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5년전 경고했건만.. 무용지물 된 '신종플루 백서'

조병욱 2015. 6. 29. 06: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방역망 다시 짜자] 과거 재난 교훈 눈감은 정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첫 환자가 발생한 지 28일로 40일째가 됐다. 메르스 확진 환자는 182명으로 늘었고 그중 32명이 숨졌다. 메르스 사태가 이제 고비를 넘겼다는 분석이 나오지만 우리 방역망의 구멍이 여실히 드러났다. 정부의 시행착오로 인한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았다. 다섯 차례에 걸쳐 방역 선진국의 길을 모색해본다.

무용지물된 신종플루 대응백서 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② 교육부 ③ 대한의사협회

◆신종플루 백서 3권 '무용지물'

우리나라에서 감염병이 발발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9년 신종플루 이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대한의사협회, 교육부 등이 신종플루 대응 기록을 '백서'로 남겼다. 당시 정부가 운영했던 신종플루 대책본부도 그해 12월 활동을 종료한 뒤 '신종인플루엔자A(H1N1) 발생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운영 백서'를 발간했다. 725쪽에 달하는 이 백서는 신종플루 확산 상황, 각 부처별 정부의 대응, 지방자치단체 대응, 업무분장, 보도자료와 언론보도 등을 자세히 담았다.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발견된 문제들은 모두 이들 백서에서 경고한 것들이었다. 백서들은 정부가 질병 발생상황과 대책, 대응지침 등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시스템을 갖추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특히 감염병 발생 초기에 전파 상황과 발병 환자 정보를 의료기관과 국민에게 제공하라는 지침도 있었다. 총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세 권의 백서는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역학조사관 부족 문제도 예견됐다. 정부가 만든 백서는 시도별로 1∼2명에 불과한 역학조사관을 보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신종플루가 잠잠해지자 이 문제는 잊혀졌고, 결국 이번 사태에서 초기 역학조사 결과가 늦어지면서 격리대상자 선정이나 범위 결정에 큰 혼선이 생겼다.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메르스 환자들은 우수수 방역망을 빠져나갔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7일 오후 세종청사에 있는 보건복지부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를 방문, 현황 보고를 듣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지방자치단체와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점도 이미 지적을 받았던 문제다. "지방자치단체장을 중심으로 지역 내 기관과 연계·협조하고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쓰여졌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서는 인천시나 강원도, 충주시 등이 격리시설 지정 및 확진환자 이송 문제를 두고 중앙정부에 반발했다. 자신들의 지역은 '메르스 청정 구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음압병상 부족 문제도 개선해야 할 점으로 지적됐지만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삼성서울병원은 메르스 환자가 급증하자 부랴부랴 국립중앙의료원 등에서 음압장비 25개를 빌려와야 했다.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 여러 명이 숨진 뒤였다.

의협이 만든 백서도 중요한 지적을 담았다. "신종플루에 대한 보건당국의 안이한 대처와 초기대응, 잦은 진료지침의 변경으로 일선 의료기관에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초반에 감염병 확산 여부나 위험도를 평가하는 일을 강조했지만 이번 메르스 사태 때는 정부가 이를 너무 과신했다가 결국 사태를 키웠다. 또 "N95 마스크, 고글, 장갑 등 의료진의 개인보호장비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급해야 한다"고 의협은 당부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 같은 조치는 늦었고 결국 메르스 확진 환자를 치료하던 의료진이 감염되는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그나마 교육부는 백서에서 지적한 위기인식을 반영한 탓인지 초기부터 강력한 휴업결정 등으로 학교 내 감염 확산을 막았다는 평가다. 정부가 5년 전 스스로 만든 충고에 조금만 귀를 기울였더라면 수십명이 숨지고 국가적 경제위기까지 초래하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역대 정부는 국가적 재난이 있을 때마다 백서를 발간했지만 대부분 도서관에 잠들어 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만들어진 재난 안전관리기본법에 따르면 각 기관의 장은 재난 발생 시 상황을 기록하고, 이를 보관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매년 소방방재청이 발간하는 재해연보와 재난연감 외에 대형 재난에 대해서는 백서 제작이 의무화돼 있지 않다.

백서 제작 기준과 발간 주체도 제각각이어서 또 다른 감염병이 유행했을 때 참고할 만한 '참고서'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백서에는 재난 발생 시 각 부처의 행동지침 등이 담겨 있어야 한다. 한 지역 보건소 담당자는 "메르스 관련 지침은 상부에서 내려왔지만 과거 백서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며 "앞으로 메르스 백서를 만든다면 보건소 같은 현장의 목소리까지 잘 반영해 실제 활용가능한 백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학생 올림픽'으로 불리는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개막을 닷새 앞둔 28일 KTX를 이용해 광주 송정역에 도착한 말레이시아 선수단이 역사 내에 설치된 발열검사대를 통과하고 있다.

독일은 1998년 101명이 사망한 에쉐데(Eshede) 열차 사고 이후 전문가 분석 및 재발 방지 대책 등을 철저히 세운 덕분에 10년 후인 2008년 발생한 또 다른 열차 사고에서 총 135명의 탑승객을 안전하게 구조하기도 했다.

28일 김익환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백서는 내용의 충실성과 국민에게 알리는 전달체계 등 2가지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며 "정부의 홍보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외부 감시자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병욱·김민순·이재호 기자 brightw@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