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석 부장 판사의 세상일기(26)] 상류층 부모가 두려워하는 입시제도는

문유석 인천지방법원 판사 2015. 4. 1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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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국사와 중국 역사를 공부할 때 참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다. 왕조가 건설돼 발전하는 시기와 쇠락해 망해가는 시기의 특징이 몇 천년에 걸쳐 놀라울 만큼 비슷하게 반복된다는 점이다.

발전기의 특징은 상대적으로 균등 분배를 지향하는 토지개혁, 귀족의 세율은 증가, 국가 직영 최고교육기관(國學) 확대와 공정한 과거제도로 신진엘리트의 등용. 패망기의 특징은 소수 대귀족의 사유토지 증가로 대농장화, 백성에게 가혹한 각종 세부담 증가, 귀족 자제 중심의 사학(私學) 증가와 고위 관리 자제를 특채하는 문음(門蔭), 음서(蔭敍) 제도 확대로 지배계급의 세습 구조 공고화, 과거제의 붕괴로 서민 계층에서 지배 엘리트로 신분 상승하는 통로 폐쇄. 위와 같은 병리현상이 계속되면, 결국 사회적 불만이 고조해 민란이 일어나는 패턴이다.

이 중 인재 등용과 계층 이동 통로인 과거제도의 역할을 오늘에는 대학 입시제도가 수행한다. 지금의 입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로 묘사한다. 현대의 과거제도로서 서민계층의 사회적 신분상승 욕구와 중산층 이상의 현재 신분 유지 욕구가 충돌하는 생존경쟁의 장이다.

나는 1980년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의 입시제도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단순 명쾌한 제도였다. 오로지 대입학력고사 성적과 내신성적만으로 모든 수험생이 한 줄로 서서 대학에 갔다. 거기다 사교육 금지로 과외는 물론 재학생의 학원 수강도 금지됐다. 유감스럽게도 권력층과 최상류층 자제들은 그 와중에도 고액 비밀과외를 했지만, 워낙 소수라 전체 판도에 큰 영향이 없었다.

그런 입시 제도에 힘입어 강북의 공립 고교생이자 서민 가정 출신인 나는 학교 수업 듣고 교과서와 자습서 문제집 혼자 공부한 것만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내가 입학한 법대를 포함해 서울대생들의 다수가 나와 별로 다르지 않는 서민 가정 자제들이었다. 물론 그 때도 이른바 강남 8학군 치마 바람이 유명했지만, 당시 서울대생의 경제적 계층 분포도는 사회의 일반적인 계층 분포와 큰 차이는 없었다. 지방 학생도 많아서 온갖 사투리가 캠퍼스 분위기를 주도했다.

지금의 입시 제도는 그때와는 천양지차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발표한 2015학년도 대입 전형 방법의 수는 892개, 전국 215개 대학의 세부 전형명 기준으로는 무려 2988개다. 명문대일수록 정시보다 각종 수시 모집으로 선발하는 비율이 높고, 수능 시험은 해마다 쉬워져서 누가 누가 실수 안 하나의 시험이 되어 간다.

이런 와중에 차별화된 인재로 자신을 포장하려면 끝도 없다. 이미 중학 시절에 만점에 가까운 토플 점수는 물론 높은 제2외국어 점수도 기본이다. 서울과학고 등 영재학교에 가려면 수학 올림피아드 준비를 위해 대치동 올림피아드 전문 학원에서 초등학교와 중1까지는 선행 학습으로 고교 수학을 정복해야 한다. 여기다 중국 대학들이 만든 올림피아드용 문제집을 1년 넘게 반복해 푼다. 수학 천재 가우스가 다시 살아와도 아무 정보 없이 시골에서 독학으로 영재고에 가는 건 불가능할 듯하다.

사회성도 좋다는 점을 보이려고 학생회, 동아리 활동에, 투철한 봉사 정신을 입증하려고 굳이 방글라데시까지 가서 우물을 파기도 한다. 악기 한두 개는 기본.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그냥 나열만 되면 안 되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단다. 그래서 요즘 대치동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미리 한 방향의 스토리에 맞추어 갖추어야 할 스펙을 설계해준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 어떤 가치관이 있는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던 일이 있었다. 몇 년 전 어떤 행사 자리였다. 테이블에 둘러 앉은 점잖은 분들이 교육 문제에 언급했다. 역시 교육 문제에 대하여는 사모님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하프를 전공한 사모님이 수학과 교수인 부군을 제치고 자녀의 수학 선행 학습 시간표를 짜고 있었고, 발레를 전공한 사모님이 미국 박사 출신인 부군을 제치고 애들 영어 웅변대회 수상 경력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들. “그래도 공부 하나만 불균형하게 잘 하는 애가 되지 않도록 이것 저것 많이 시키고 있어요.”, “맞아요. 이 글로벌 시대에 외국어 실력, 세련된 매너, 수준 높은 교양, 원만한 성품…. 얼마나 갖춰야 할 게 많아요?”, “글로벌 리더가 되려면 창의적 인재여야지 교과서 달달 외우는 시험만 잘 치는 기계가 되면 안 되죠.”, “우리나라도 이제 안정된 사회인데 더 이상 평지 돌출로 상고 출신 대통령이 나오고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면 인성이 불균형할 수밖에 없죠.”

공부 하나 달랑 잘 해서 먹고 사는 불균형한 인성의 나는 그 우아하고 세련된 분들 사이에서 불편했다. 서민 계층 자제들이 잘 하는 건, 그나마 공부 하나밖에 없다. 도서관 덕분에 돈이 안드는 독서가 가장 큰 취미요 특기이다. 서민 계층 자제들에게 가장 유리한 시스템은 공교육, 교과서와 큰 부담없이 구입할 수 있는 참고서 범위 내에서 이를 응용해 변별력이 있을 만큼의 난이도로 출제가 되어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좋은 점수를 받는 아주 단순한 제도다. 이건 평범한 두뇌의 자녀를 둔 상류층 내지 중산층 학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제도이다. 시골 깡촌이나 달동네에서 우연히 돌연변이로 달랑 공부 하나 잘 하게 태어난 ‘불균형한 인성의 공부 기계’가 자기 아이의 자리를 빼앗아 갈지 모르니 말이다.

그리스적 전인교육은 노예제의 기반 위에 귀족들에게 적용되었던 혜택이다. 음악, 미술, 체육에 웅변, 논술, 뛰어난 외국어능력 등등 중산층 이상 가정의 뒷받침 없이는 개인의 노력으로 경쟁하기 힘든 분야의 능력을 자꾸 대입제도에 도입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벌써 신분이동이 어려운 쇠퇴기의 사회가 되어가는 징표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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