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라 전성시대? 박 대통령 비판 전단 신드롬 누가 일으켰나

정용인 기자 2015. 3. 2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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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단 제작 배포자들 잇단 '커밍아웃'…사법당국 무리수가 키워

일요일, 집에서 쉬고 있던 기자는 무심코 튼 공중파 뉴스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제목은 이랬다. "비방전단 또 살포… 다리 묶인 채 숨져." 뭔가 흉측한 뉴스인 듯했지만 주말 새벽에 홍익대 인근에서 대통령을 비난하는 전단이 살포되었다는 것과 경북 예천에서 80대 할머니가 살해당했다는 단신이 묶인 기사였다. 뉴스에는 경찰이 전단 살포처 인근에서 확보한 것으로 보이는 CCTV 화면이 얼굴이 모자이크된 채 나왔다. 중년의 남성이 어깨에 멘 가방에서 전단을 꺼내 공중에 살포하며 걸어가는 모습이다. 이 남성의 행적이 담긴 다른 CCTV 영상도 같이 편집됐다. 인상적인 대목은 새벽 3시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엔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들 중 누구도 이 남성의 행동을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잇따라 의문이 떠올랐다. 왜 저 남성은 새벽 3시에 저 삐라를 살포한 것일까. "위법성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경찰은 왜 방송에 저 CCTV 영상을 공개했을까.

통진당 해산 직후부터… 당국 배후 의심?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담은 전단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2월 무렵부터다. 거리에 뿌려진 전단 내용은 박 대통령의 과거 방북 행적, 구체적으로 2002년 평양 방북 때 한 발언 등을 예시하며 박 대통령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철저히 수사하라는 것이다. 당시 뿌려진 전단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자기들이 하면 평화활동, 남들이 하면 종북/반국가행위?" 전단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을 겨냥한 비판으로 보였다. 그 후 전단은 전국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12월과 1월, 부산과 광주, 강원도에서도 잇따라 발견되었다.

뿌려진 전단들은 크게 두 종류다. 위의 박 대통령 국가보안법 위반 주장 전단에는 전단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전단의 초기 버전에는 포털사이트 다음에 개설된 카페 주소도 나와 있다. 또 하나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이라는 명의로 뿌려지는 전단이다. 이 단체는 익명활동을 고수하고 있다. 2월 하순 서울 명동과 청와대 앞에서 발견된 전단지는 이들이 만들었다. 3월 11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들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이라는 이름은 SNS를 통해 알게 된 몇몇 소시민들이 전단지를 배포해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임시로 지은 이름"이라며 "앞으로도 공개적으로 활동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2월 15일, 부산에 뿌려진 수백 장의 전단지도 화제를 모았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한자어를 담은 이 컬러판 전단에는 기모노를 입은 박근혜 대통령 얼굴이 그려져 있다. 밑에는 "나라꼴 자~알 돌아간다"라는 촌평(?)을 붙여 놨다.

부산 일대에서 지난 2월 중순 뿌려진 '경국지색' 전단지. 윤철면씨가 팝아트 작가 등에게 자료를 받아 제작한 전단이다. / 윤철면 페이스북

그리고 3월 11일. 한 장의 사진이 SNS에서 화제를 모았다. 압수수색 현장에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있는 남자. 박성수씨(전북 군산시·42)다. 12월부터 배포된 박근혜 국가보안법 전단 제작자다. 압수수색 이후 박씨의 '행보'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박씨는 지난해 12월 자신의 활동을 담은 책 <둥글이의 유랑투쟁기>를 펴냈다. "보관하고 있던 책을 이적표현물로 압수당해 유명세를 떨치기를 바랐지만" 경찰은 그의 책을 압수수색하지 않았다. 그에 좌절하는 사진을 SNS에 올렸다. 압수수색당한 이는 박씨만이 아니었다. 박씨의 전단을 받아 배포한 대구의 변홍철씨(출판인)도 자택을 압수수색당했다. 공교롭게도 변씨 역시 최근 자신의 책 <詩와 공화국>을 펴냈다. 역시 압수당하지 않았다. 변씨도 그에 항의하는 글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박씨는 출석을 요구한 대구 수성경찰서에 '개 사료'를 보냈다. 개 사료를 보내면서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열심히 꼬리 흔드세요~"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는 인증사진을 올렸다. 반송된 개 사료는 군산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뿌렸다.

