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한열이를 살려내라" 87년 6월, 국민은 분노했다

2016. 6. 9.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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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 이한열(1966-1987)/ 1987년 6월 9일, 나는 거리로 나갔다

#1
1987년 6월 9일 오후 4시 40분 연세대학교 정문
연세대 도서관학과 86학번 이종창은 뿌연 최루탄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오늘따라 경찰이 좀 공격적이네’
그는 화염병을 던지고 전경을 피해 교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2
같은 시각, 그 거리엔 경영학과 86학번 이한열도 있었다.
그도 이종창처럼 ‘쫓기는’ 신세였다.
전경의 SY-44 최루탄이 날아와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던 그의 뒷머리를 때렸다
피가 얼굴로 번졌고, 코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3
이한열과 이종창
서로 ‘모르는’ 사이 였던 두 사람은
뜨거웠던 87년 6월, 한장의 사진에 담겼다

#4
1987년, 국민은 분노했다
서울대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는데도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 열기를 외면했다
사진설명: 1987년 2월 7일, 박종철 추도회

#5
학생과 시민들은 힘을 모았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는 시위가 계속됐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이한열도 그 중 하나였다
사진설명: 명동성당 앞 시위대에게 최루탄 쏘는 전경

#6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나는 죽을까봐 겁 나 이불 속에 있었다”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난 이한열은 ‘광주의 아픔’에 대해 늘 괴로워했다
사진설명: 1980년 5월 20일, 광주 민주화 운동

#7
‘5월의 광주가 백양로에서 울렸다. 어린 날, 나는 자연을 만끽했다.
사회의 외곽지대에서, 무풍지대에서 스스로 망각한 채 살아온 지난 날이 부끄럽다
하여 오늘은 다시 살아나는 날, 내가 우리가 되는 날이어야 한다’
- 1987년 5월 18일자 이한열 일기 속 자작시
사진설명: 1980년 5월 22일, 광주 민주화 운동

#8
광주 민주화 운동 7년 후인 1987년,
이한열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세상에 분노했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다 그만 짐승의 발톱에 물려 죽었다.
우리는 분노한다. 이 시대의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다’
- 1987년 2월, 이한열이 쓴 시 <박종철>
사진설명: 1987년 4월 23일, 박종철 백일제 시위

#9
그래서 1987년 6월 9일에도 그는 거리로 나갔다

#10
이종창이 피흘리는 이한열을 끌어 안고
학교로 들어가는 동안 이한열은 계속 중얼거렸다
“뒤통수가 아파. 나 괜찮아?”
사진설명: 1987년 6월 9일,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는 이한열

#11
이한열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당시 그의 왼쪽 뇌 전체엔 피멍이 든 상태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30분,
의식을 잃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

#12
1987년 6월 11일자 중앙일보에
이한열이 이종창의 부축을 받은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이 실렸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사진설명: 1987년 6월 11일자 중앙일보 6면

#13
“한열이를 살려내라!”
이 날, 전국에선 이한열을 외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넥타이 부대’까지 가담해 시위는 ‘6월 민주항쟁’으로 번져나갔다

#14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평화적으로 정부를 이양하겠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6?29 선언’으로 항복을 선언한다
사진설명: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하는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

#15
그러나 이한열은 끝내 한국의 민주화를 보지 못했다
1987년 7월 5일 새벽 2시 5분, 그는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다
사진설명: 1987년 아들 영정을 바라보며 우는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씨

#16
“한열아, 이 많은 청년들이 네 한을 풀어줄거야. 가자, 우리 광주로 가자” - 이한열 어머니
나흘 뒤 연세대 본관부터 광주 5?18 묘역으로 이어진 ‘故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엔
160만명이 몰려 그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사진설명: 시청앞 광장 이한열 추모식

#17
자신의 안타까운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그의 일기장 한 켠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피로 얼룩진 땅, 차라리 내가 제물이 돼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듯한 저 하늘 위에라도 오르고 싶다’
사진설명: 1987년 7월 9일, 중앙청 앞 추도식

#18
이한열은 최루탄 연기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죽음은 한국 민주화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사진설명: 이한열과 어머니 배은심씨

취재.구성 이근아 / 디자인 주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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