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잔혹한 유산, 자폭 이데올로기

2010. 10. 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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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박노자의 국가의 살인]

남북의 '육탄 10용사' '리수복 영웅' 신화에 드리운 일제의 그림자…

'전체'를 위해 '개인'을 부정하라는 국가주의 도덕률은 현재 진행형

이데올로기의 정의가 많지만 가장 냉소적이면서도 현실에 가까운 정의는 "지배·피지배 관계의 비도덕적 부분을 모두 도덕화시켜주는 이념적 장치"일 것이다. 사실, 계급사회의 현실이란 그 어떤 도덕과도 본질적으로 사이가 멀다. 경쟁자를 물리치면서 입사에 가까스로 성공하는 노동자도, 그 노동자의 노동을 이용해 주주들에게 배분할 배당금과 국가에 납부할 세금, 즉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사업주도, 노동자로부터 빼앗은 잉여가치를 이용해 파괴적 군사력을 키워나가는 국가도, 결국 자신의 공포를 잠재우고 탐욕을 채우는 것이지 '이타'나 '박애'와 무관한 행위를 벌일 뿐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란, 이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행위를 아름다운 것으로 잘 둔갑시킨다. 경쟁자들을 내친 승자의 성공은 '적자생존, 부적자 도태'로 설명돼 사회의 '공익'을 최대화하는 일로 포장되고, 잉여가치 착취는 '파이를 키우는' 가치 창조로 예찬되고, 군사와 군대는 '용감무쌍' '자기 희생'의 동의어로 찬미된다.

포탄 나르다 포로로 잡힌 것을 미화했다?

보편적 도덕론의 차원에서라면, 군에서 국가와 상관의 명령을 받아 본인의 진정한 의사와 무관하게 생판 모르는 '적군'을 살해하는 것은 홧김에 연적을 죽여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일로 보인다. 연적 살해야 용서되진 않아도 일시적 감정 폭발로 설명이라도 될 수 있지만, 그 이름도 모를 아프간에 간 미군 병사가 별 감정도 없이 그저 명령대로 '탈레반으로 보이는' 이방인을 죽인다면, 이건 생명에 대한 존중도, 도덕적 개인으로서의 자각도 없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드>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계급사회의 이데올로기는 '군인'을 '우리 모두의 사표'로, 전장에서 도덕을 연마하는 도덕의 모범으로 만든다. 특히 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전장에서의 '육탄정신'이 마치 최고의 도덕률처럼 찬탄되는 일이 거듭돼왔다.

지금은 많이 망각됐지만,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온 국민이 배우고 따라야 하는 '군사적 도덕'의 모범은 이른바 '육탄 10용사'였다.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6·25의 서곡이라고 할 1949년 5월3일 개성 송악산 3개 고지를 둘러싼 남북군의 공방전에서 남한군 1사단 휘하 11연대의 서부덕 소위 등 10명의 특공대 대원이 박격포탄을 휴대한 육탄공격으로 북한군 토치카(기관총 진지)를 파괴해 고지 탈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이 어디까지 진실인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7년 전에 공간된 1사단 13연대 연대장이었던 김익열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공병소대 대원들이 박격포탄을 나르던 중 지휘관(박아무개 소대장)의 실수로 북한군의 포로가 되자 책임 추궁을 두려워한 지휘관들이 "포탄을 짊어져 육탄공격했다"고 꾸몄다는 것이다.

목격자들이 이미 세상을 뜨고 북한 쪽 문헌을 볼 수도 없는 지금으로서야 1949년 5월3일 개성 송악산에서 일어난 일들의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지만, 여기에서 '육탄공격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는 핵심이 아니다. 개체를 무(無)로 돌림으로써 전체를 이롭게 한다는 '살신보국'(殺身報國)이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국민 전체가 따라야 하는 '도덕률'이 됐다는 게 문제다. 개체가 전체의 요구에 자기 소멸을 무조건 선택해야 하는 대수롭지 못한 '소모품'에 불과하다면, 과연 개체의 권리인 인권이 설 자리라도 있는가? 자폭하면서까지 전체의 요구를 언제나 어디에서나 따라야 한다면,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시위하는 광주 시민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따르는 것도 도덕적 선(善)이 될 것인가? 국가를 위한 육탄공격이 도덕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면, 국가는 다름 아닌 신이 된다는 이야기다. 사실, 남한 국가주의 담론에서 국가는 바로 이와 같은 위치를 점해왔다.

