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대부" 조양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

2003. 2. 2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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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호텔 기습 사건은 피 말리는 조폭 전쟁의 시작이었다. 호남파 주먹들이 ‘화해를 명목으로 신상사파의 신년회에 동석해 오히려 뒷통수를 쳤다’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조양은은 다른 모든 조직을 상대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조양은은 “신상사파는 물론, 호남 선배들까지 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됐고, 피 말리는 3년간의 전쟁이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도망 다니면서도 ‘보디’(보디 가드)‘를 50명씩 대동하고 다녔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조직과 죽기 살기식의 싸움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경찰은 나의 사진조차 확보하지 못해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조양은이 필생의 라이벌이 된 서방파 김태촌과 조우한 것도 이즈음. 호남 주먹 선배들이 당시 광주에서 급부상하던 김 씨를 불러 올린 것. 찬바람이 불던 1976년 초, 조양은과 김태촌은 남산 인근에서 마주쳤다. 조양은은 “태촌이와는 구면이었다.

60년대 말 소년원에서 안면을 텄다. 그래서인지 태촌이 그때 ‘놓지’(칼을 먹이는 것을 뜻함) 못한 것 같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김태촌의 비수는 조양은이 존경하던 선배 O 씨로 향했다. 76년 3월 김태촌은 무교동 엠파이어 호텔 주차장에서 O 씨를 난자, 불구로 만들었다. 조양은은 “이때 최초로 조폭간 싸움에서 칼이 등장했고 칼잡이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양은이 범호남파의 두목으로 부상하고, 번개파 P 씨의 부하였던 김태촌도 서방파를 독자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조양은은 “나와 김태촌 사이에 ?고 ?기는 피 말리는 시간들이었다”고 말했다. 두 조직간 대결은 76년 4월 서울 태평로 아시아호텔에서의 집단 난투극으로 비화하면서 광주 등 호남권 일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정점으로 치닫던 대결은 공교롭게도 두목들이 검거되면서 종료된다. 전국 평정에 나선 조양은은 77년 10월 4일 광주를 찾았고, ‘OB파’ K 씨는 조양은을 광주관광호텔로 데려간다. “그 호텔이 반대파들의 본거지였는데 K가 멍청하게도 나를 거기에 데려갔다.” 조양은은 반대파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연행됐다.

“수십 명이 붙잡혔는데 조양은이 누군지 몰랐다. ‘내가 조양은’이라고 말하자 경찰관들이 깜짝 놀랐다. 엄청난 거구들 중에서 얼굴도 예쁘장하고 나이도 20대 밖에 안된 나를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조양은 검거는 서울지검 강력부로 직보됐고, 서울구치소로 압송된 조양은은 김태촌과 다시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김태촌 역시 O 씨 습격 사건과 신민당 각목대회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같은 시기에 자수해 왔던 것. 조폭 두목들이 모여든 서울구치소는 일순간에 긴장에 휩싸였다.

조양은은 “구치소 안에서 구원을 풀고 화해했다. 그때부터 태촌이와는 전쟁도 없었고, 각자의 세력을 존중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78년 6월 출소한 조양은이 그 해 11월 10일 서울 광주 대전 순천 등 각 지방 조직까지 규합, 전국적 규모의 ‘양은이파’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고 설명했다. 김태촌은 이듬해인 79년 출소한다.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10ㆍ26 사태와 12ㆍ12 군사 쿠데타 등 일련의 정변이 자신의 인생을 향해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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