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훈민정음 "벽 속에 있었다"

2015. 4. 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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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경북 상주의 한 농가가 화재로 전소됐습니다.

이 집은 7년 전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했다고 공개한 배 모씨의 집.

법정다툼이후 모습을 감춘 훈민정음은 이번 화재에서 무사한걸까?

배씨는 훈민정음이 자신에게 없다고 주장하는데...

고미술시장에서는 훈민정음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한글창제의 역사가 담긴 귀한 책은 어디로 사라진건지, 2580이 추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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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아침 9시 반.

경북 상주의 한 시골 농가에 불이 났습니다.

◀ 화재 신고자 ▶

불이 나고 연기가 있는데 할머니가 막 끄려고 하시더라고요. 한 15분인가 지나고 나서 그분(집주인)이 오시더라고요.

이 작은 시골집 화재는 곧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집 주인이 가지고 있는 책 한 권 때문입니다.

한글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자음과 모음은 어떻게 소리가 나는 지를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직접 설명해 놓은 책이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이 책은 현재 세상에 단 두 권만 존재가 확인됐습니다.

한 권은 간송미술관 소유의 간송본으로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습니다.

나머지 한 권은 이 상주 화재의 집주인 53살 배 모씨가 가지고 있는 상주본입니다.

특히 상주본은 보존상태가 좋고 책의 여백에 붓글씨로 주석을 다는 등 연구 흔적이 뚜렷해 간송본보다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런 상주본이 7년전 단 한차례 공개된 뒤 그동안 그 행방이 꽁꼼 숨겨져 전혀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번 화재에서 무사했을까요?

지금 이 책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2580은 훈민정음 해례 상주본의 뒤를 추적했습니다.

불이 꺼지고 4시간 만에 도착한 집은 잿더미였습니다.

무너진 집터를 살펴보는데 이웃 주민이 취재진에게 다가와 대뜸 말을 건넵니다.

◀ 이웃 주민 ▶

오늘 그게(상주본이) 드러났어요. (배 씨가) 벽돌 틈새에 있는 걸 빼내서 어디다 숨겨놨다고

또 다른 주민의 목격담.

◀ 이웃 주민 ▶

벽돌 사이에 있는 것 끄집어내서 그래서 저쪽으로 어디 갔대. 안전한 조치를 해놨겠지

화재현장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배씨가 불난 집터에서 급히 뭔가를 가지고 나와 뒷산으로 올라갔는데, 그게 바로 훈민정음 상주본이라 생각했습니다.

뒷산으로 가봤습니다.

◀ 이웃 주민 ▶

(여기를 왜 올라왔을까요?) 모르죠 뭐. 왜 올라왔는지 그거는. 지금은 아마 자기 가장 가까운 데 가지고 있을 거예요

현장에 있던 배 씨에게 상주본이 안전한 지부터 물었습니다.

즉답 대신 소방관 얘기를 합니다.

◀ 배OO / 상주본 소유자 ▶

(좀 탔어요?) 소방관들이 다 보고 알았습니다. 소방관들이 와서 다 보고 알았다고

소방관이 대체 뭘 봤다는 건 지, 화재를 진압한 상주소방서를 찾아갔습니다.

소방관은 화재를 진압하는 내내 배 씨가 초조한 모습으로 방 하나를 지목해 불을 빨리 꺼달라며 재촉했다고 말합니다.

◀ 소방관 ▶

그 부분에 물을 많이 뿌려달라고 하더라고. 계속 요구를 하더라고. 다른 데가 불이 커도 여기를 자꾸 꺼달라고 하는 거예요 . 그래서 아, 중요하긴 중요한가보다.

불길이 잡히자 배씨가 그 방으로 가더니 반쯤 무너진 벽의 벽돌 구멍에서 신문지 두루마리를 꺼냈고 그 안에 싸여있던 뭔가를 확인하더니 뒷산으로 급히 올라갔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과 일치합니다.

◀ 소방관 ▶

벽돌을 밀다 보니까 뭔가 발견했는지 쫓아가더라고. 가서 손으로 잡더라고. 길이는 30cm 정도 되는 것 (그게 뭐죠?) 신문지로 말아놨습니다. 신문지 만 것을 풀면서 욕을 좀 하더라고. 이렇게 아이 XX 정도 욕을 하면서 그걸(신문지) 버리고 안에 것만 가슴 안으로 집어넣고 가더라고요. 산 쪽으로요.

불은 왼쪽 끝 방에서 시작돼 옆으로 번지면서 집 전체를 태웠습니다.

