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들부들 청년][4부① 미개의 출구 'ㅇㅈ'] "노력만큼 알아달라"..불평등에 지친 청년에 필요한 건 '인정'

이혜리·김서영·이효상 기자 2016. 3. 21.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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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개한’ 한국에 있어야 할 세 가지



“ㅇㅈ? ㅇㅈ!” 청년들이 많이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인정’을 의미하는 ‘ㅇㅈ’이라는 단어가 흔히 보인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할 때 붙이는 관용구다. ‘ㅇㅈ?’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에겐 ‘인정충’이란 비아냥이 날아든다. 왜 청년들은 남의 ‘인정’을 구하는 것일까. 경향신문 ‘부들부들 청년’ 취재팀은 한국이 미개하다고 말한 청년 21명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상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답하기 너무 어렵다”는 말이 가장 많이 나왔다. “한국이 헬조선”이라거나 “정치권은 더러운 곳”이라고 습관처럼 말해온 청년들에게 눈으로 보지 못한 ‘대안’을 듣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힘겹게 나온 이들의 답변을 데이터 기반 컨설팅 업체 ‘아르스 프락시아’의 김학준 연구원과 함께 분석했다. 청년들의 말 속에선 정치 성향에 관계없이 ‘인정’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교육’ ‘복지’도 핵심 단어였다.

청년들은 이상적인 사회의 요소로 청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정’을 꼽았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과 돈이 없다는 이유로 생존의 위협에 처하지 않을 만한 국가의 복지시스템을 원했다. 위 의미망 분석 속 화살표 방향은 단어가 이어지는 앞뒤 순서를 가리키며, 단어를 잇는 화살표가 굵을수록 한 문장에서 함께 쓰이는 빈도가 높다.

■ 존재를 인정 하라

청년들이 말한 대안 중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인정’이라는 단어다. 의미망 속에서 ‘인정’은 ‘세대’라는 큰 줄기와 엮여 있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된 ‘윗세대’는 ‘신분’의 ‘대물림’과도 연결된다. 윗세대는 청년들에게 노력하라고 말하지만, 청년에게 정작 계층의 ‘수직이동’은 쉽지 않다. 벽에 부딪힌 청년들은 윗세대에 대한 ‘불신’만 커진다.

청년들은 그 지점에서 ‘인정’을 찾는다. 청년들에게 인정이란 ‘있는 그대로의 청년’에 대한 수긍을 의미한다. 산업화세대나 민주화세대의 인정 욕구는 사회적으로 보상이 되었지만 현재 청년들은 그렇지 못하다. ‘나이’ ‘능력’ ‘성실성’을 충족해야만 말할 자격이 있다는 논리로 청년들의 입은 다시 막힌다. 송현철씨(28·가명)는 “한국에서는 말을 하려면 어떤 자격을 갖춰야 되는가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옷이 되게 특이하니 공식적인 자리엔 정장을 입고 와달라”거나 어떤 의견을 제시하면 “군대는 갔다 오셨느냐, 세금은 내 보셨느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송씨는 “어떤 이가 군대도 갔다와 보고, 세금도 내봤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는지를 따진 다음에야 그가 하는 말을 인정해주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인정은 대화를 가능케 하는 첫 단추다. 박성현씨(30·가명)는 “미개한 당사자들이 ‘나는 미개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우성씨(31·가명)도 “상대방의 의견을 인정해야 한다”며 “자기 말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 ‘집단’이라는 개념으로 묶였던 청년들은 이제 그 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개인에 대한 인정은 진정한 공동체 회복의 다른 말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희준씨(31·가명)는 퀴퀴한 곳에 학생들을 집어넣고 기합을 주다가 마지막에 ‘사랑으로’ 같은 노래를 부르며 단합을 도모하는 초·중·고교 때 수련회 모습이 집단주의가 드러난 극단적 사례라고 본다. 이씨는 “제발 ‘우리’라는 말을 그만하고 ‘개인’이라는 말을 했으면 좋겠다”며 “개인을 인정하고 배려하지 못할 것이라면 그냥 관심을 꺼달라”고 했다.

‘인정’이라는 단어는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존재감이 미약한 청년의 위치를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그렇다. 이윤정씨(31·가명)는 “커피숍 알바생이나 식당 종업원에게 일부러 하대를 하며 자신이 ‘갑’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직장이나 일상에서 대우를 받지 못해 다른 데서 인정을 찾으려 한다”고 말했다.

결국 청년들이 말한 ‘인정’은 직업에 대한 차별이나 소득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해 달라는 다른 말이기도 하다. 정유석씨(27·가명)는 “지금은 노력과 결과가 완전히 비례하지 않는다”며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바란다고 했다. ‘노오력’하라면서 노력한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기성세대의 ‘꼰대짓’과도 연결된다. 인정 욕구는 끊임없이 내 편이 있음을 확인해야 하는 시대에서 청년들이 갖는 불안감의 표현이다.

■ 변화의 전제조건 교육

“살면서 위기가 닥쳐도 튼튼한 자기 생각과 철학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거든요. 점수만 나오면 그만인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대학생 황유진씨(22·가명)의 말이다. 청년들의 말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키워드는 바로 ‘교육’이었다.

