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안방의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가 사회 문제가 되기 전에 누가 선물로 모 회사 제품 두 통을 줬어. 처음에 아이 방 가습기에 넣고 한번 썼지. 그런데 귀찮더라고. 그대로 벽장 속에 뒀는데 어느날 꺼내보니 유통기한이 지났길래 통째로 버렸어. 정말 내가 게을렀기에 망정이지... 지금도 그 생각하면 아찔해." 최근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한 경험담을 털어놓던 선배의 얼굴이 금세 어두어졌다.
실제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무서운 건 제품을 사서 쓴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엄청난 재앙의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가습기 살균제가 개발된 건 1994년이다. 이후 2011년 정부가 공식 확인하기 전까지 옥시 제품을 비롯해 모두 20여 종의 가습기 살균제가 시중에 유통됐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매년 60만개의 가습기 살균제가 팔렸다고 추산한다. 가습기 살균제에 고농도로 노출된 사람은 2010년 한 해에만 29만 명에 이른다고 추산한다. 실내가 건조해 가습기를 틀었고 가습기에 끼는 때를 없애기 위해 살균제를 썼을 뿐인데, 무고한 사람들이 원인도 모른 채 스러져간 것이다. 올해 4월4일까지 신고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1528명이다. 이 중 239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된다. 정부의 1,2차 조사(2013~2015년)에서 확인된 사망자 146명, 3차 피해 조사에서 확인된 사망자 79명, 올해 신고 접수 사망자 14명을 합친 숫자다.
사망자 유족들과 피해자 가족들은 절규한다.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들의 죽음은 세월호 승객들이 죽은 이유와 같다. 살해된 것이다"라고. "안전 시험을 하지 않고 죽음의 공기방울을 실내에 살포한 것은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업무상 과실치사로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라고. 특히 피해자들 중에는 노인도 있지만 어린 아이와 산모들이 적지 않았다. '안방의 세월호 참사'라는 표현까지 나오는 이유다.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 중 가장 많은 사망자(정부가 공식 확인한 146명의 사망자 중 103명)를 낸 옥시레킷벤키저의 한국법인장 아타 샤프달 대표가 사건 발생 5년만인 지난 2일 공식 사과를 위해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이 자리엔 휠체어에 탄 만성 폐질환 환자 임성준(13)군이 어머니 권미애(40)씨와 함께 참석했다.
샤프달 대표의 맞은 편에서 사과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임 군은 지난달 27일 서울중앙지법 558호 법정에서 속개된 살균제 손해배상 소송 재판에 코에 산소 튜브를 꽂고 참석했던 그 아이다. 경기도 용인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임 군은 생후 14개월 때부터 투병 생활을 해왔다. 2004년 마트에서 산 살균제를 가습기에 타서 사용한 게 화근이었다. 지금도 산소통을 단 손수레를 끌고 등하교한다.
2006년 6월 4일(당시 23개월) 아들 양준호 군을 가습기 살균제의 독기에 떠나보내고 10년째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맞는 부은정(44)씨의 가슴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아리다. 부 씨가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가 시판한 가습기살균제 ‘옥시싹싹 가습기 당번’을 처음 산 건 2005년 10월께. 준호의 침대 바로 옆에 가습기를 놓고 겨우내 밤부터 아침까지 틀었다. 이듬해 4월부터 준호는 기침을 자주 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준호의 입술이 퍼렇게 부어올랐고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담당 의사는 “이런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이 최근 많이 들어왔는데 10명 중 6명꼴로 사망한다”고 했다. 입원 13일째 되는 날부터 부 씨는 '병상일기'를 썼다.
준호가 두번째로 맞은 어린이날(2006년 5월 5일) 일기엔 이렇게 쓰여있다.
'너와 함께 웃으며 보내야 하는 어린이날, 자식을 건강하게 키우지 못한 엄마를 용서해줘. 엄마가 좀 더 (가습기살균제에 대해) 공부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부 씨의 가슴아픈 사연은 “널 위해 튼 가습기에 널…엄마는 10년째 죄인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기사<중앙일보 3월 17일자 14면>로 소개됐다. 준호의 사인은 폐섬유화(폐 조직이 딱딱하게 굳는 증상)와 산소포화도 저하 등이었다. 부 씨는 어버이날인 8일 중앙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상처받는 것에 대한 심리적 치료가 없는 상태에서 혼자 있으면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며칠 전 어린이날에 준호가 살아 있으면 초등학교 6학년인데 뭘 달라고 했을까. 핸드폰 사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지나가는 남자애들 보면 우리 애도 저만큼 컸을텐데...사춘기도 오고...알콩달콩 얘기하며 살았을텐데..."라고 덧붙였다.
[사건:텔링] “널 위해 튼 가습기에 널…엄마는 10년째 죄인의 마음”준호야! 엄마다. 네가 2006년 6월 4일(당시 23개월) 세상을 떠난 뒤 엄마는 10년 가까이 죄인의 심정으로 살고 있다. 피지도 못한 채 시들어 버린 것도 억울한데 가해자 측의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 없이 너의 죽음이 잊혀 가는 현실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최근 검찰이 전담수사팀을 구성해 진실 규명에 나서면서 희망
소방관 김덕종(40)씨는 2009년 5월 초 구미의 병원에서 2005년 10월 태어난 승준이를 떠나보냈다. 승준이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5월 3일 병원에 입원했다가 5월 5일 급히 큰병원에 가야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김 씨가 다니던 소방서의 구급차를 불러 직접 산소호흡기를 채우고 대구로 달렸다. 김 씨가 다른 시민들을 구할때 그랬던 것처럼... 대구 경북대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승준이는 이틀뒤 5월 7일 하늘로 떠났다.
김 씨는 올해 아들 기일을 영국 런던에서 맞았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규탄을 위해 지난 4일 런던의 레킷벤키저 본사 방문 차 런던에 갔기 때문이다. 김 씨는 기일에 둥근 풍선을 좋아했던 아들 승준이를 위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꼭 함께 타고 싶었던 런던의 관람차 '런던 아이(London Eye)'에 들러 가족사진을 찍었다.다른 아이처럼 감기로 병원 구경을 시작한 승준이 기침이 심해 병원에 다녀오는 횟수가 잦아지고...병원서 돌아오면 엄마랑 아빠는 더 신경써 가습기를 틀어주고 옥시싹싹 살균제를 넣어 주며 이젠 병원 가지 말자고...이렇게 허망하게 떠난 승준이는 7년만에 런던에서 아빠 손잡고 뭇 아이들 속에서 런던아이를 탑니다."(환경보건시민센터 '런던항의행동13신' 중에서) 이처럼 가슴을 후벼파는 사연들은 숱하다.
옥시의 샤프달 대표는 공식 사과 때 "피해자들과 그 가족분들께 가슴 깊이 머리를 숙여 사과 드린다. 특히 질병관리본부로부터 1등급과 2등급의 피해 등급을 받은 피해자들에게는 우선적으로 보상안을 마련하겠다"고 머리를 숙였다. 옥시 측은 2013년 조성한 50억 원의 기금 외에 추가로 50억 원을 더해 모두 100억 원의 인도적 기금을 마련해 피해자 구제를 위해 사용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켜켜이 쌓여온 피해자들의 불신의 벽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해결책이 될 수도 없다. 선(先) 진상규명, 후(後) 책임자 처벌, 그 다음에 납득할 만한 보상의 순서로 꼬인 실타래를 풀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도 어처구니없이 스러져간 주검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진 못할 것이다. 다만 적어도 '안방의 세월호 참사'의 재발을 방지하는 잠금장치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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