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받아준 동네.. 그 동네 빛내준 노숙인
지난 9일 오전 서울 성동구 용답동의 한 2층짜리 다가구주택. 화재로 까맣게 그을린 2층 거실에서 초록색·파란색 조끼를 입은 장년 남성 3명이 불에 탄 가재도구를 하나씩 끄집어냈다. 바깥 계단을 따라 늘어선 동료 20여명은 이 물건들을 쓸 수 있는 것과 버릴 것으로 구분해 트럭에 실었다.
이보다 8일 전 이 주택에서 발생한 화재로 80대 독거노인과 50·30대 모자(母子), 신혼부부가 집을 잃었다. 노인은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신혼부부네 지붕은 무너져내렸다. 복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들을 돕겠다고 나선 이들은 자기 살 곳도 없는 노숙인들이었다. 이 동네 남쪽 끄트머리의 노숙인 쉼터 '24시간 게스트하우스'와 알코올중독·정신질환 치료 시설 '비전트레이닝센터'에서 생활하는 노숙인 30명이 "돈을 모아 드릴 수는 없어도 몸으로 도와드릴 수는 있다"며 복구 봉사활동을 자청한 것이다. 비전트레이닝센터에서 지내는 윤정배(54)씨는 "갈 곳 없던 우리 노숙인들을 거둬준 게 이 마을 쉼터였다. 그런 마을 분들이 집을 잃었는데 돕는 게 당연한 도리다"고 말했다.
원래 두 노숙인 시설은 이 동네의 골칫거리였다. 범죄는 없었지만, 주민들은 노숙인 수백명이 들락거리는 시설을 꺼림칙해했다. 시설에 한번 들어갔다 퇴소한 노숙인들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쉼터에 있다"며 동네 공원에서 노숙 생활을 계속했다. 주민들이 "노숙인들 때문에 공원에 못 가겠다"고 경찰서에 신고하면서, 경찰관과 노숙인 사이에 실랑이가 자주 벌어지곤 했다.
분위기를 바꾸겠다고 먼저 나선 건 노숙인들이었다. 지난 1월 비전트레이닝센터 노숙인 15명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봉사활동 동아리를 만들고 센터 측에 "일거리를 달라"고 요청했다. "술 마시고 행패 부리고, 주위 사람들한테 피해만 주면서 살아온 우리를 도와준 지역사회에 보답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노숙인들의 봉사활동 제안에 주민들은 처음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대청소와 독거노인 집수리 같은 봉사활동이 꾸준히 이어지자 주민들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은 쉼터와 주민센터, 주민들이 협의체를 만들어 노숙인들이 참여하는 정기적인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마을 대청소 하기, 일주일에 세 번 동네 독거노인을 방문해 요구르트를 드리고 안부 확인하기, 독거노인 이사·집수리 때마다 돕기 등이 주요 프로그램이다. 주민들은 노숙인들의 자활(自活)을 돕기 위해 한 시간 봉사활동을 할 때마다 1인당 5000원의 자립 지원금을 적립해주고 있다. 독거노인에게 배달하는 요구르트 값 등 봉사활동 비용도 주민들이 내고 있다. 이 동네 식당 6곳은 노숙인들이 봉사활동을 하는 날에 무료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봉사 6개월째를 맞아 노숙인과 주민의 경계는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매주 세 차례 노숙인 봉사단의 방문을 받고 있는 독거노인 황병화(81)씨는 "가족과 연락 끊고 산 지 8년이 됐는데, 봉사단원들이 자주 찾아와 '건강하시냐'고 물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했다. 지역 사회복지 협의체 위원장 오천수(60)씨는 "봉사단원들이 마을 일에 적극 나서니까 주민들도 봉사단원들을 '우리 마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며 "알고 보니 쉼터에 있는 노숙인들 주민등록도 우리 동네로 돼있더라. 진짜 이웃사촌이다"고 했다.
봉사단에 참여한 노숙인들은 홀로서기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다 2012년 쉼터에 들어온 이재유(42)씨는 1000만원을 모아 성동구에서 제공하는 임대주택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다. 이씨는 "차곡차곡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어엿한 집을 갖게 될 것"이라며 "그때는 지금보다 더 크게 사회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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