의문의 신문지 두루마리는 오른쪽 끝방 벽 틈에 끼어있었습니다.

과연 이 두루마리에는 훈민정음 상주본이 감춰져있었는지, 행여 이번 화재로 훼손되지는 않았는지 관심이 모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경찰은 마침 이 신문지를 화재현장에서 수거해 보관중이었습니다.

둥글게 말려 있는 신문지는 윗 부분이 불에 타거나 그을렸고 모서리 일부는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신문의 발행일이 눈에 띕니다.

7년 전인 2008년 9월 6일로 돼있습니다.

배씨가 집안 정리 중 훈민정음을 발견했다며 지역 방송에 처음 공개한 날이 2008년 7월31일.

상주시에서 골동품 가게를 하던 조 모씨가 자신의 책을 배씨가 훔쳐갔다며 배 씨를 고소한 날이 2008년 10월 24일.

이 두 시점 사이에 상주본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췄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주본이 이 신문지에 싸여 보관돼왔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번엔 신문지의 크기를 재봤습니다.

타고 사라진 부분을 감안했을 때 세로 길이가 36cm 정도입니다.

상주본을 처음 공개했을 때 측정해 둔 길이는 32cm.

신문지 안에 쏙 들어갈 크기입니다.

신문지 하단을 보면 뭔가의 크기에 맞추려고 칼로 잘라낸 걸 알 수 있습니다.

불에 탄 상태로 보아 이 안에 상주본이 들어있었다면 훼손됐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배씨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이번엔 얼마나 훼손됐냐고 물었습니다.

◀ 배OO / 상주본 소유자 ▶

(책이 훼손이 많이 된 건 아니죠?) 내가 더 걱정이죠. 훼손이 되면 어떻고 안 돼도 어쩌겠습니까? 이왕 불은 났는데

훼손됐다는 건지 안됐다는 건지 취재진에겐 애매모호한 대답만 하던 배씨는 화재 당일 오후, 문화재청 담당자에게 "신문지에 싸여있던 게 훈민정음이 맞고 이번 화재로 일부 훼손됐다"고

시인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문화재청 관계자 ▶

"조금 훼손이 됐다. 훼손이 되면 무슨 처벌하는 거 아니냐" 나한테 그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가 큰 실수를 했다고. 그것(신문지)을 괜히 거기에다 버렸다. 자기도 경황이 없어서 버렸다"고 그러더라고

그러면서 집에 있던 상주본은 전체가 아니라 책을 묶었던 끈을 풀어 나눠 놓은, 즉 분책한 것의 일부란 말도 했다고 합니다.

◀ 문화재청 관계자 ▶

"(배 씨가) 옛날에 분책 그런 것도 있었는데 그 부분이 자기 집에 가지고 있던 것 중에 하나다. 분책 중에 하나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동안 땅속매장설, 은행금고설, 진공포장설 등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던 상주본의 보관방식과 보관장소가 신문지로 겉을 싸서 자기 집 벽 속에 은밀히 보관해 왔음이 처음 확인된 겁니다.

한글창제의 비밀이 담긴 국보급 문화재가 대체 왜 허술한 시골집 벽 속에서 신문지에 싸여있던걸까?

어쩌다 이렇게 허무하게 불길에 훼손돼 버린 걸까?

어처구니없는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이야기하려면 상주본이 발견된 7년 전 상황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2008년 7월 31일, 경북 상주에서 고미술품 수집상을 하는 배 씨가 집수리를 하려다 발견했다며 또 하나의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합니다.

◀ 남권희 교수/ 경북대 문헌학과 / 2008년 7월 31일 방송 ▶

"세종 당시에 간행된 것으로 종이의 지질이라든가 인쇄상태라든가 모든 형태적인 면을 봐서도 그 시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보도가 나가자마자 상주에서 골동품 가게를 하던 조 모씨가 이 책이 자신의 거라고 주장합니다.

배 씨가 며칠 전 자신의 가게에서 고서적 30만 원 어치를 사갔는데, 그 때 이 책을 몰래 훔쳐갔단 겁니다.

◀조OO / 골동품상 / 2008년 12월 22일 방송▶

"훈민정음 해례본이 이렇게 좋은, 엄청난 책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배OO 씨는 그 책이 미리 아마 좋은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져갔습니다."

곧바로 법정싸움이 시작됐고 상주본은 이때부터 모습을 감췄습니다.

