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뉴스][헬조선외전②]노력은 왜 불가능한가?

박은하 기자 2015. 9. 1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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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력’은 ‘한국에 사는 젊은이로서 더 이상의 노력은 불가능하다’는 비아냥을 담은 표현입니다. 노력은 왜 불가능한지, 경향신문 2015년 9월5일자 커버스토리 ‘헬조선에 태어나 노오력이 필요해’ 기사에 수록한 관련 내용 및 기사에 담지 못한 인터뷰, 통계자료, 청년 취업문제를 다룬 주간경향의 기사를 토대로 구성했습니다. 취재과정에서 느낀 감상과 후일담도 ▶표시 뒤에 적었습니다.

서울 대치동 어린이들이 학원을 마친뒤 버스에 오르고 있다. /김기남 기자
1. 노력에도 유리한 사람들이 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양기혁씨(29·가명)는 대학 졸업 후 아버지 친구로부터 “어렵게 취업 준비하지 말고 아무 교육대학원에나 진학해서 학위만 따오면 ‘우리 학교’에 꽂아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 친구는 경북 지역 사립학교 이사장이며 그의 자녀들은 모두 해당 학교에서 근무한다. 양씨의 조부·외조부는 모두 은행장 출신이고, 아버지 친구와 친·인척 중에는 정·관계 요직에 있는 사람이 즐비하다. 양씨는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에 흥미를 잃었지만 중학교 때까지 사교육으로 선행학습한 내용으로 버티며 수도권의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어느 학교에 진학하든 앞으로는 중국이 뜨니까 중국 관련학과에 진학하면 취업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양씨는 대기업 해외 주재원으로 근무한 아버지 덕에 해외경험도 풍부하게 할 수 있었다.
서울 대치동의 한 어학원에 내걸린 여름방학 특강 안내 /김기남 기자

한국개발연구원(KDI) 김영철 연구위원이 2007년 신규취업자 6753명을 대상으로 한 분석을 보면 한국에서 인맥에 의한 채용빈도는 60%에 달한다. 생애 첫 취업자는 39.9%, 경력직은 60.1%, 전체 56.40%로 집계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비교를 보면 “믿을 만한 친척이나 지인이 있다”는 응답 비율은 고졸(41.6%)이 대졸(81.8%)의 절반 수준이다. OECD 국가 중 가장 격차가 크다. 김희삼 KDI 연구위원은 이 국제비교 자료에 대해 “인맥에 의한 구직비율은 미국에서도 50%에 달하지만, 학력에 따라 사회적 네트워크 격차가 크게 나타나는 것은 한국에서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출처:김희삼 KDI 연구위원, <사회이동성 복원을 위한 교육정책의 방향> . 왼쪽은 한국의 40~60대 남성을 중심으로 부자 간 교육·소득의 대물림 정도를 아버지 세대와 본인 세대, 본인의 자녀 세대 간 비교했다. 부자 간 교육·소득 대물림 정도가 다시 이전 세대만큼 심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오른쪽은 “믿을 만한 친척이나 지인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의 OECD 국가 간 비교

▶양기혁씨는 아버지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고 중국어 실력 등을 살려 다른 곳에 취직해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사범대에서 4년 동안 성실하게 공부한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정규직 교사를 뽑지 않아 기간제 교사 자리도 어렵게 구하는데 ‘학위만 따오면’ 교직을 줄 수 있다는 사학재단 이사장이 존재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서양에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는 표현이 있습니다. 부모 덕을 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한국 청년층 사이에 ‘은수저’도 모자라 ‘금수저’란 표현이 등장한 것은 이러한 현실과 무관치 않습니다.

2. 정상적인 노력을 요구하는가?
2014년 11월 청년유니온 조합원들의 블랙기업 선포식 /김정근기자

전직 피트니스 클럽 트레이너(운동강사) 윤소림씨(28)는 서울 강남구의 대형 피트니스 클럽에서 6개월간 일했다. 오전 6시에 출근하면 오후 3시에 퇴근해야 하는데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P.T(개인운동교습)계약 실적을 채우지 못해서였다. “3개월에 9만9000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회원을 받아놓고, 트레이너에게 회원을 상대로 수십만~수백만원짜리 개인운동 교습권을 강매하게 해요. 제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팀 전체를 괴롭혀서 그만뒀어요. 무조건 비싼 코스의 P.T부터 권하게 되서 손님들에게도 미안했고요. 여자 트레이너 중에는 실적을 채우려고 무리하다가 무릎이 나가는 경우도 많았어요. 다른 사람의 건강을 챙겨주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 건강은 망치는 경우가 많아요.”