남한뿐만인가? '육탄용사'들이 자폭하면서까지 모조리 죽여야 할 '적군'은 북한군이었는데, 역설적으로 북한이야말로 일찌감치 육탄용사 숭배를 크게 발전시킨 또 하나의 사회였다. 이미 6·25 전쟁 당시에 북한의 전장문학은 '살신을 통한 승리 성취'를 적극 찬양했다. 대표적으로 1951년 발표된 월북작가 김만선(1915~?)의 <당증>(원래 제목은 <지뢰>) 같은 소설을 들 수 있다. 북한군의 탱크가 안전하게 진격할 수 있게끔 지뢰를 제거해야 하는 공병대 분대장은, 지뢰가 다 제거되지 않은 채 탱크가 이미 진격을 시작한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행동하는가? 당연하게도(?) 남은 지뢰를 수류탄으로 터뜨려 그 위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전쟁미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북한판 '육탄용사'의 찢긴 시신 조각들이 나중에 수습됐을 때 그 팔은 계속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었다. 주머니에 신줏단지 이상으로 중요한 노동당 당증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산산조각으로 찢겨도 일편단심이 늘 조국·당·수령, 즉 '전체'를 향해야 한다는 것은 북한의 공식 이념이다.

다발총을 몸으로 막았다는데…

이 이념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교과서적 '자폭영웅'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바로 '리수복 영웅'이다. 북한 쪽의 공식적 설명에 따르면, 리수복 영웅은 6·25 때 18살의 나이로 38선 근방의 351고지 쟁탈전에서 남한군의 화구를 온몸으로 막아 전사함으로써 부대 돌격의 길을 열었다. '위대한 자폭'과 함께 '리수복 영웅'을 선전상 이용하기 편한 소재로 만든 것은 그가 죽기 전에 썼다는 시다. "둘도 없는 목숨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 바치는 것처럼 아름다운 희망, 빛나는 청춘, 위대한 삶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문제는 개체가 전체('조국')의 훌륭한 부속품이 되는 일 외에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지극히 국가주의적 내용의 이 시를, 사실상 조선작가동맹 소속의 문인들이 각색해서 발표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남이든 북이든 '육탄미담'들은 늘 그 사실적 내용에서는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불구대천의 적인 김일성주의의 북한과 박정희주의의 남한이 '육탄 찬미'만큼은 거의 비슷한 어조로, 같은 용어를 써가면서 했던 셈이다. 과연 양쪽의 '육탄문화'가 공통의 뿌리를 가졌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현대 한반도의 '육탄' 찬탄의 뿌리가 완전히 단일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예컨대 적의 화구를 몸으로 막았다는 리수복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2차 세계대전 시절의 소련 군인 알렉산더르 마트로소프(1924~43)의 '살신미담'을 원형으로 한다. "부대 돌격의 길을 열기 위해 파시스트 독일군 다발총의 화구를 몸으로 막은 마트로소프 영웅"을, 옛 소련 출신이라면 모를 수 없다. 초등학교 1학년, 아니 유치원 시절부터 마트로소프의 '의거'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지표라는 것을 한 명도 빠짐없이 배웠기 때문이다. 옛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야 육신을 쉽게 뚫어버리는 다발총의 총탄들을 몸으로 막는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하다는 전문가들의 진단과, 돌격하겠다고 일어서서 적군의 진지에 가까이 다가선 마트로소프가 사실상 적군 다발총의 총탄에 맞아 그저 그 화구 옆에 쓰러졌을 뿐이라는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전례를 염두에 두면, '리수복 영웅'의 진실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기만 한다.

마트로소프의 '의거'를 찬미한 소련 프로파간다가 기반으로 한 이념은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혁명 열사의 정신'이었는데, 그 문화적 뿌리를 따져보면 자신을 희생시킨 예수를 본받아 신우(信友)와 신앙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던져야 한다는 정교회의 전통적 윤리관에 있을 것이다. '리수복 영웅' 찬미 캠페인을 벌인 북한 지식권력자들은, 아마도 기본적으로 유교적 '살신성인'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봉건적 유교'를 배격해도, '문화적 무의식' 차원에서는 어디까지나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군국주의 세력이 조작한 '3용사' 미담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볼 중요한 대목이 있다. 1950년대 북한 인텔리들의 상당수는 태평양전쟁 시기를 국내에서 보내면서 일제의 전쟁 선전에 노출됐거나 적어도 일제하에서 학교교육을 받은 이북 지역 출신 내지 월북자였으며, 남한의 '육탄 10용사' 숭배를 선도한 1사단 사단장 김석원(1893~1978) 장군도- 당시 남한군 고위 장교들의 다수처럼- 일본군 출신이었다. 일제 패망 직전 대좌(대령)로 승진한 그가 '육탄 10용사'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때 의식적으로 일제가 흔히 사용한 '육탄 3용사'라는 말을 참조했다는 증언이 있다.

