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연수원 25時] 上. 무한경쟁 부른 司試 1천명시대

2006. 10. 24.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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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시험 합격자 연 1,000여명 시대가 열린 지 5년. '사시 합격=판·검사'라는 등식은 사라진 지 오래다. 주변의 선망과 찬사를 즐길 여유는 없다. 300등내 임관이란 좁은 문을 뚫기 위한 무한경쟁만 있을 뿐. 시험 벌레로 내몰리는 사법연수원생의 실태와 연수원 교육의 개선 방향을 살펴본다.

사법연수생 1년차 이모씨(32). 보름 전인 지난 11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자신의 아파트 10층에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2학기 시험을 한 주 앞두고서다. 고교 때는 전국 수석도 했던 그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4년 공부 끝에 모두가 선망하는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정작 마지막 관문에서 그는 손을 놓아버렸다.

"같은 내용을 대여섯번 읽어도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땀이 나서 기록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씨가 평소 가족들에게 남긴 얘기다.

사법연수원은 전쟁터다. 사시 합격자 1,000명 시대를 맞으면서부터다. 일가 친척이나 친구들은 사시에 합격했다면 당연히 판·검사 되는 줄 알고 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연수원 2년간의 성적에 따라 180등까지 판사, 300등까지 검사가 된다. 예전에는 임관이 안돼도 변호사로 개업하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이 보장됐다. 요즘엔 '백수 변호사'가 흔한 풍경이다. 300위 안에 들기 위한 경쟁이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3 수험생은 저리 가라다. 고3들은 그나마 친구들과 동병상련의 정이라도 나눈다. 연수원은 아니다. 바로 눈 앞의 동기생들에 앞서야 '벼슬'을 할 수 있다.

사법연수생은 아침 6~7시 기상, 오전 10시~오후 5시30분 수업, 저녁 식사후 도서관행이라는 꽉 짜여진 일과를 되풀이한다. 대부분이 새벽 2~3시까지 책상에 붙어 있다.

"사시는 예선이고 연수원이 본선"이란 자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중간에라도 끼기 위해서는 고시 공부할 때의 2~3배는 해야 한다. 연수생들은 '정상적으로 공부하면 하위권' '열심히 하면 중위권'이라고 한다. 현재 연수원 2년차(36기) 1등은 여성. 그녀는 매일 새벽 5시까지 공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을 거의 안자는 셈이다. 1주일에 한번 일요일에 시체처럼 몰아서 잔다. 이렇게 독종, 별종처럼 해야 상위권에 낄 수 있다.

'독종'들끼리의 경쟁은 더 치열하다. 검사보다는 판사, 지방보다는 서울에 가기 위해서다. 군미필 남자들은 군법무관을 갈지, 공익법무관을 갈지도 경쟁이다. 판·검사에 임용되려면 군법무관 출신이 한결 유리하기 때문이다.

학업 스트레스가 가장 심한 때는 1년차 1학기. 왕년에 전교 1등 안해본 적이 없고, 사시 합격을 이뤄냈다는 자부심에 꽉 차 있는 1,000명이 스타트라인에 함께 서 있는 때다. 비슷한 실력자들을 한 곳에 가둬놓고 경쟁을 시키기 때문에 스트레스는 한계에 다다른다.

1년차 박모씨(30·여)는 "1학기 평가가 끝나고 주임교수에게 '넌 왜 그렇게 처지느냐'는 얘길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충격이 엄청났다"고 말했다. 그는 "남들 공부하는 시간에 나만 뒤처질까봐 불안해서 아프지도 못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만학도'보다는 '소년 등과생', 남자보다는 나이 어린 여성들이 학습 적응에서 한참 앞서 나간다. '연수생 70%는 우울증 환자일 것'이라는 믿거나말거나식 얘기도 공공연하다.

연수생들의 경쟁 부담감은 가족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최근 상을 당한 한 연수생은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가족들이 기말고사를 치르는 아들의 처지를 생각해 연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발인 전날에야 영정 앞에 회한의 절을 올릴 수 있었다.

고시촌 생활부터 경쟁에 시달려온 연수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만성위염 같은 잔병을 앓고 있다. 비타민은 기본이고 몸에 좋다는 보약 한두 종류는 누구나 복용한다. 구 소련 KGB가 개발했다는 각성제가 잠을 쫓는데 효과가 있어 누구누구가 먹고 있다는 소문도 돈다. 회식은 기피대상 1호다. 한 자리에 앉아봤자 이런저런 핑계로 술을 안 마시는 동료가 있는데 나만 마시면 손해라는 인식 때문이다.

1년차 김모씨(27)는 "교수가 바뀔 때마다 자기 소개서를 쓰는데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고 쓴 동료들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고 말했다. 그는 "연수생 사이 우스갯소리 중 법조인에게 가장 중한 처벌은 '사법연수원 1년형에 처한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김동은·강병한·임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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