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자가 유학 가야 해?

박태근 2015. 6. 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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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다. 요즘 같으면 말이든 사람이든 미국으로 가는 게 맞겠다. 특히 지식인, 학자라면 '언어 권력' 영어와 '지식 권력' 미국을 벗어나기 어렵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문학, 한국사 연구자도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게 낫다는 말이 농담처럼 떠돌기도 한다. 실제 수치도 그렇다. 국가별 미국 유학생 수에서 한국은 중국과 인도에 이어 3위를 차지한다. 인구에 비례하면 엄청난 숫자다. 대학 교원의 박사학위 비율도 마찬가지다. 국외 박사학위 비율은 꾸준히 상승해 40%에 이르렀고, 이 가운데 3분의 2가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김종영 교수는 이렇듯 미국 유학 후 한국에서 엘리트로 자리 잡은 이들을 <지배받는 지배자>(돌베개 펴냄)라 명명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문화 헤게모니를 가지지만, 여전히 글로벌 헤게모니의 지배를 받는 이중적 지위를 뜻하는 말이다. 이들은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에 종속되는 덕분에 한국에서 권력을 누릴 수 있다. 자연스레 현재의 권력 구도를 깨기보다는 이 격차를 활용해 좀 더 나은 자리를 얻는 데 힘을 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 유학파 지식인의 헤게모니는 점차 강해지고 이에 도전하려는 약자의 지식 권력은 보잘것없는 게 되고 만다. 게다가 미국 대학과 비교되는 한국 대학과 학계의 천민성은 미국 대학이 한국 대학 변혁의 전범처럼 느껴지게 해, 지배받는 지배자들이 지배의 이유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면서 아메리칸 드림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 온전한 지식의 장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그게 어렵다면 나 하나라도 지배받는 지배자의 그늘에서, 그들과 경쟁하는 답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 지식인으로 바로 설 수 있을까. 김경만 교수는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문학동네 펴냄)에서, 상징 자본을 보장하는 외국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온 이들이 오히려 '한국적인 무엇을 찾아야만 서구 이론을 극복할 수 있다'면서 자신의 상징 자본을 부정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그간 한국적인 무엇을 찾으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설사 찾는다 해도 지식장의 지배자들이 관심을 가질 가능성은 적다. 방법은 하나다. 글로벌 지식장에 본격적으로 들어가 장을 지배하는 이들의 이론을 비판하며 글로벌 헤게모니 속에서 자리를 확보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식장의 구조가 바뀌지 않을 테고, 더 많은 예비 지식인이 유학을 떠날 테고, 그들이 돌아오면 종속성이 더욱 강해질 게 분명하다. 유학을 가서 서구의 학문을 배울 이유는 충분하다. 다만 왜 그것을 배우며,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는 물음이 부족할 뿐이다. 떠나기 전에 꼭 답해야 할 질문이다.

박태근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 연구원)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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