'육탄 3용사'는 과연 누구인가? 1932년 2월22일, 중국 상하이를 공격하는 일본 육군의 공병상등병 에시타 다케지(江下武二), 사쿠에 이노스케(作江伊之助), 기타가와 유주루 (北川丞) 등이 중국군 성책 공격이 계속 여의치 않자 긴 폭탄통을 같이 들고 육탄돌격을 함으로써 중국군 수십 명을 몰살시키고 성책을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게 당시 신문들을 통해 알려진 공식적 스토리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다른 '자폭 미담'과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도 사실과는 그다지 가까운 관계에 있지 않았다. 전후 학자들이 밝혀주었듯이, '3용사 미담'은 사실 육군 첩보부 쪽에서 실제로 중국군에게 사살된 몇 명의- 서로 연관이 없는- 전몰 공병들의 실명을 이용해 조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영웅'에 배고팠던 군국 일본의 '주류'에 이 조작된 이야기는 하늘의 선물과 같았다. 당장에 '3용사'를 주제로 연극을 급조해 무대에 올려버린 일본 전통극 가부키(歌舞技) 극장이나, 한 달 내로 관련 영화 6편(!)을 쏟아낸 영화 제작사, '3용사'를 주제로 창가를 공모해 우승작을 대서특필한 <아사히> 등 주요 신문과 그 창가를 녹음해 레코드를 쏟아낸 주요 레코드 제작업체, 심지어 '3용사' 테마를 맥주 광고(!)에 이용한 기린비루 등 맥주 생산업체나 '3용사' 장난감을 만든 완구업체까지 일본 사회 주류는 일제히 '3용사 붐'에 열렬히 동조했다. '3용사' 추모 창가는 국어 교과서에 실리고, '3용사' 미담은 국민윤리('수신') 교과서에 실리고, 한때 온 나라가 하나의 커다란 '3용사 기념관'으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이 열광 속에서 대륙 침략전쟁은 당연하다 싶은 일로 '절로' 정당화됐다.

'3용사'를 생각하면서 '육탄 ○용사'라는 명칭을 제안한 김석원은, 1949년의 남한에서도 이같은 효과를 도모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동족상잔이 언젠가 꼭 벌어질 듯한 상황에서 대북 적대심과 함께 외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던 신생 남한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해야 했는데, 이같은 '이념공작'에 일제가 남긴 '육탄용사'와 같은 사상적 유산은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북한의 지도층도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었으며, '육탄 이데올로기'를 비슷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했다. 당시 남북한은 많은 면에서 일란성 쌍둥이와 같았다.

'하라면 한다'는 전근대적 국민도덕

러일전쟁이라는 이름의 국제적 도살장을 낭만화한 일본 군인 사쿠라이 다다요시(櫻井忠溫·1879~1965)의 베스트셀러 소설 <육탄>(1906)에서 비롯된 '육탄용사'의 개념은, 왜 하필이면 유령처럼 동아시아 지역을 떠돌게 됐는가?

'전장이 진정한 남성을 키운다'는 것은 근대 유럽 군사주의의 '도덕관'(?)이기도 하지만, 부르주아 혁명을 겪거나 17~18세기 계몽주의·공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구미권 근대국가들은 개인의 근본적 생존 욕구를 완전히 부정하는 '멸사봉공적' 도덕을 구성원에게 대놓고 설교할 수 없었다. 성숙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들의 이윤추구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이 바로 개개인의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을 긍정하는 '경제적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소련이나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의 주체는 부르주아 계급이라기보다는 권위주의 국가였으며, 적어도 고성장 시대에 그 주된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돈벌이를 합리화하는 '경제적 개인주의'라기보다는 전체에 대한 개체의 무조건적 '헌신'을 요구하는 각종 국가주의적·집단주의적 개발주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장에서의 '담력 과시'를 '남성의 도덕률'로 보는 구미권의 군사주의는, 러시아·소련이나 동아시아에서 전근대적 '헌신' 이데올로기와 습합되면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을뿐더러 아예 계획적으로 죽여가면서 국가를 위하는 '육탄용사' 숭배로 더욱더 심화됐다. 살아 있는 육체가 조각조각 찢겨져 날아가는 끔찍한 죽음은, 남성이 가장 숭고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도덕률'이 됐다. 원래는 그저 심신의 작용들을 규정·규율화할 뿐인 '도덕'이, 남성의 몸을 언제나 전장에서 폭발시켜도 될 국가의 부속물로 만들고 말았다.

북한을 제외한 대다수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육탄용사'에 대한 무조건적 숭배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것 같은 대한민국만 해도 여전히 남성에게 국가·사회의 대표자로서의 선생이나 상사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덕목'으로 가르친다. 군에 입대해 살인 교육을 받으라면 받고, 잔업하라면 잔업을 하는 등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당연지사다. '육탄용사'의 전성시대는 가도, 같은 계통의 노예적 '국민도덕'은 자율적 개인의 삶을 허하지 않는 사회를 계속 지배하고 있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참고 문헌:

1.<6·25 전쟁 참전자 증언록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엮음, 2003

2.<북한문학사> 신형기·오성호, 평민사, 2000, 137~138쪽

3.'Когда мы вернулись с войны' Новая Газета, Лазарь Ильич Лазарев, 7 Мая 2001 г, www.novayagazeta.ru/data/2001/31/38.html

4.Kabuki's Forgotten War: 1931-1945,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9, pp.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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