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서 번지는 '지진 트라우마'
부산에 사는 직장인 강모(38)씨는 지난 12일과 19일 두 차례의 지진을 경험한 후 20만원을 들여 일본 온라인 쇼핑몰에서 '48시간 생존 가방'을 주문했다. 이 가방엔 물과 비상식량, 손전등, 침낭, 각종 약품, 로프 등 재난(災難) 상황 때 생존을 돕는 물품들이 들어 있다. 비상시에 운반을 쉽게 하기 위해 여행용 가방처럼 바퀴가 달려 있는 이 가방은 구성품에 따라 10만~40만원 선에서 판매된다. 강씨는 "지진이 잦은 일본엔 이런 '생존 가방' 하나 없는 집이 드물다는 말을 듣고 외국 사이트까지 찾아 구매했다"며 "뭘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정부만 믿고 있자니 불안해서 '해외 직구(직접 구매)'에 나섰다"고 말했다.
추석 연휴를 전후로 두 차례의 강진(强震)을 경험한 시민들이 "내 살길은 내가 찾자"며 '응급용 키트'를 직접 만들어 소지하거나 재난 시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는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지진 예보는커녕 지진 발생 후에도 주민들을 신속하게 대피시키지 못하는 등 미흡한 대처를 반복해온 정부에 대한 불신이 반영된 현상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G마켓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 생수 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21% 급증했고, 대피 시 쓸 수 있는 천막이나 헬멧 판매량도 각각 69%, 15% 증가했다. 재난 대비 응급 용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이상준(24)씨는 "12일 지진 이후 주문량이 평소의 4배 이상으로 늘어 지금은 4~5일치 배송이 밀려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진 피해를 가까이서 겪은 영남 지역 주민들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경북 경주시에서 나고 자란 손모(32·사업)씨는 지난 12일과 19일 두 차례의 지진을 경험한 후 다른 시도(市道)로 이사 갈지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손씨는 "마치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건물이 크게 흔들렸는데도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대피 안내 방송은 없었다"며 "경주 토박이들끼리 만나면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나'라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고 말했다.
이번 지진의 진앙(震央)과 가까운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에 살고 있는 임희숙(여·58)씨는 퇴근할 때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진정시킨다고 했다. 임씨는 "쿵 하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조마조마할 정도로 지진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며 "지진 이후에는 주차도 담장이나 집 바로 옆에는 하지 않는 습관이 들었다"고 말했다.
국내 재난 예보·경보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외국에서 만든 '지진 경보 어플'을 이용하고 있다. 특히 일본 기상청의 데이터를 이용해 지진 경보를 울려주는 스마트폰 어플(앱) '유레쿠루(지진이 온다는 뜻) 콜'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다.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를 통해 이 어플을 알게 됐다는 박철민(22)씨는 "일본어로만 돼 있어 불편하지만 우리나라 국민안전처보다 정보가 빠를 것 같아 다운받았다"고 말했다.
올해 일어난 큰 지진은 모두 영남 일대에 집중됐지만 공포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멀리 떨어진 수도권에서도 지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19일 지진의 위력은 야구 중계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서울 당산동에 사는 김모(여·30)씨는 "19일엔 진동을 느끼자마자 맨발로 백일 된 아이를 업고 1층까지 뛰어 내려왔다"며 "대피용 가방도 싸뒀고 당분간은 아기 띠로 아이를 안고 잘 계획"이라고 했다.
평소 재앙·재난 상황에 대한 준비를 꼼꼼히 해놓는 이른바 '프레퍼(Prepper·생존 전문가)'도 늘어나고 있다. 프레퍼는 준비를 뜻하는 'prep'에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어 'er'을 붙인 신조어다. 이들은 평소에도 비상용 로프, 물 정화제 등 생존 도구를 지니고 다니는 등 언제나 재난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 한국에서는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조금씩 프레퍼들이 생겨났다.
프레퍼들이 가입한 재난 대비 인터넷 카페에는 12일 경주 지진 이후 하루에도 수십 개의 게시글이 올라오고 있다. 주로 '생존 키트나 대피용 가방 만드는 법' '지진 대처법' 등에 대해 묻고 답하는 내용이다. 이 중에는 '정부와 언론을 믿지 마라'는 글도 상당수 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해 메르스나 이번 지진 사태 때 겁에 질린 국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정부가 제 역할을 못했다"며 "시민들의 '각자도생(各自圖生·각자 살길을 모색함)'은 지진에 대한 공포와 정부에 대한 불신이 결합돼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안전처의 '지진 대피소 앱'엔 12년전 없어진 은행이..
- "울산·경북 고속도로 교량 28개 내진 설계 안돼있다"
- 경주 부서진 한옥 2031채.. 와공 모자라 복구 6개월 걸릴판
- "경주 특별재난지역 선포 적극 검토하라" 朴대통령, 지진 피해 현장 찾아가 지시
- 오후 8시 33분
- [단독] ‘文 인척' 찾아가 프로필 전달... 내정 통보 받자 감사 인사한 해경 수장
- ’李 선거법’도 주심이 판결문 안 써… 재판장 중심의 요즘 ‘대등 재판부’
- [오늘의 운세] 4월 24일 목요일 (음력 3월 27일 癸亥)
- ‘이혼숙려캠프’ 측 “故 강지용 애도…누 되지 않고자 출연분 삭제”
- 4억짜리 페라리, 구매 1시간 만에 불길 ‘활활’... 무슨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