소규모 사무실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강수정씨(26)는 휴일에도 사장이 부르면 달려 나갔다. “여기서 열심히 하면 키워주겠다”는 말 때문이었다. 강씨는 “속았다. 1년만 채우고 주 5일 하는 업체로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실업급여도 못 받고, ‘한 직장에 오래 버티지 못하는 근성 없는 젊은이’로 낙인찍히기 때문에 당장 그만둘 순 없다.

▶임대료만 수백만원대인 서울 강남에서 회원 1명당 한 달에 3만3000원의 회비를 받아서는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고객을 모집하기 위해 이용료는 비정상적으로 책정해놓고 손실을 메우는 일은 ‘트레이너’들에게 떠넘겨지고 있습니다. ‘주5일제’와 같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부당함을 버티는 노력을 하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이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일까요, 노동부의 엄격한 근로감독과 실업급여 수급조건 완화일까요. 강씨를 위해 지역 혹은 중앙정부는 어떤 노력을 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2013년 OECD 연평균 근로시간 비교. 한국은 전체 대상국 중 2위를 차지했다./경향신문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 도저히 가족과 지낼 시간이 없어요. 비유하자면 삼성은 10명 일할 상황에 12명을 뽑아서 사람을 죽도록 괴롭힌 뒤 2명을 자르는 시스템이고, 현대는 10명 일할 상황에 8명을 뽑아서 죽도록 일하는 시스템이에요. 이게 한국에서 제일 좋은 직장이라죠.” (토목업계 종사자 정00)

▶‘노력’ 강요에 대기업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죽도록 노력해서 소위 ’좋은 직장’에 취직했는데도 ‘비정상적’ 상황을 맞닥뜨린 청년들의 ‘허탈감’과 ‘분노’도 강렬했습니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면 소위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합니다. ‘좋은 대학’을 가기까지 필요한 노력의 이야기도 들어보았습니다.

