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뉴스]'노벨상 수상자 저작 왜곡' 현진권 자유경제원장 "현행 역사교과서 왜곡 심각"

정대연 기자 2015. 10. 2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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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교학사 역사 교과서 채택 방해 사태는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강력한 카르텔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자신들과 다른 사관을 받아들일 수 없고, 자기들식 역사 해석만 학생들에게 주입하겠다는 공동 목적을 가진 출판사, 교과서 집필진, 역사학계, 전교조를 위시한 일선 교사, 좌파 시민 단체가 담합했다. 이들은 (중략) 내용에 대해 거짓 소문을 퍼뜨렸고 채택한 학교에는 위력을 행사해 선정을 취소토록 했다. 그 결과 교학사 교과서는 단 한 학교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중략) 현행 역사 교과서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패배감에 사로잡히고 사회 탓, 국가 탓 하는 시민으로 자라게 되어 있다.”

지난 10월 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현진권 자유경제원장(사진) 칼럼(▶'공급자 입맛대로' 좌편향 역사 교과서) 내용 일부입니다. 현진권 원장은 이 글에서 “명백히 시장 실패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이런 논리(정부 개입)가 작동하지 않는 분야”가 “역사 교과서 시장”이라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정당화합니다. 그는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출판사별로 일관되게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반(反)대한민국 사관(史觀)을 갖고 있다”면서 “대한민국을 부정하다 보니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왜곡도 심각하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가장 많이 채택하고 있는 한 출판사의 역사 교과서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에게 분단 책임을 돌리고 그를 독재자로 묘사한다”고도 했습니다.

|자유경제원 홈페이지 갈무리

현진권 원장은 지난 19일 현행 검정 역사교과서가 높은 청년층 자살률의 원인인양 주장해 비판을 받은 ‘좋은 교과서, 정직한 교과서, 올바른 교과서를 지지하는 지식인 500인 선언’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선언문에는 “기존 국사교과서들은 아이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이 수치스런 과거를 가진 부패한 사회라는 어두운 착각을 가지는 한편, 하루하루 땀 흘리며 살아가는 부모가 이 불의한 체제에 빌붙어 기생하는 존재라는 끔찍한 오해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같은 착각과 오해는 삶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만듦으로써 청년층 자살 및 정신질환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역사교과서가 청년 자살 원인”이라던 ‘지식인 500명’, 알고보니···)

자유경제원과 현진권 원장은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행정예고한 올해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19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기금을 받아 출범한 자유경제원은 홈페이지에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오해, 불신, 미신과 맞서는 기관’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교과서 문제에서만은 자유주의·시장경제와 정반대되는 국정화 추진에 앞장섭니다. 올해 초 열린 경제교과서 분석 토론회를 필두로, 지난달 말부터는 현행 교과서 편향성 토론회를, 지난 12일부터는 7차례의 ‘국사교과서 실패 연속 세미나’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토론회 사회는 주로 현진권 원장이 맡습니다.

이 단체의 전희경 사무총장(사진)은 새누리당 역사교과서개선특위 위원입니다. 그는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자유경제원에서 열린 ‘국사교과서 실패 연속세미나 - 학자들이 뽑은 최악의 역사왜곡 사례’에서 “콕 집어 밑줄을 긋지는 못하지만 다 읽었을 때 ‘대한민국은 자랑스럽구나’하는 긍정의 사관이 자리잡을 수 없게 하는 맥락의 문제는 더 크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22일 청와대 ‘5인 회동’ 때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가 “어떤 부분이 ‘부끄러운 역사’로 가르치고 있는가”라고 따지자 박근혜 대통령이 “전체 책을 다 보시면 그런 느낌이 온다”라고 답한 것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입니다.

자유경제원 전희경 사무총장이 28일 오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새누리포럼 ‘역사 바로세우기, 올바른 역사교과서 왜 필요한가’ 토론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희경 사무총장은 28일 새누리당 중앙위원회 ‘역사 바로세우기’ 포럼 강연에서 “(역사교과서뿐 아니라) 경제·문학·윤리·사회 교과서들 역시 대한민국 일으켜 세운 기적의 힘에 대한 내용은 없고, 학생들에게 불평과 남 탓, 패배감을 심고 있다”면서 “그 결과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을 헬조선, 희망이 없는 나라, 특권층만 잘사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국민의 이름으로 요구한다. 전 사무총장은 밤잠 자지말고 전국을 다니면서 오늘 발표 내용을 국민들 앞에서 강연하라. 전 사무총장은 영웅”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현진권 원장은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대 교수의 저서 <위대한 탈출> 한국어판 왜곡 번역 문제의 중심이 서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출판한 측에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노벨상 수상자의 연구결과마저 입맛대로 짜깁기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원서와 달리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위대한 탈출’은 어쩌다 한국에서 ‘위대한 왜곡’이 되었나)

미국 프린스턴대 출판부는 지난 22일 이 책을 번역· 출판한 한국경제신문 출판사(한경BP)에 한국어판 판매를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프린스턴대 출판부는 “최근 디턴 교수의 책 <위대한 탈출>의 한국어판이 원문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이 번역본에서는 영문 텍스트가 변형되거나 누락됐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이 책의 불평등에 대한 논의가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의 저서 <21세기 자본>과 완전히 대립되는 것처럼 묘사한 현진권 원장의 한국어판 서문에 대해 “이 책을 <21세기 자본>과 대립관계로 설정한 한국인 경제학자의 서문을 포함시켰다”며 “이런 변형과 누락, 새로 들어간 서문은 저자나 프린스턴대 출판부가 검토하거나 승인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현진권 원장은 이 책 서문 ‘피케티 vs. 디턴. 불평등을 논하다’에서 “불평등은 성장을 촉진하는 유인책”이라며 ‘피케티 대 디턴’ 구도를 설정했습니다. 보수 학계와 언론사는 이 책을 피케티 교수의 <21세기 자본>의 대척점으로 내세우면서 분배보다는 성장을 주장하는 논거로 썼습니다. 디턴 교수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뒤에는 노벨위원회도 불평등보다 성장에 손을 들어줬다는 식으로 여론을 몰고 갔고,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은 “디턴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저작물 왜곡, 지식 날조가 담론장을 훼손시키면서 선동 도구로까지 활용된 셈입니다.

출판사는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하고 싶었던 편집상의 문제였을 뿐 왜곡의 의도나 시도는 없었다”며 “디턴 교수와 독자들에게 사과드린다”고 일부 잘못을 시인했지만, 현진권 원장이 이에 대해 사과했다는 소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출판사, 집필진, 역사학계, 교사, 좌파 시민단체가 교학사 역사교과서 “내용에 대해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고 비난하기 이전에, 자신이 노벨상 수상자의 저작 “내용에 대해 거짓 소문을 퍼뜨”린 잘못부터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해 보입니다.

<정대연 기자 ho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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