먼저 상주본이 누구의 것인지 가리는 민사소송에서 법원은 조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관련자 증언과 정황 증거상 상주본이 "원래부터 배 씨 집에 있던 게 아니"란 이유입니다.

대법원 판결로 소유권을 최종 인정받은 조씨는 "훈민정음을 개인의 소유로 둘 순 없다"며 2012년 5월 문화재청에 기증했습니다.

하지만 배씨가 판결을 인정하지 않고 책을 내놓지 않는 바람에 정작 기증식에서는 상주본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어 배씨에 대한 절도죄 형사소송이 시작됩니다.

절도죄에 대한 형량을 정하려면 절도한 물건의 가치를 금액으로 매겨야 하는데 이 책을 실제로 본 이는 배씨 외에 단 4명,

지역방송 취재기자와 카메라기자, 상주시 공무원과 고서적 전문가 이들을 통해 값을 매긴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 임노직 / 국학진흥원 목판연구소장 (2008년 상주본 감정) ▶

"훈민정음의 어떤 교육적 또는 문화적 가치를 이야기해야 되는데 이거를 돈으로만 환산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불성설이고"

검찰이 절도품의 가치를 매겨달라며 문화재청에 가격산정을 요청했고, 문화재청은 취재내용과 전문가 의견을 종합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지만 굳이 금전적 가치를 따지자면 1조 원 이상"이라고 감정했습니다.

'훈민정음은 1조 원'이란 얘기가 이 때 나온 겁니다.

형사재판 1심은 배씨의 절도죄를 인정했고 1조 원 가치를 적용해 징역 10년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2심은 무죄를 선고합니다.

배씨에게 죄를 묻기에는 정황증거 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목격자 진술도 오락가락하다는 겁니다.

한 예로 어떤 증인이 "원래 책이 있었다는 조씨의 골동품가게에서 상주본의 표지 제목을 봤다"고 증언했지만 이 제목은 육안으론 보이지 않고 물을 뿌려 종이를 불려야만 볼 수 있어서

재판부가 증언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이상오 공보판사 / 대구고등법원 / 2012년 9월 8일 방송 ▶

"피고인이 이를 알면서도 훔쳤다는 점 등이 명백하게 입증되었다고 보기 어려워 /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리에 따라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재판부는 선고를 마친 뒤 "무죄라고 해서 상주본이 배씨의 소유라든가 배씨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확정하는 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재판 결과와 관계없이 상주본이 햇빛을 볼 수 있게 해달라" 당부했고 배씨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1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던 배씨는 2012년 9월 석방됐고 2년 뒤 대법원은 무죄를 확정했습니다.

하지만 배씨는 '책을 양지로 내놓겠다'던 재판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배씨가 2580에 밝힌 이유는 이렇습니다.

6년간의 민,형사 소송은 문화재청의 공작으로 시작된 만큼 그 진상을 세상에 공개하라,

또 무죄를 선고받은 이상 1년 가까이 옥살이를 한 것에 대해 문화재청이 사과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상주본에 대한 소유권을 온전히 인정해달란 겁니다.

이를 모두 얻기 위해선 상주본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 배OO / 상주본 소유자 ▶

(문화재청이) 당연히 사과해야 되죠. 내가 곤욕 치른 이 사건의 진상을 먼저 밝히라는 거죠. (진상을) 공개 못하면 차라리 내가 영 (책을) 껴안고 가는 거예요

이렇게 상주본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뒤, 문화재청은 여러 차례 배씨의 집을 압수수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 문화재청 관계자 ▶

집안은 다 뒤졌지. 담장, 구들장까지 장판까지 다 뒤졌지. (그때 압수수색을 몇 번 했죠?) 집달관을 통해서도 몇 번 했고 우리가 정식으로 한 것도 서너 번 됐지. 상주검찰청 수사관들 데리고 가서...

문화재청 관계자는 "압수수색 당시, 배씨가 급하게 공사한 흔적을 집안 곳곳에 만들어 혼선을 줬고 문제의 벽이 의심되긴 했지만 집을 부수면서까지 진행할 순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문화재청 관계자▶

(벽은 생각을 못 했을 거 아니에요) 생각은 했는데 부뚜막하고 벽체 쪽에 뭔가 수리한 흔적이 있었어요. 그러면 온 집을 다 깨야 되는데 깰 수가 있나

화재 현장에 다시 가봤습니다.

상주본을 숨긴 벽은 구멍 3개짜리 시멘트 벽돌로 돼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길이 36cm의 신문지에 싸여 아래와 위의 구멍을 일자로 맞춘 두 벽돌 속에 끼워진 채 7년 가까이 잠들어 있던 겁니다.

