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숭례문과 훈민정음

엄주엽 기자 2016. 1. 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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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의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1974)에는 6·25전쟁 때 남대문(숭례문)에 대한 작가의 기억이 나온다.

문학평론가 김윤식도 1955년 경남 진영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했을 때 남대문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숭례문은 이처럼 우리 문화의 원형 같기도 하고, 서울이라는 대처, 곧 세상을 표상하기도 했으며, 때로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을 상징하기도 했다.

1998년 2월 숭례문 소실 당시 우리 모두가 느꼈던 깊은 좌절도 이런 무의식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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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엽 / 문화부장

소설가 박완서의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1974)에는 6·25전쟁 때 남대문(숭례문)에 대한 작가의 기억이 나온다. 서울을 떠나 피란을 가며 돌아보았던 남대문이다. “나는 거의 종교적인 경건으로 예배하듯이 남대문을 우러르고 돌아서서 남으로 걸었다.…남대문을 본 뒤로 이상하게도 훨씬 덜 절망스러웠다”고 회고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도 1955년 경남 진영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했을 때 남대문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한마디로 폐허였다. 서울역에서 바라보이는 것은 남대문뿐이었다.” 그 폐허 속에서 남대문을 보며 이 시골 청년은 “비로소 세상에 뛰어들었다는 느낌”을 가진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에 등장하는 남대문은 좀 다르다. 억압적 사회 상황에서 방황하던 대학생 영철이 한밤중에 남대문에 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당시 청년문화를 그리고자 했던 하 감독은 남대문을 ‘국가’ 혹은 ‘전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경례는 그런 것에 대한 일종의 희화화였다.

숭례문은 이처럼 우리 문화의 원형 같기도 하고, 서울이라는 대처, 곧 세상을 표상하기도 했으며, 때로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을 상징하기도 했다. ‘국보 1호’라는 무게와 시간이 우리 국민에게 이 같은 무의식을 심었다. 1998년 2월 숭례문 소실 당시 우리 모두가 느꼈던 깊은 좌절도 이런 무의식 때문일 것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등 시민단체들이 국보 1호를 숭례문에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으로 바꾸자며 13일 문화재청에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들 단체가 주장하듯, 숭례문의 1호 분류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당시 신문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총독부의 한낱 종교과(宗敎課)에서 분류 초안을 완료했다는 기사가 있다. 문화재 보존 명목으로 단순히 행정적 편의를 위해 일련번호를 매긴 것이 등급 서열처럼 됐고, 이것이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공포되면서 ‘문화재지정번호제도’로 그대로 이어져 정착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한양을 함락할 때 숭례문으로 입성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기념해 총독부가 1호로 정했다는 연구도 나왔다. 지난 화재로 숭례문의 9할이 재건축이나 다름없는 것도 가치를 훼손했다.

세월 속에 켜켜이 쌓여온 우리의 정서야 뭐라 할 건 없지만, ‘국보 1호’의 아우라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문화재에 서열 같은 일련번호를 매기는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문화재지정번호제도를 아예 없애는 게 상책인데, 그 경우 현재 노출된 표지판 등은 물론 교과서 등 인쇄매체까지 고치자면 최대 450억 원이 소요된다는 조사가 발목을 잡았다. 시민단체들은 그렇다면 숭례문을 국보 1호에서 해지하고 대신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정하자는 입장이다.

그래도 국보를 서열화하는 듯한 기형적 제도는 남는다. 표지판과 인쇄매체의 경우 한꺼번에 바꿀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교체시기에 바꾸면 애초 예상보다 훨씬 적은 예산으로 변경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결국 정책 당국의 의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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