2015년 8월 자기소개서 설명회에 참석한 고등학생들/정지윤기자

대학생 황성만씨(22)는 고교시절 대학 수시전형 응시를 앞두고 이범 당시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에게 서면 인터뷰 메일을 보낸 적 있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한겨레 교육담당 기자, KDI 연구원에게도 메일을 보낸 적 있다고 했다. 황씨는 “교육에 관심이 있고 사범대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생기면 ‘해당 분야의 일면식도 없는 전문가를 찾아가 매달릴 정도의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호기심 많고 창의적이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인재가 돼야 한다’는 가치관을 내면화해 스스로의 열정을 키우고 입증하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유명인에게 메일을 보내는 것은 경기 안산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그가 자신의 열정을 확인하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는 서울대 수시모집에 낙방했지만 원래 가려던 학과에 정시모집으로 합격했다. 황씨는 “성과세대라고 해야 할까, 어릴 때부터 자기소개서 엄청 써 봤다. 매사의 열정이나 감정, 호기심 꼭 성과로 연결지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포장하고 홍보하는데 익숙한 사람이 되고 만다”며 “대학에 와서 동아리 회장을 맡으니 모르는 고교생에게 메일이 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진취성을 입증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황씨는 고교 3년 동안 내신 관리·자기소개서·수능·구술면접 준비 및 입시동향 분석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성과정신(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정신)을 충실히 내면화하고 있는 거 같다”고 합니다. ‘수시’와 ‘정시’ 중 어느 전형이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각 전형의 존재 이유와 장점이 있습니다. ‘3당4락’이란 말에서 보이듯, 학력고사로 줄 세우는 방식의 입시제도에서도 수험생들은 비정상적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대학 진학제도 역시 고교생이 감당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비정상적 노력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출처:김희삼 KDI 연구위원, <사회이동성 복원을 위한 교육정책의 방향>
3. 노력을 안 해서 문제인가?
서울시내 한 편의점에서 일 하는 청년/강윤중기자
대학생 김현곤씨(19)는 1996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다. 김씨의 아버지는 일본까지 가서 신농법을 배워올 정도로 의욕 넘치는 영농인이었다. 지금도 새벽 3시면 일어나 밤 11시에 일터에서 돌아온다. 하지만 여느 농촌처럼 김씨의 고향마을도 점점 더 가난해졌다. 황폐한 마을주민들의 심리를 악용한 대출사기, 도박, 다단계 열풍이 차례로 지나가면서 가정이 깨지고 가족들은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교육열’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김씨도 중학생 때부터 방학이면 인근 공장에서 시급 2500원을 받고 조립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교 동급생 13명 중 4명만 4년제 대학에 갔다. 간신히 대학에는 갔지만 홀로 벌어 객지 생활하는 김씨는 문화생활은 꿈도 못 꾼다. 김씨는 “나나 아버지나 친구들이나 대부분 너무 노력하고 있다. ‘1시간 덜 자고 노력하라’고 하는데, 여기서 1시간 덜 자면 죽는다”고 말했다.
▶김현곤씨의 아버지는 약 1만8000㎡(6000평)의 땅을 빌려 사과와 브로콜리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농업으로 벌어들인 대부분 소득은 빚 갚는데 나가고 기초생활수급지원을 받으며 94세 노모를 봉양하고 있습니다. 늘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며 묵묵하게 일만 하던 아버지는 몇주 전 공황장애가 와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김씨도 몸이 아파 최근 병원에서 링거주사를 맞았습니다.
방학 증 학교 도서관에서 인터넷 강의를 듣는 대학생들/김기남기자

한국 청년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과 경력을 겸비한 우수한 인력이다. 자화자찬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고서에 따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및 직업교육을 이수한 25∼34세 청년 비율은 한국이 67.1%로 조사 대상국 가운데 1위였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도 한국 학생은 수리능력 1위, 읽기 등 문장 이해능력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15세에서 29세까지 청년층 중 ‘직업이 있는 집단’과 ‘구직·직업훈련·교육에 참여하지 않는 집단(NEET·니트)’ 간 능력치의 차이는 1% 이하로 가장 낮았다. OECD 평균은 6%대로 직업이 있는 집단의 능력이 니트 집단에 비해 높았다. 바꿔 말하면 한국 청년은 일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건 실패했건 능력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말이 된다.(▶[주간경향] 당신이 못나서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청년니트와 구직자들의 능력치가 1%밖에 차이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유능한 청년들이 취업시장에서 두텁게 대기하고 있으니, 일자리를 못 구한 청년들에게는 ”좀 더 노력하라”고 말하면서 일자리가 있는 청년들에게는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다. 싫으면 나가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4. 노력하면 들어주는가?
김현곤씨는 대학에 입학한 뒤 학내신문사에 들어갔다.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지만, 학내신문 기자가 된 이상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불평만 할 뿐 저항하지 않는 청년’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학내언론 생활은 쉽지 않았다. 의외의 난관에 부딛쳤다. 한 과에서 관행적으로 대물림되던 선배들의 폭력을 후배들이 고발해 이를 대서특필하자 학교 측과 마찰을 빚었다. 보도가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학교 측은 신문 발행에 필요한 예산을 줄이고 행정절차를 차일피일 미루며 압박했다. 기자들이 떠나고 1학년인 김씨 혼자서 신문사를 떠맡는 사태까지 내몰렸다. 김씨는 ‘헬조선’의 의미에 대해 “왕조 같은 권위를 지닌 자가 군림하고, 개인은 노예로 사는 삶을 택하는 ‘시대정신’을 표현한 말”이라고 해석했다.
서울여대 학보사 기자들이 졸업생들의 청소노동자 파업지지 성명을 1면에 실으려 했으나 주간교수가 반대해, 항의표시로 1면을 백지로 발행했다. 2015.5.27 /김정근 기자

