등은 위기를 맞아 폐업하거나 산자이 업체로 변신했다. 삼성의 협력 제의를 받은 휴대전화 업체도 주문자생산방식 거래를 거절하고 산자이 업체로 남는 길을 선택했다.

복제가 용이한 산자이의 특성상 디지털 제품을 주종으로 한다. 하지만 산자이는 이제 디지털을 넘어 문화 전반으로 확산되는 중이다. 중국 최대 검색엔진인 바이두와 구글, 야후를 한데 모아 '바이구후'라는 산자이 검색엔진이 지난해 등장했다. 중국 누리꾼들은 지난해 연말 중국판 산자이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기도 했다. 선전 부동산 값이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 베이징대 교수에겐 산자이 노벨 경제학상을, 유명 육상선수 류샹의 운동복을 디자인했지만 류샹이 베이징 올림픽에서 기권하는 바람에 허무해져버린 러닝복 디자이너에게는 산자이 노벨 물리학상을 주는 식이다.

인터넷과 함께 대중문화 영역에서도 산자이는 확산되고 있다. 미국 유명 드라마 <어글리 베티>를 모방한 산자이 드라마 <추녀무적>이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되고 있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제(설)에 국영방송 시시티브이에서 하는 유명 스타들의 쇼 <춘제완후이>에 맞서 산자이 스타들이 출연하는 산자이 춘제완후이가 열려 인터넷에 방송되기도 했다.

중국에서만 가능한 현상

이처럼 산자이 문화가 확산하고 있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급속도의 경제성장, 드넓은 시장, 다양한 소득 계층 등을 요인으로 꼽고 있다. 베이징에 주재하는 박래정 엘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중국의 시장이 워낙 넓기 때문에 어떤 산자이 제품이 나오더라도 소비될 수 있는 시장이 있고, 또한 중국 특유의 관대한 문화가 산자이 현상에 대해서도 용인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우리나라로 치면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가 공존하는 중국에서 소득 격차가 많이 나다보니, 60년대 소득 수준의 사람이 2000년대 수준의 소비를 하려면 산자이를 찾을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박 위원은 또한 이렇게 짝퉁으로 시작된 산자이 열풍이 문화 상품으로까지 확장하면서는, "현실의 장벽에 좌절하는 사회 밑바닥 층이나 아직 기성세대에 진입하지 못한 청소년층의 정서 속에서 독창성이 크게 발현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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