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노동의 그늘, 재래식 직업병 앓는 한국사회

박송이 기자 2016. 3. 2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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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메탄올·수은 등 고농도 노출에 의해 급성 중독되는 ‘후진국형 산재’ 유행 우려
중소제조업체가 몰려 있는 인천 남동공단. 지난 2월 17일 이곳에서 파견 노동을 하던 20대 여성이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 위기에 빠졌다. / 이상훈 선임기자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김현정씨(가명·28)는 자신이 만지는 화학약품이 자신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 독성물질인지 몰랐다. 김씨는 2015년 9월부터 경기도 부천시 소재 휴대폰 부품 제조회사의 하청업체에서 일했다. 파견노동자였다. 이 업체는 알루미늄 판을 깎아내 휴대폰의 버튼을 생산했다. 그 과정에서 알루미늄 판에 메탄올이 지속적으로 분사됐다. 김씨는 작업장을 돌아다니며 완성된 제품을 검사하는 업무를 했다. 불량품을 확인하기 위해 기계에 얼굴을 가까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품에 남아있는 메탄올을 제거하기 위해 손으로 직접 메탄올을 닦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2016년 1월 15일, 야간근무조로 출근하려던 김씨는 갑자기 메스꺼운 구역증세를 느꼈다. 병원에 갔지만 이상이 없다고 했다. 김씨는 다시 일하러 갔다. 야간근무를 마친 1월 16일 오전 9시 김씨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당시 야간근무로 피곤한 탓이라 생각하고 귀가해 잠들었으나 잠이 깨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응급실로 향한 김씨는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이후 의식은 돌아왔지만 눈의 시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김씨가 만지고 흡입했던 메탄올은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420조에 의해 ‘관리대상 유해물질’로 지정돼 있다. 규칙 제440조는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관리대상 유해물질에 대해 알려야 한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사업주는 근로자가 특별관리물질을 취급하는 경우에는 그 물질이 특별관리물질이라는 사실과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에 따른 발암성 물질, 생식세포 변이원성 물질 또는 생식독성 물질 등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에 관한 내용을 게시판 등을 통하여 근로자에게 알려야 한다.” 또한 제 422조는 관리대상 유해물질을 취급할 경우 국소배기장치를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업주는 근로자가 일하는 실내작업장에 관리대상 유해물질의 가스·증기 또는 분진의 발산원을 밀폐하는 설비 또는 국소배기장치를 설치하여야 한다.”

그러나 규칙은 작동하지 않았다. 사업주도 몰랐다. 10년째 사용해 온 공업용 알코올이 메탄올인 것도, 노출될 경우 뇌손상이나 실명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권동희 노무사의 말이다. “사업주들은 아직도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에서 자기들이 아무런 고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업계에서 다 쓰니까 썼다는 거다. 메탄올이 위험한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사업주는 국소배기장치 설치나 보호구 지급 같은 기본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물인지 메탄올인지 사업주도 노동자도 알아야 하는데, 문제는 이를 누가 알려줄 것이냐다. 과연 관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해당 사업장의 작업환경 측정 결과 노출기준 200ppm의 5~10배에 달하는 1030.1~2220.5ppm의 메탄올이 검출됐다. 휴대폰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다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위기에 처한 김씨의 사례가 알려지면서 3명의 추가 피해자가 더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례를 후진국형 산업재해로 본다. 김씨의 질환이 직업병임을 밝혀낸 김현주 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이번 사례가 ‘재래식 직업병’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위험의 외주화가 이뤄지면서 재래식 직업병이 다시 유행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이번 메탄올 사건은 특정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같은 공정을 보유한 여러 개의 소규모 사업장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 사회에 재래식 직업병이 유행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위험이 하청업체로 외주화되고, 위험관리 비용을 하청업체 사업주가 떠안게 된다면 직업병 예방을 위한 조치를 취하기가 어려워진다.”

지난해 발생한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위치한 남영전구 수은 중독 사건도 후진국형 산업재해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송한수 조선대학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급성중독이 발생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고농도 노출에 의한 급성중독이 줄어들고 저농도 노출에 의한 만성질환이 늘어나는 추세다. 저농도 만성질환은 없다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이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서 늘어나는 건데, 20년간 소음에 노출되어 난청이 생기는 경우 등이 그렇다. 저농도 만성질환은 주기가 있는데, 20~30년 증가하다가 많이 알려지면 관리가 되면서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최근 발생한 수은 중독이나 메탄올 중독은 급성중독이다. 뜬금없고 후진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남영전구 수은 중독 사건도 메탄올 중독 사건과 비슷하다. 남영전구 공장의 철거작업을 하다 수은에 중독된 유정석씨(가명·46)도 작업 현장에 수은이 있는지, 수은의 위험성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현장이 어둡고 하니까 수은이 아니라 물인 줄 알았다. 수은이 있다고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작업 기간은 한 달 정도였는데, 그 기간 동안 철거작업을 했던 다수의 노동자들이 수은에 중독됐다. 하루 이틀 만에 헛구역질을 하고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3일이 지나자 온몸에 발진이 생겼다. 남영전구 관계자에게 몸이 아프다고 말했지만, “공장이 오래돼서 그렇지 문제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남영전구 수은 중독 사건도 메탄올 중독 사건처럼 작업 시 유해 요인에 대한 정보가 노동자들에게 전혀 제공되지 않았다. 안전보호장비도 없었고, 유해요인 노출에 의해 증상이 발생했어도 관리되지 않았다.