화재로 타긴 했지만 그나마 시멘트 블록 덕에 훈민정음은 한 줌의 재가 되진 않았습니다.

◀ 소방관 ▶

(그 벽돌은 불에 탄 건 아니죠?) 그렇죠.

벽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구멍에) 세로로 (책을) 집어넣으면

배씨가 책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만큼 문화재청에 인정한 '일부 훼손'이 어느 정도인 지 알 수 없습니다.

2580은 불에 탄 신문지를 통해 훼손 정도를 추정해봤습니다.

먼저 신문지 상단이 불에 타버렸고 모서리는 밑으로 10cm 정도 타들어갔습니다.

불에 탄 신문지와 2008년 촬영된 상주본을 비율에 맞춰 겹쳐봤습니다.

신문지 상단만 살짝 탄 부위는 책의 여백에 해당하지만

깊이 타들어간 부위에선 글자도 훼손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 이상규 교수 / 경북대 국문과, 전 국립국어원장 ▶

"상당히 많이 타들어 갔네요. (글자가 훼손됐을 가능성이 좀 있죠?) 그리고 안 탄 부분도 이 정도 화력을 받았으면 안 탄 부분도 이미 문화재로서는 결정적인 훼손이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간송본에는 없는 묵서,

그래서 한글변천사 연구의 유일한 자료로 평가받는 이 부분이 훼손됐을 수도 있습니다.

◀ 이상규 교수 / 경북대 국문과, 전 국립국어원장 ▶

세계적인 인류의 자산이 한 줌의 재로 바뀌어버릴 수 있는 참 위험한 상황을 우리는 목도하겠죠

더욱이 책이 표지가 있는 채로 통째로 신문지 속에 말려있었다면 종이 사이가 밀착돼 덜 탔을 수 있지만 배씨가 인정한대로 책의 일부가 낱장 형식으로 나눠지는 바람에 공기 접촉면이 커졌다면 신문지보다 더 훼손됐을 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신문지에 눌어붙은 붉은색 비닐입니다.

이 자국으로 볼 때, 배 씨는 습기에 상하는 걸 막기 위해 비닐로 상주본을 감싼 뒤 그 위에 신문지를 두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비닐의 일부만 신문지에 눌어붙어있고 나머지는 보이질 않습니다.

책에 눌어붙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상규 교수 / 경북대 국문과, 전 국립국어원장▶

"가열에 의해서 안에 포장된 비닐이 아마 훈민정음으로 추정되는 해례본에 녹아서 붙었을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건 책이 훼손되긴 했지만 모두 불에 타 사라져 버린 게 아니고

화재 직후, 배씨가 벽돌 구멍에서 책을 꺼내 어딘가에 다시 숨겨놨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배씨는 화재 발생 나흘 뒤 기자들과 만나 "상주본 일부를 집에 둔 게 맞지만 불에 모두 타서 지금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 배OO / 상주본 소유자 ▶

다 탔죠. 탔죠. 탄 거 그만 얘기해 그만. 내 생각에는 아마 절도를 해가면서 불 지른 것 같아요. (방화범이 있다고 보십니까?) 네 그렇죠

배 씨 주장대로 책이 모두 타버렸을 가능성이 있는지 고서적 전문가를 통해 재확인했습니다.

불에 탄 신문지 영상을 보더니 전소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 서수용 / 고문헌연구소 소장 ▶

신문으로 봐서는 불기운이 가장자리 부분만 가 있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90% 이상. 제가 판단했을 때 80~90% 이상 타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면서 불에 탔다 복원된 16세기 책 한 권을 보여줬습니다.

이 책은 하단이 불에 타버렸지만 타고 남은 낱장 하나하나를 새로운 한지에 붙여 복원시켰습니다.

◀ 서수용 / 고문헌연구소 소장 ▶

(상주본도) 상당히 희망적이라고 봅니다. 이 정도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수리할 수 있고 보존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한지의 특성상, 한 번 열기를 받으면 당장 훼손되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정도가 커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로선 훼손 정도를 확인해 복원한 뒤, 과학적인 보존 처리가 시급해 보입니다.

하지만 배씨는 "불에 타서 없다"며 여전히 책을 공개하지 않고 있고 훈민정음은 또 다시 숨바꼭질을 시작했습니다.

대체 배씨는 왜 훈민정음을 꽁꽁 숨기려 할까요?