대학생 이태경씨(22·가명)는 고교 시절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지면 매를 맞았다. “나도 삽으로 300대씩 맞고 사람 됐다”는 동문 출신의 기숙사 사감 말에 질겁했다. 학교를 옮겼다. 새 학교엔 ‘연애금지’, ‘강제 0교시’ 등의 교칙이 있었다. 공부를 잘하면 교칙을 어겨도 처벌받지 않았다. 교칙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이씨는 김상곤 경기 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를 발표하자 학내에 이를 적용해보려 애썼다. “말이 안 통해요. 학생·교사·학부모로 구성된 자리에서 ‘두발제한 규정을 풀어줬으면 좋겠습니다’, ‘교복도 없애지 그래?’ ‘무작정 교칙을 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옷값 부담을 덜고 학생 간 위화감을 없애준다는 점에서 교복에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두발제한은 자유를 지나치게 막는 것에 비해 장점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참 이기적이구나’, ‘두발제한 완화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 왜 이기적이라는 건가요?’, ‘됐어. 교복도 없애지 그래’ 이런 대화의 무한반복이었습니다. 기독교계 학교라 예배시간이 있었는데 목사가 ‘사탄 김상곤’이란 말을 공공연히 했습니다. 비인권적인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냥 개인이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돼 탈출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청년들이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서 뿐 아니라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나아지게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학내언론, 학생회, 학생인권조례 등 주어진 제도를 활용해 저항을 시도했지만 가로막혔습니다. 사립학교법이 재개정을 거쳐 통과된 이후의 일입니다.

5. 노오오오오오오력하라는 사회, 그 결과는?
‘노력강요’에 지친 청년들의 반응은 대체로 다음 세 갈래로 나타났습니다. 각각에 해당하더라도 ‘한국사회가 좋아졌으면 좋겠고 나도 역할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는 “막막하다”, “안 될 거 같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2015년 3월 코엑스 이민 및 해외유학 박람회 /김기남 기자

① 탈출

연세대에서 석사과정까지 공부한 차은경씨(가명)는 방송통신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며 캐나다 이민을 알아보고 있다. 유치원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캐나다에 ‘취업이민’을 지원할 수 있다. 차씨는 “남편이 제 명에 못 살 거 같아 이민을 생각해봤다”고 말했다. 차씨 남편은 명문대를 졸업한 대기업 직원이다. 일주일에 적어도 4일은 오전 6시에 출근해 밤 12시에 돌아온다. 토요일에도 출근한다. 2012년 업계 전체의 실적이 나빠진 뒤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위에다 보여주기 위한 면피성 근무다. “대기업은 그래도 주말근무·야근 수당이라도 받지 않느냐”며 부러워하는 친구들에게 고민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차씨의 집 근처 유치원 정문엔 ‘○○○어린이 한자급수 합격’이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다. 동네에서 가외 학습을 가장 덜 시키는 유치원이 이 정도다. 아들 대에서 반복될 교육경쟁 역시 그가 보기엔 ‘지옥’이다. 차씨는 “어릴 적에는 ‘공부하라’는 말만 믿었는데, 그 결과가 죽어라 일하기만 하는 삶이라면, 나는 내 아들에게 뭐라고 교육시켜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한국에서 ‘공부하지 말고 하고 싶은대로 살아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이민을 시도할 수 있는 사람은 명문대에서 주로 공학 계열을 전공하고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차씨 부부도 실제로 이민을 갈 수 있을지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이민 ‘스터디’까지 가 봤지만 뾰족한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어느 취재원은 “그저 어느 곳에서든 비참하다면 사람들이 날 모르는 곳에서 비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차씨는 떠나지 못한다면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내 자식 뿐 아니라 남의 자식의 교육에도 힘써서 그나마 이 사회가 나아지는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지만 “아들이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한숨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죽창으로 서로 찌르는 상상을 구호화한 온라인 현수막/헬조선닷컴

② 상호증오

이태경씨(가명)는 “이십년 남짓 살면서 한국사회가 함께 사는 공동체란 걸 경험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엔 ‘미개한 국민성’과 ‘후진 시스템’ 때문이다. 이씨는 수도권의 한 공업도시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 공부에 두각을 보이자 비슷한 형편의 이웃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울 대치동까지 2시간 넘게 걸려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자 “실력도 없는데 과학고 준비한다”란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과학고에 낙방하자 “고소하다”는 듯한 시선이 날아왔다. 또래가 아니라 어른들이 그랬다. 서울대에 합격하자 확인전화가 오더니 몇몇 이웃들은 연락이 두절됐다. 이씨는 “사람들이 미개한 건 맞는데, 그들의 미개함 역시 구조의 탓 아니겠느냐. 그런데 도무지 개선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수십년간 그런 상태로 살았을 텐데”라고 한숨을 쉬었다.