남영전구 공장 철거공사 당시 현장에서 관찰된 수은. / 광주근로자건강센터 제공

전문가들은 하청구조가 만연하면서 안전에 대해 누구도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지 않게 되면서 이러한 재래식 직업병이 더욱 확산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권동희 노무사는 이 사건이 한국 사회의 중첩된 문제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으며,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들 사건에는 원청의 문제, 노동부의 관리·감독 문제, 파견노동자 문제 등 많은 문제가 중첩돼 있다. 복합적으로 문제가 많이 있는데, 한번에 해결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반복될 수밖에 없는데, 예컨대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5조 3항에 따르면 금지 대상 업무에는 ‘관리대상 유해물질’ 사업장이 포함되지 않는다. 168개 관리대상 유해물질 사업장을 파견 금지 대상에 포함시키는 법 개정이 시급하다.” 그러나 정부는 거꾸로 파견업종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다. 문길주 광주근로자센터 사무국장은 “앞으로 이런 문제는 정부에서 파견업종을 대폭 확대하면서 더 늘어날 위험성이 있다”며 “메탄올 중독 사건도 수은 중독 사건도 노조가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벌어졌다. 원청 노조에서라도 지적을 했어야 하는데 이 또한 없었다. 노조 조직률은 10%도 안 되고 파견노동자들은 더더욱 어렵다.” 특히 파견노동으로 처음 일을 시작한 20대의 경우 더욱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박혜영 노무사의 말이다. “일 경험이 없는 20대 그런 사람들은 판단을 못한다. 40대에 파견업체를 통해 회사를 구하던 분이 그랬다. 하청업체 통해서 일하는 게 너무 위험하고 무섭다고. 사고 나면 누가 책임질지, 산재보험은 되는지 무서워서 그만두고 하청업체로 들어갔다. 그러나 일 경험이 없는 20대는 그런 판단도 못한다. 그냥 아무런 정보 없이 내몰리는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위험이 쏠리면서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던 재래식 직업병이 한국 사회에서 다시 유행하고 있다. 정부, 대기업, 사업주 모두의 책임이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위험은 한국 사회에 큰 숙제로 남아 있다.

발병 후 진단까지 산재급여 못 받는다?

남영전구 수은 중독 사건이 발생한 지 11개월. 노동자들의 후유증은 깊다. 남영전구 수은 중독 사건의 발생 시점은 지난해 4월이다. 수은중독 피해자들은 노동력을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일상생활도 힘들다. 유씨는 잠을 자지 못한다.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2~3시간 잠을 잘 수 있다. 한 시간만 움직여도 한 달을 일한 사람처럼 몸이 피곤하다. 송한수 교수의 말이다. “유씨의 경우 40대인데, 수은 중독 이후 70~80대가 돼버린 느낌을 받을 것이다. 수은 중독은 신경을 손상시키는 것인데, 신경은 한 번 손상되면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린다.” 그러나 산재 요양급여는 4월에 종료될지도 모른다. 유씨에 따르면 근로복지공단은 수은이 몸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보고 다음달 17일에 요양급여를 종료하겠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고 한다. 현재 유씨는 요양급여로 월급의 70% 정도를 받는데, 이것이 끊기면 당장 생계와 병원비가 문제다.

현실적인 문제는 또 있다. 유씨가 수은 중독이 된 것은 지난해 4월이지만, 그해 10월까지 그 원인이 수은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내지 못했다. 4월 이후 몸이 아파 전혀 일을 하지 못했던 유씨는 10월에야 비로소 자신이 수은 중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유씨는 발병한 시점부터 진단을 받은 시점까지에 해당하는 6개월치의 요양급여를 받지 못한다. 송한수 교수의 설명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재요양급여를 진단시점부터 지급해 왔는데, 보통 산재 발생시점과 진단시점이 일치했다. 산재 인정이 ‘사고’를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사고 나는 날짜가 곧 진단 날짜이다. 그러나 이번에 수은 중독 사고는 산재시점과 진단시점이 차이가 난다. 지난해 4월에 사건이 터지고 수은 중독인지 모르고 병원만 다니며 앓던 사람들이 10월에 언론 보도가 되면서 이런 문제를 처음 알게 됐다. 발병시점과 진단시점이 차이가 나는데, 근로복지공단은 이에 대한 판단 기준이 없다. 이런 상황이 분명히 있음에도 근로복지공단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산업재해 전문가 김현주 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인터뷰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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