사실 2580이 상주본에 대한 취재에 나선 것은 화재가 나기 이전부터였습니다.

상주본이 고미술시장에 매물로 나와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서울 고미술 시장의 양대 축인 인사동과 답십리.

겉으론 화려한 관광명소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선,

업자들끼리 '작품'이라고 통칭하는 골동품과 고서적, 고미술품의 거래가 쉼없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역대 최고가의 작품, 훈민정음이 매물로 등장했다는 소문은 곳곳에 퍼져있었습니다.

◀ 박OO(가명) / 고미술상 ▶

그거 판다고 그러던데? 한 40억인가 50억인가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거간 (거간이라는 건 중간에서 거래를 맞추는?)

소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배 씨의 지인이라고 밝힌 한 여성이 상주본을 3분의 1로 나눈 것 중 하나를 복사해 값이 얼마나 될 지 알아보러 다닌다는 겁니다.

◀ 김OO(가명) / 고미술상 ▶

어떤 여자분이 이걸 처분하고 싶다고 경상도 쪽 상인을 통해서 (연락이) 왔었는데

◀ 윤OO(가명) / 고미술상 ▶

XX(가족)인가 누가 골동 그런 쪽으로 와서 이게 얼마 주면 되느냐고 팔 수 있는지 그 관계를 물었다

고객 정보를 쉬쉬하는 고미술시장의 특성상 의문의 여성을 직접 봤다고 말하는 고미술상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다만 거액의 고미술품을 다루는 거물급 중개상들에게 은밀하게 거래 타진이 왔고 원격으로 흥정이 오갔다고 합니다.

몇 단계를 거쳐서 연락이 왔는지에 따라 부르는 값은 모두 달랐습니다.

◀ 김OO(가명) / 고미술상 ▶

액수도 너무 터무니없이 달라고 해서 안 했는데 (그때 얼마를 달라고 하던가요?) 한 180억인가

◀ 최OO(가명) / 고미술상 ▶

"그 사람(배 씨)하고 라인이 있기 때문에 알아보는데 돈 얼마 주려고 하냐 커미션을" (내가) 20억에 2억을 줄 수 있지 않겠느냐

1조 원의 가치로 감정받은 훈민정음이 왜 이 정도 금액으로 흥정되는 걸까?

고미술 시장에선 "상주본이 긴 재판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른바 사고물건이고 감정가는 감정가일 뿐 실제 거래가 성사되는 금액과는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OO(가명) / 고미술상▶

삼국유사를 가지고 있는 분이 지금 얼마를 부르냐면 한 200억 불러요 한 권에. (진품이요?) 진품이죠. 국보로 지정된 거라니까요. 지금 이 사람이 만약 2억에 팔겠다고 하면 나는 빚내서 산단 말이에요. 그런데 20억이면 안 산다고 사람들이. 그게 현실이거든요. 현실

고미술상들은 '훈민정음 판매설'의 진원지로 대구 고미술 시장을 지목했습니다.

시장 규모는 인사동보다 작지만 훈민정음 같은 고서적 거래만큼은 전국에서 가장 많고

무엇보다 책이 발견된 경북 상주에서 가깝단 겁니다.

2580은 대구 고미술시장에 찾아갔지만 역시 소문의 여성을 직접 만났다고 말하는 고미술상은 없었습니다.

다만 배 씨가 2008년 훈민정음을 공개한 직후, 배 씨를 직접 만나 거래를 추진했다는 고미술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10억대로 시작한 거래가는 점점 올라갔고 끝내 흥정은 실패했다고 합니다.

◀ 권OO(가명) / 고미술상 ▶

15억 20억 25억 30억 50억까지. 50억 줄게 그랬죠 (더 달란 얘기는 안 해요?) 더 달라고 그랬죠 (얼마?) (배 씨가) 100억 이야기했죠

배 씨 집에 불이 나고 배 씨가 훈민정음이 불에 타서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미술상들은 의심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문OO(가명) / 고미술상▶

저는 그냥 좀 웃음이 나옵니다. 뻔한 행위를 그렇게 뻔뻔스럽게 하고 있으니까 / 만약에 그게 타버렸다든지 그러면 아주 미치고 팔짝 뛰고 XX할 X인데. 태연한 듯하네요.

