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곡성의 哭聲, 공무원의 어이없는 죽음

입력 2016. 6. 2.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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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30대 가장 양모 씨의 직장인 전남 곡성군청 3층 그의 책상에 동료들이 추모 국화를 올려놓았다. 곡성군 제공
평소처럼 늦은 귀가였다. 연일 계속된 야근에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집으로 가는 시외버스 막차에 올라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던졌다. 1시간가량을 달려 도착한 버스정류장. 그곳에 사랑하는 아내(36)와 귀여운 아들(6)이 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가족의 얼굴을 본 순간 쌓인 피로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내는 임신 8개월의 만삭이었다. 가족과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은 행복 그 자체였다.

지난달 31일 오후 9시 40분경 광주 북구 오치동의 한 버스정류장. 전남 곡성군청 소속 7급 공무원 양모 씨(39)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랜만에 가족이 귀갓길에 함께했기 때문이다. 아들과 장난을 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으로 향했다. 뒤에서 이 모습을 보던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정류장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아파트 출입구에 먼저 도착한 양 씨는 뒤를 돌아보며 아내에게 빨리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소주병 한 개가 떨어졌다. 아내가 소주병 파편에 다리를 다치며 움찔한 순간 또 다른 무엇인가가 양 씨를 덮쳤다.

양 씨와 충돌한 것은 아파트에서 투신한 취업준비생 유모 씨(25·대학생). 양 씨는 곧바로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유 씨도 현장에서 사망했다. 다른 아파트에 사는 유 씨는 3주 뒤 지방직 9급 공무원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사고 30분 전 양 씨가 사는 아파트 20층 복도에서 술을 마신 뒤 아래로 몸을 던졌다. 유 씨는 A4용지 2장 분량의 유서에 ‘공무원 시험, 외롭다’, ‘(나는) 잘난 것이 하나도 없다’, ‘학창 시절 나쁜 짓을 하던 애들이 좋은 곳에 취업했다’ 등의 내용을 남겼다.

양 씨 주변의 사람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서울 명문대 출신인 그는 제약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2008년 지방직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했다. 경기 여주군에서 근무하다 처가가 있는 곡성군으로 자리를 옮겼다. 8년간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해 ‘성실맨’으로 불렸다. 승용차가 있지만 기름값을 아끼기 위해 광주에서 시외버스로 출퇴근을 할 정도로 검소한 가장이었다.

2014년부터 곡성군 홍보업무를 맡은 양 씨는 최근 영화 ‘곡성(哭聲)’의 인기 때문에 더욱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아름답고 인심 좋은 곡성(谷城)을 알릴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난달 열린 세계장미축제에 관람객이 몰린 데도 그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기치 않은 동료의 죽음을 맞이한 곡성군청 직원들은 손때 묻은 필기구가 놓여 있는 그의 책상에 하얀 국화꽃을 올렸다. 양 씨의 한 동료는 “사고 당일 저녁식사를 같이하면서 곧 태어날 둘째 이야기를 하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생생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유 씨의 유족들도 양 씨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에 죄책감을 호소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 씨는 아버지, 형(28)과 43m² 크기의 영구임대아파트에 살았다. 어릴 때 궁핍한 가정형편에 많이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형은 경찰에서 “동생이 힘든 가정형편에 학창 시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진술했다. 유 씨는 한 달 전부터 취업강박증 탓에 평소보다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양 씨는 공직생활이 8년밖에 되지 않아 가족들이 연금을 받을 수 없다. 곡성군은 양 씨가 야근을 하고 퇴근하다 변을 당한 것을 감안해 공무상 재해(순직)를 추진할 방침이다. 광주 북부경찰서는 양 씨 가족들에 대한 범죄 피해보상금 지원을 건의키로 했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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