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허기진 군상] (9) 깨진 공동체, 각자도생하는 사람들

구교형·김상범·배장현·김서영 기자 2015. 11. 8.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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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학교, 지역사회···. 2015년 한국인들은 모두 어딘가에 소속돼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 곳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 이들은 거의 없다. 전통적인 가족공동체는 해체돼 버린 지 오래고,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격언도 그 의미를 상실했다. 일상의 희노애락을 나눌 대상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겉도는’ 느낌을 받는다. 세대와 계층을 막론하고 우울함과 적적함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른다.

■ 대학 동아리·학회 실종 동아리나 학회 같은 대학공동체 문화가 퇴색하고 있다. 서울 4년제 대학 졸업반인 최모씨(27)는 단과대 사진 동아리 활동을 했다. 최씨는 동기들이 ‘동아리방 붙박이 책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열성적인 동아리 회원이었다. 공강시간에 동아리방에 가면 항상 사람들이 있었고 공부, 식사 등 모든 일상을 회원들과 함께했다. 1년에 두 번 열리는 정기 전시회를 위해 산과 바다, 도시 곳곳에 출사를 나갈 때면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즐거웠다. 동아리는 그의 대학생활 전부였다.

늦은 나이에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찾은 동아리방은 썰렁했다. 복학 후 처음 찾은 동아리 모임엔 신입생보다 최씨 같은 OB 학생들이 더 많았다. 그나마도 모임에 얼굴을 비추는 경우가 드물었고, 연 2회 하던 정기 전시회도 1회로 줄었다. 하루 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동아리방은 최씨 전용 공부방처럼 돼 버렸다. 과 후배는 최씨에게 “우리 과 취직 잘 안되는 거 알지 않느냐. 1학년 때부터 학점관리 잘해서 ‘탈○○(최씨의 학과명)’하는 게 중요한 애들한테 사진 동아리 같은 건 사치”라며 ‘요즘 애들’ 분위기를 전했다.

한모씨(53)는 지난 추석 지방에서 올라온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격세지감’을 느꼈다. 한씨 아들은 올해 지방의 한 사립대에 입학해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한다. 한씨가 ‘밥 먹으면서 하숙생들이랑 이야기는 나누느냐’고 묻자 아들은 “얘기는커녕 다들 스마트폰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 나도 이어폰을 끼고 밥을 먹는다”고 했다. 한씨는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하숙생들끼리는 일종의 서클이 결성돼 밤 늦게 막걸리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눴는데…. 옆방 사람 이름도 모른다는 얘길 듣고 시대가 변한 것을 느꼈다”고 했다.

■ ‘이웃사촌’은 옛말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은 옛말이 돼 버린 지 오래다. 박모씨(56)는 지난 4월 아파트 전세 만료 뒤 평수를 줄여 서울 서대문의 한 아파트를 매입했다. 외동딸을 시집보낸 터라 넓은 집은 필요가 없었다. 아내와 “떡이라도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지만 부부 모두 일을 나가던 터라 이내 흐지부지됐다. 한 층에 10여가구가 사는 복도식 아파트지만 박씨는 아직 이웃들과 안면을 트지 못했다. 옆집에 초등학생 남매를 둔 부부가 산다는 것은 알지만 인사를 나눈 적은 없다. 박씨는 “이 아파트가 거주민이 많이 들고 나는 아파트라 서로 이웃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며 “우리 부부가 은퇴하고 늙어서 집에만 있을 때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된다”고 말했다.

서울 양천구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민모씨(51·여)는 평소 물건을 살 때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를 이용한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꽉 막힌 아파트 생활이 답답하다 싶을 때는 전에 살던 강동구 재래시장에 가서 장을 봐온다. 손수 자동차를 몰고 40~50분 거리의 재래시장을 찾는 것은 사람 사는 맛을 느끼고 싶어서다. 민씨는 “고기든 야채든 시장이 더 비싸지만 안면이 있는 상인들과 ‘농담 따먹기’도 하고, 과일 하나라도 더 챙겨주는 등 에누리가 있다.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이곳을 찾게 된다”고 했다.

■ 고독한 노인들 장필수씨(가명·76)는 한때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국문학과를 졸업한 장씨는 한 주간지 교열부에서 견습생활을 시작했다. ‘교열 없으면 신문사가 안 돌아간다’고 하던 시절, 그는 20여년간 회사를 두 번 옮겼다. 다른 회사로 스카우트될 때마다 월급은 1.5배씩 뛰었다. 한 유력 일간지 교열부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한 이후엔 지인과 함께 충청북도 모처에 리조트를 짓는 사업을 벌였다. 부동산 시장이 호황이던 시절이었다. 사업은 생각보다 잘 풀렸고,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운전기사가 모는 외제차를 타고 다녔다.

그러나 2년이 채 안돼 사업은 부도가 났고 장씨는 쏟아부은 전 재산을 잃었다. 지역신문 몇 군데를 전전한 뒤 은퇴했다. 이후 조씨의 삶은 단조로웠다. 조씨는 “젊을 때 잘나가던 시절 집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오던 사람들의 연락이 일거에 끊겼다”고 했다. 혼자 집에 있으면 적적하지만 아내 말고는 대화 상대가 없다. 부동산 콜센터에서 전화영업을 하는 아내의 출근시간에 맞춰 아침을 먹인 뒤 배웅하고, 저녁에 아내가 퇴근하면 밀린 얘기를 나눈다. 출가한 딸 셋은 가끔 전화를 할 뿐 찾아오는 일은 드물다. 한 달에 한 번, 퇴직자 모임을 가는 날을 빼면 조씨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거의 없다. 친구들은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세상을 떠났다. 젊을 때 매주 토요일 직장 동료들과 함께 찾던 산도 10년이 넘도록 혼자 다닌다. 조씨는 “혼자 햄버거집에서 끼니를 때우는 또래들을 보면 나도 언제 저렇게 될지 걱정된다”며 “아내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지난 3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4년 노인 실태조사’를 보면, 조사대상 중 10.9%의 노인이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외로움’(13.3%), ‘가족·친구와의 갈등 및 단절’(11.5%), ‘배우자 사망’(5.4%)이 주된 이유로 꼽혔다.

출산·육아 과정에서 사회 단절로 인한 고독을 호소하는 여성들도 많다. 20대 초반에 친정어머니를 여읜 신모씨(36·여)는 작년 11월 딸을 출산한 이후 줄곧 우울증에 시달린다. 신씨는 결혼 5년차로 적지 않은 나이에 출산에 성공해 육아휴직 중이다. 문제는 이따금 딸을 맡기고 여유를 가질 만한 시간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지방에 있는 시댁에선 조력을 받기 어렵고, 친정 식구들은 모두들 제 아이를 키우느라 바쁘다. 신씨는 육아 스트레스가 임계점에 이를 때마다 공원에 나가 산책을 한다. 그곳에서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또래 엄마들에게 다가가 무작정 말을 거는 게 유일한 낙이다. 신씨는 “남편은 매일 야근이나 술자리가 있어 늦게 들어온다. 세상에 나 홀로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고 말했다.

<구교형·김상범·배장현·김서영 기자 wassup0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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