이계연씨(21·가명)는 “학교에서 선거의 4대 요소를 외우라고 하지만 시민으로서의 교육은 없다”며 “공교육 수업의 폭을 (시민 교육으로) 넓혀가는 게 가장 근본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교사가 아닌 학생들 서로를 향한 책상을 꿈꾼다. “학생들이 서로 대화와 토론을 많이 하는 것” 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이씨는 말했다. 이슬기씨(25·가명)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불합리한 것들을 인지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보수 성향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명의 현명한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철인정치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보수 청년 김진건씨(26·가명)도 “한국은 시험을 위한 공교육이기 때문에 교양 쌓는 것에 인색하다”며 “교양을 위한 순수학문 교육도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보수 성향의 강소연씨(31·가명)는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미개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인간다운 인간을 기를 수 있는 쪽으로 교육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청년들은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봤다.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려면 ‘남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소연씨는 “학생 때는 공부 기계, 대학생 때는 취업 기계, 일할 때는 돈 버는 기계로 살다 보니까 여유가 없어서 비인간적으로 되어가는 것 같다”며 “시험 없는 학기를 만드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광표씨(32·가명)는 “하루에 12시간 일하고 집에 들어와서 예능 프로그램 잠깐 보는 상황에서 삶의 여유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각을 하겠느냐. 생각의 영역 자체가 좁아지는 건 당연하다”며 “여유와 시간이 확보되는 게 이상적인 사회에 필요한 핵심요소”라고 말했다. ‘시간’에서 ‘침몰’, ‘세월호’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한국사회의 ‘시간 없음’이 초래한 재앙을 보여준다.

청년들이 원하는 ‘변화’는 제도적인 영역만을 뜻하지 않는다. ‘변화’에서 ‘제도’로 이어지는 의미망의 가운데에는 ‘인식’이라는 키워드가 자리 잡고 있다. 인식의 변화 없이는 제도의 변화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슬기씨는 “법과 제도가 변해도 인식 전환이 되지 않으면 근본적으로는 변화가 없는 것이나 똑같다”고 했다. “나이가 벼슬인 줄 알고 고나리질(‘관리 질’을 변형한 말로 이것저것 간섭하거나 가르치려 드는 행위를 낮춰 이르는 말)하는 어른들을 딱히 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으냐”는 게 이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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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적 사회상 복지 국가

교육과 함께 ‘복지’도 큰 축을 이뤘다. 청년들은 또 그 복지를 ‘국가’가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경쟁에서 뒤처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 안전망으로서의 국가 복지다. 이계연씨는 “롤러코스터처럼 한 번 떨어져도 다시 올라가는 게 가능한 사회를 꿈꾼다”며 “아무리 상처를 입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패배의식이 많이 느껴지지 않고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게 좋은 사회”라고 말했다. 송현철씨는 “단지 내가 바라는 건 이 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생존이 보장되는 사회”라고 했다. 송씨는 “생존이 위협받는 것을 막아 주는 게 사회가, 국가가 해야 하는 최소한의 일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희준씨는 “직장을 다니더라도 사회적 안전판이 없으니까 매사가 걱정스럽다”며 “옛말에 예절은 먹고살 만해야 되는 거라는데 먹고살기 힘든 지금 미개를 말하게 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했다.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이 복지와 연결된 것은 이상적인 사회상을 구현한 나라로 꼽혔기 때문이다. 이 나라들에서는 한국과 달리 인간으로서의 합당한 ‘처우’를 받을 것이라고 청년들은 말했다. 노르웨이를 지목한 정유석씨는 “부의 대물림이 적고 신분의 수직이동이 가능하다”며 “평등에 있어서 어느 정도 발전한 나라라고 본다”고 했다. 박준기씨는 “나와 동년배의 친구들이 북유럽 복지국가들에서 어떤 처우와 사회복지 서비스를 받고 사는지 궁금하다”며 “그럴 때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덴마크, 캐나다, 미국, 독일을 꼽은 청년들도 있었다. 캐나다를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라고 말한 최미나씨(29·가명)는 “캐나다에서 내각 장관들을 여성과 남성에게 절반씩 할당했는데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It is 2015!)’라고 말하는 걸 보고 너무 좋았다”며 “다양성을 인정하고 차별하지 않는 곳이라는 느낌”이라고 했다. 최씨는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최저 생계수준의 최저점을 (한국보다) 높여줬으면 좋겠다. 라면 말고 그냥 좀 맛있는 거 먹으면서 노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까. 청년들은 ‘상식’을 기반으로 ‘대화’를 하며 풀 것이라고 상상했다. 김유리씨는 “사회적인 자정작용”을 언급했다. 김씨는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문제를 지적하면, 사람들이 그 문제점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사회적인 자정작용이 작동할 것”이라고 했다. 이계연씨도 일간베스트저장소 게시글에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오뎅에 빗댄 것을 예로 들며 “잘못된 행태와 발언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심판하자고 하는 사람의 비중이 더 높을 것이고, 그러면서 집단지성이 실현될 것”이라고 했다.

<이혜리·김서영·이효상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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