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대부" 조양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

2003. 3. 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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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소자 조양은은 적어도 수감 10년째인 1989년 즈음까지 모범수로 알려졌다. 교도소에서 징계 한 번 받은 적이 없었다. 조양은은 사회에서도 잊혀져 가고 있었다.

인생의 봄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비록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지만 공주교도소에서 3년 동안은 마음만 먹으면 안되는 게 없었다. 89년 8월 순천교도소로 이감되면서 나를 향한 족쇄는 서서히, 그리고 점점 조여져 왔다.” 광주 출신인 그에게 순천은 마음의 고향이지만….급기야 조양은은 90년 순천교도소 난동 사건을 일으킨다. “10대 후반부터 전국을 돌고 돌아 순천에 왔을 때는 비록 철창 신세지만 고향에 온 것 같이 포근했다. 그런데 지역 연고지에 있는 재소자들을 연고가 없는 다른 지역으로 이감하는 조치가 갑자기 내려졌다.

나도 순천을 떠나야 했다.” 조양은은 동료 재소자 1200명과 함께 입방을 거부하고 옥상에 올라가 “이감 반대”를 외쳤다. “죽느냐 사느냐였다. ‘조양은의 파워’를 보여 줘야 했다. 다른 재소자들도 나의 기에 눌려 내놓고 반대하지 못했다.”난동 사건으로 조양은은 얼마 후 대전교도소로 보내져 1년 4개월 9일 동안 독방에 수감됐다. “너무 커진 내 힘을 교도 당국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를 자주 이감시켜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교도소 밖의 사정도 조양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조양은의 수감 중에도 ‘양은이파’는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키며 세력을 유지했다. 검찰에 따르면 88년 9월 14일 양은이파는 서울의 한 식당에서 양은이파 서방파와 함께 조직 폭력 3대 페밀리를 구축한 ‘OB파’ 보스 L 씨를 급습, L 씨의 아킬레스건을 절단한다. L씨는 미국으로 출국, 사실상 폭력 세계에서 은퇴한다.

조양은은 또 “이 시기에 폭력 조직이 사회 봉사 등 명분을 내세워 조직을 공식화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했는데 교도 당국이 나와 사회 조직간의 연계 고리를 끊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실제 이 시기 호남 주먹계의 ‘대부’ L 씨는 87년 3000여 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호청련’을 결성했다. ‘일송회’ ‘화랑 신우회’도 이때 등장했고, 폐암 치료를 이유로 형 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출소한 김태촌 씨도 89년 3월 ‘신우회’를 결성했다.

일련의 이 같은 사건들이 ‘특별 관리 대상 1호’였던 조양은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의 행동 반경을 좁히는 계기가 됐다는 게 검찰의 분석이다.

“10여 년이 흘렀지만 대전교도소의 독방 생활에 대한 악몽으로 지금도 가위에 눌리곤 한다. 죽고 싶었다.” 혹독한 시련을 겪은 조양은은 다시 진주&#8211;청주&#8211;대구 교도소로 세를 구축할 틈도 없이 정처 없이 옮겨 다녀야 했다.

“15년 수형 생활, 터널의 끝이 보일 때쯤 나에게도 꿈처럼 천사가 날아왔다. 그 천사에게 비가 오는 날은 빗소리에 장단을 맞추고, 새가 울면 새 소리에, 밤에는 귀뚜라미 울음 소리에 맞춰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94년 5월 조양은은 20세 연하의 반려자 김소영 씨를 만난다.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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