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작침] '청소년 역사인식 부재?'.."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박원경 기자 입력 2016. 8. 31. 15:05 수정 2016. 8. 3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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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이 '희석-삭제-미화'를 거치면 어느 순간 논란으로 바뀌기도 한다. 동시대를 사는 이들의 '공동의 기억'이 훼손되면, 계승되어야 할 역사는 변질된다. '역사 무지·역사 인식 부재'도 이런 변질 과정의 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끊임없는 기록과 교육, 즉 '공동의 기억을 지키려는 노력'에 의해서 진실로 남는다.

케이블 채널에 출연해 역사 문제를 받아 든 아이돌 AOA 설현과 지민. 두 연예인은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고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제작진의 힌트에 “긴또깡?”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론의 비판은 매서웠다. 연일 쏟아지는 비판 기사 앞에 갓 스물을 넘긴 두 연예인은 눈물의 사죄를 했다. 아이돌의 '역사 무지'는 청소년의 역사인식 부재가 투영된 결과로 해석됐다. 청소년 역사인식에 대한 설문 조사가 진행됐고, 언론의 관심도 청소년으로 옮겨갔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최근 소녀시대 티파니의 욱일기 사태 때도 그렇게 반복됐다. 그리고 종착지는 항상 ‘청소년 역사인식 부재’에 대한 사회적 질타.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고자 한다. ‘청소년 역사인식 부재’라는 사회적 현상과 그를 겨냥한 비판담론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이를 알아보기 위해 언론 기사를 시기별로 살펴봤다. 언론은 시대 상황과 문제 의식을 반영한다는 판단에서다. 키워드로 ‘청소년+역사인식’을 선택했고, 시기별 기사량을 집계했다. '청소년의 역사인식'이라는 소재를 다룬 기사는 과거에도 등장했지만, 2012년 이후로는 급속하게 증가하기 시작한다. 주로 ‘청소년들의 역사인식 부재’를 꼬집거나, ‘청소년의 역사인식을 우려’하는 내용이나 그런 주장을 인용한 기사들로, 기사량은 2013년 2분기와 2015년 4분기에 정점에 달했다. AOA 설현과 지민, 티파니 사태가 발생한 최근에도 기사량은 상당한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기사량이 정점을 찍었던 두 시기는 사실 돌이켜 보면, 용어 착오로 촉발된 해프닝에 가까웠다. "‘한국전쟁이 북침이냐 남침이냐’는 질문에 청소년 69%가 북침이라고 답했다"는 설문 조사가 공개된 시기(2013년 2분기)와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둘러싸고 정치권이 대립하던 시기(2015년 4분기)다. 눈 여겨 볼 대목은 2012년이 분기점이 된 이유와 이 시점을 기준으로 '청소년 역사인식 부재'를 지적하는 것이 하나의 담론처럼 형성된 배경이다.

SBS <마부작침>은 고등학교 역사 수업의 변화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었다. 역사 과목 교육 시간은 교육 제도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그래프에서 보듯 2001년까지의 6차 교육 과정에서 국사는 고등학교 필수 과목으로 지정돼 연간 102시간의 수업시수(교과 이수에 필요한 시간 단위)가 주어져 있었다. 이후 2010년까지의 7차 교육과정에서는 68시간으로 줄어들었다. 학생들의 학업 부담을 완화하자는 취지였다. 이명박 정권 당시인 2011년, 학교 수업에서 국사 교육이 아예 선택과목으로 바뀌었다. 이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세지자 이듬해부터 다시 필수 과목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입시제도의 현실을 놓고 볼 때 실질적인 역사 교육의 내실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미 2004년부터 수학능력시험에서 선택 과목으로 전락했던 한국사의 처지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년 넘게 수능 선택 과목에 머물렀던 한국사는 올해 수능부터 다시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다.


위 그래프는 시기별 고등학교 역사 수업 시수를 청소년의 역사인식에 대한 기사량 변화와 함께 나타낸 것이다. 고교 역사 교육이 선택 과목이었다가 필수로 다시 바뀐2012년을 기점으로 청소년의 역사 인식을 다룬 기사들이 증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한 고등학교 역사 교사는 “오랫동안 학교에서 역사 교육은 약화되는 길을 걸어왔는데, 역사를 선택과목으로 바꾼 건, 우리 고교 교육에서 국영수만 중요하다는 결정적 신호를 준 것과 다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2012년 역사가 필수 과목으로 환원된 뒤에도 수능에서 한국사는 선택 과목인 절름발이 상태였다"며 "일선 학교 가운데는 역사 수업 시간에 수능 과목 자율학습을 실시하는 등 파행적으로 운영된 곳도 적지 않아 당시 학교를 다닌 중고등학생들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고 촌평했다. 교육을 받는 당사자이면서도 어떤 수업을 받을지 결정권은 없는 우리 학생들이 역사 수업 자체를 등한시하게 만든 건 교육제도였던 셈이다.