◀ 김OO(가명) / 고미술상 ▶

에이 거짓말이에요. 그래야지 세간의 관심을 없애버리고 편하게..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라 해도 해외로 나가지 않는 이상 당국에 신고만 하면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훈민정음 상주본은 당국에 신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주본 판매설'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상주본을 구입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 이상규 교수 / 경북대 국문과, 전 국립국어원장 ▶

"일본에서 소위 한글이 일본에서 기원했다고 하는 일부 주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의 훈민정음을 어떤 고가라도 매입을 해서 한국 사람들의 자존을 짓밟으려는 의도를 가진 고서 거래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배 씨는 2580에 "책 흥정은 커녕 팔 생각이 전혀 없고 혹시 가족들이 자기 몰래 흥정하러 다녔는 지 물어봤지만 아니었다"고 반박했습니다.

◀ 배OO / 상주본 소유자 ▶

XX(가족)한테 그 소리 했다가 욕만 먹었습니다. 팔 사람은요 다만 몇 억이라도 옛날에 팔았지 이렇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안 그렇겠어요? 이 상태에서 판다면 뭐 얼마나 가겠습니까. 소문 들리는 게 한 삼십억 이러면서도 그런 식으론 안 돼요

훈민정음이 훼손됐고 '상주본 판매설'까지 돌고 있는데 문화재청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현재로선 배 씨를 설득하는 게 유일한 방법일 뿐, 사실상 속수무책이라고 합니다.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이상, 책의 실효적 소유자인 배씨를 상대로 강제 회수를 할 수도,

판매를 막을 수도 없다는 겁니다.

◀ 문화재청 관계자 ▶

훔쳐 갔다고 하는 형사건이 무죄를 받았는데 그걸 가지고 어떻게 하겠어요. 형사 건이 민사 건보다 더 위에 있다고 봐야죠.

그렇다고 배 씨가 자발적으로 내놓기 만을 마냥 기다릴 상황도 아닙니다.

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상주본을 사들여야 한다는 절박한 제안부터

◀ 서OO(가명) / 고미술상 ▶

2,000억이면 예산 낭비다 하지만 200억이면 국가에서도 사야 해요. 국가 비자금 차원에서

민간 분야가 캠페인이라도 벌여서 배 씨의 마음을 돌려놓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 김슬옹 / 한글학회 연구위원 ▶

공공재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액수 그대로 보상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 세금과 국민 성금 등으로 상징적 보상을 하고 공공 기관에 기증을 하도록

전세계 문자 300여 종 가운데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만들었는 지 밝혀진 유일한 문자 한글.

이게 가능했던 건 훈민정음 해례본이란 책 한 권 덕입니다.

◀ 유호선 / 한글박물관 학예연구원 ▶

해례본이 없었으면 저희는 창제 시기라든지 목적이나 배경이나 원리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단 두 권, 음지 속에 있는 상주본은 양지에 나와 있는 간송본과는 또 다른 가치를 가집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쌍ㅎ을 직접 적었을 정도로 한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조선 시대 어느 학자의 연구 흔적이 붓글씨로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 임노직 / 국학진흥원 목판연구소장 ▶

음운학자들이 훈민정음에 대한 이해 정도를 밝혀주는 어떤 단서가 거기 있다는 것은 아주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을 했죠. 문중을 올라가보면 다 집현전 학자들하고 연관이 돼있죠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 한글박물관,

자국 문자의 창제사를 기리기 위해 지은 박물관으론 세계에서 두번 째입니다.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귀하게 모셔놓은 책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

하지만 이 책은 간송본을 복사한 겁니다.

한글의 가치만큼 귀하고 한글의 나이만큼 오래된 훈민정음 상주본은 그 모습을 꽁꽁 숨긴 채 고미술 시장의 흥정거리로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숭례문이 그랬듯 훈민정음도 불에 탔습니다.

배 씨가 다른 곳에 뒀다는 책의 나머지 부분 역시 또 어떤 수난을 겪고 있을 지 알 수 없습니다.

◀ 이상규 교수 /경북대 국문과, 전 국립국어원장 ▶

"훈민정음의 원본은 문화유산으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대단히 가치가 있지만 '돈으로의 가치는 0원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제로다. 바로 이것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어느 개인이 돈에 눈이 멀어서 이 자료를 훼손한다면 전 인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한 개인의 무모한 욕심과 당국의 무기력 속에서 어쩌면 우리 세대 모두가 선대와 후대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건 지도 모릅니다.

인류가 공유해야 할 문화유산 훈민정음.

더 훼손되기 전에, 영영 찾지 못할 어딘가로 사라지기 전에, 좁고 컴컴한 벽돌 구멍 속에서 꺼내 국민의 품으로 돌려놓기 위한 지혜가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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