▶이웃 주민들은 왜 그랬을까요? 예전 농촌에서 누군가 명문대 진학하거나 고등고시에 합격했다면 현수막이 붙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씨가 무엇이 되든 격차만 벌어질 뿐 이씨가 살던 동네가 달라지진 않을 것입니다. 이웃 간의 정을 운운하기에는 각자가 살기 너무 팍팍한 걸까요. 주민들의 질시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더라도 용 혼자 개천을 탈출해버릴 뿐 개천은 낙후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죽창’이란 말은 스누라이프(서울대 학내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봤어요. ‘금수저’들이 연애 자랑, 여행 자랑, 자기 뭐 먹은 거, 자동차 산 거 자랑하면 ‘그래 봤자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죽창 앞에서는 다 평등하다’고 댓글 달아요. ‘네까짓 게 금수저라고 아무리 잘난 척해도 죽창 앞에서는 너나 나나 한방에 나가 죽는 똑같은 존재’라고 말해주는 것인데 속이 시원해지죠.”

▶대학에 간 이씨는 ‘금수저’들에게 박탈감을 느끼며 또 다시 좌절을 맛봤습니다. 학내게시판의 댓글을 보며 ‘죽창으로 찌르는 상상’만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알고 보면 다들 똑같은 사람인데’란 사실을 새삼 깨달을 뿐이라 합니다.

③ 짓눌린 개인

일러스트/경향신문
박모씨(31)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자원입대했다. 박씨의 아버지는 건설회사를 다녔지만 2000년 전후로 회사가 부도가 나 막노동 일을 해 왔다. 어머니는 가게를 하다 최근 폐업했다.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주는 조직 중에서 지방대 출신인 그를 받아주는 곳은 군뿐이었다. 군에서도 학사장교는 서울 4년제 대졸자들의 몫이었다. 그는 부사관으로 4년간 복무하며 돈을 모아 제대했다. 등록금 빚을 갚고, 부모님이 사는 집 전세금 인상분을 대고 나니 남는 것이 없었다. 박씨는 “등록금 융자 갚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나도 영어 잘 했으면 다른 직업을 알아보거나 해외라도 갈 수 있었을 텐데. 이게 다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한 탓이다. 이제 와서 공부 할 수도 없다. 부모님은 누가 모시나. 결국 내가 어떻게든 노력해야지”라고 말했다. 그는 택배일을 하면서 기능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직종에 따라 영어시험은 안 보는 곳도 있더라”고 말했다.

▶4년 동안 군에서 부사관 역할을 해 내며 등록금 빚을 갚고 집 전세금을 댈 만큼 돈을 모아 제대할 정도로 성실한 사람에게 “노력하지 않아서 힘들게 산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요. 택배일을 하면서 겸사겸사 공부하는 박씨는 ‘노력하지 않은 사람’일까요. 택배일로 충분히 대우받으며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라면 박씨가 “노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하면서 이직준비를 했을까요.

▶직접 들은 말이 아니라 전해 들은 말이라 기사에 수록하지 못한 내용도 있습니다. 기사체로 옮깁니다.

강원 춘천에 있는 어느 대학 교수가 말했다. “우리학교 학생들이 입학할 때부터 ‘지잡대(지방대학을 비하하는 말)’라며 기죽어 있어서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인가 입학생들의 수능점수를 확인해봤다. 전체 수험생 중 상위 20%이더라. ‘우리나라는 망했구나’라고 생각했다. 상위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조차 없고, 이들마저도 스스로 패배자라고 여기며 짓눌려 살아야 하는 나라라면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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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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