정치권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청소년 역사인식’을 부각시키면서 최근 청소년의 역사인식 부재가 담론으로 형성됐다는 분석도 있다. 2012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던 때로 대통령 후보자의 역사인식, 뉴라이트 교과서로 촉발된 좌우 역사 교과서 논쟁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청소년의 역사인식이 정치권의 필요에 따라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는 분석인 것이다.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청소년의 역사인식은 최근에 들어와서 갑자기 악화된 것이 아니다”며, “역사 교육 약화와 함께 계속해서 진행되어 온 흐름”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특히 2012년 이후 '청소년 역사인식'이 자주 거론되는 것과 관련해서는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이려는 세력이 목적 달성을 위해 ‘청소년의 역사인식 부재’를 부각시킨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언론과 SNS에서 연예인의 역사인식 부재가 과잉 소비되면서 덩달아 청소년 역사 인식 문제도 함께 도마에 올랐다는 분석도 있다. 연예인은 청소년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논리가 연예인의 역사인식 논란이 청소년의 역사인식 논란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게 하는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연예인에 대한 언론와 여론의 과잉 소비 속에서 정작 더 중요한 문제인 공직자들의 역사 인식 부재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지난 2013년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5.16 쿠데타’의 성격을 묻는 질문에 “그것에 대한 정의를 내릴 만큼 공부가 되어 있지 않다”고 답했다. 동일한 질문에 비슷한 답변으로 회피하는 장관 후보자도 여럿이었다. ‘5.16’은 역사교과서에 ‘군사정변’으로 기재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임에도 '공부가 돼 있지 않다'는 답변을 하는데 조 후보자는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 7월에는 정부 출연기관인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의 이정호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이 한 워크숍에서 참석자들에게 “일본은 어머니의 나라”고 말하고, “천왕 폐하 만세”를 외쳤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연예인의 역사인식과 부재에 대해선 연일 보도를 쏟아냈던 언론은, 그러나 공직자들의 문제적 발언들은 제대로 다루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아래의 그래프는 연예인과 공직자들의 발언과 관련된 기사량을 분석한 결과로 설현에 대해 하루에만 214건의 기사를 쏟아냈던 언론은 이정호 센터장에 대해선 5건의 기사를 내는데 그쳤다. 트위터 등 인터넷 버즈량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유명 연예인에 대한 기사를 더 비중있게 다루는 언론의 속성을 감안하더라도 두 사안에 대한 기사량의 차이는 극명했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 교수는 “언론과 여론은 연예인의 역사인식에만 매몰돼 공직자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은 제대로 비판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주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누구의 역사인식이냐”고 언론에 되물었다.

이런 진단에도 불구하고 현재 청소년의 역사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야스쿠니 신사(神社)의 신사를 ‘젠틀맨’(紳士)이라고 인식하는 청소년이 적지 않고, 청소년의 절반 가까이는 안중근 의사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존재한다. 청소년을 두둔할 일은 아니지만, 청소년을 그렇게 만든 것이 누구인지 따져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국영수 중심의 학교 교육, 입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교육 현실에서 사회는 청소년들이 교과서가 아닌 다른 책에, 입시 공부가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이 둘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입시에서 역사는 소외되어 왔고, 몇 시간 안 되는 역사 교육은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왔다. 그 결과가 현재 청소년의 역사 인식이다.

올해 초등학생 6학년이 배우는 사회 교과서에는 ‘위안부’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2014년 실험본 교과서에는 ‘전쟁터의 일본군 위안부’라는 제목의 사진과 함께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 성 노예가 되었다”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지만, 지난해 위안부 협상 타결 이후 올해 배포된 교과서에는 ‘위안부’라는 용어가 삭제됐다. 현재 사회 교과서는 사진과 ‘위안부’라는 용어가 삭제된 채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 여성들은 일본군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라고만 적혀있다.

‘위안부’가 삭제된 지금 교과서로 배운 초등학생이 청소년이 돼 ‘위안부’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했을 때, 우리 사회는 ‘청소년 역사의식 부재’를 질타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위안부’라는 용어를 지운 사람, 청소년의 머리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지우도록 교육 정책을 결정한 사람은 청소년이 아닌 어른들이다.

권지윤 기자(legend8169@sbs.co.kr)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분석: 한창진·장동호
디자인/개발: 임송이

※ 마부작침(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방대한 데이터와 정보 속에서 송곳 같은 팩트를 찾는 저널리즘을 지향합니다.                              

박원경 기자seagu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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