'화제'를 모은 전단 제작·배포자들 반응

2월 15일 부산에 뿌려진 경국지색 전단 제작자도 밝혀졌다. 부산시 연제구에 거주하는 윤철면씨(46)다. 2월 23일 오전, 그의 집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모두 12명이었다. 윤철면씨의 말. "생각해보세요. 연제경찰서 정보과 지능수사팀이 총 9명입니다. 팀장까지 다 포함해서요. 제가 얼굴 모르는 사람이 3~4명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부산시경 사이버팀이라고 하고,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누구고 어디 소속이냐고 물으니 자기들은 운전지원 나왔대요. 왜 이렇게 많이 왔냐고 하니 통진당 이석기 체포 때 방해를 받은 경험이 있어 그런 상황에 대비한 거랍니다. 아이고 나 참. 전단 뿌린 게 뭐라고…. 자기네들 스스로 심각한 상황으로 봤다는 거죠."

면밀히 조사하겠다는 경찰이 윤씨에게 적용한 법조항은 셋이다. 첫째는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둘째는 자동차 관리법 위반. 세 번째가 경범죄(쓰레기 무단투기). 윤씨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명예훼손은 '반의사불벌죄'라고 그쪽에서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하지 않는 한 수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 딴에는 개인의 의사표현이고 정치표현인데…. 자동차관리법은 내가 오토바이 번호판을 범법행위를 위해 고의로 가렸다는 것인데, CCTV 에서 전단을 붙이는 퍼포먼스를 하고 난 다음에 떼고 운행하는 것 봤을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퍼포먼스로 전단을 뿌린 뒤 치우려 했더니 다 없어졌다고 진술했죠." 윤씨는 수급자다. 인쇄에 들어간 돈 10만원은 두 달 동안 모은 것이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문제 삼으면 사과할 테고, 고소해서 합의 안 되면 벌금형이겠죠. 개인적으로 봐주라 할 생각 없으니 징역은 얼마든지 살겠다고 했는데, 그건 조서에 기록을 하지 않더군요."

전북 군산의 박성수씨의 경우 전단 배포 활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6·4 지방선거 당시 그가 가상으로 만들어 배포한 출마 전단지도 인터넷상에서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지역에서 경찰들은 다 압니다. 그 전단지를 만든 사람이 저라는 것과 어떤 배후도 없다는 걸요. 1월 중순에 사실상 수사종결한 사안이거든요. 그런데 대구·부산에서 수사에 나서니 뭔가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것이고…." 박씨가 말하는 3월 11일 압수수색 이유다.

3월 13일, 서울경찰청이 일선 경찰서에 배포한 'VIP(대통령을 지칭)나 정부를 비난·희화화하는 전단지 살포 행위자 발견 시 경찰의 대응요령과 처벌 법규'가 담긴 내부문건이 공개되었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3월 16일 기자간담회에서 "하달한 공문이 아니라 회의 때 돌린 대응요령"이라며 "현행범으로 처분을 거부하면 체포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박성수씨가 경찰의 압수수색 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퍼포먼스 사진.

자신의 의견을 쉽게 유포할 수 있는 첨단 SNS 시대에 왜 80년대식 투쟁방식인 전단 살포가 주목받을까. 흔한 분석은 이것이다. 사이버 검열 논란, 정당 해산 등으로 정권이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이자 이에 대한 반발도 복고적인 형태로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표피적 분석에 가깝다. 박씨의 전단 배포 활동은 꾸준히 이뤄져 왔다. 70~80년대 식으로 비밀도 아니었다. 지역에서 박씨의 전단 배포 활동은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박씨나 윤씨는 자신이 배포하는 전단의 내용, 배포 일시까지 다 자신의 SNS로 공개했다. 전단에 들어갈 문구, 사진 하나하나 자신의 '페친'과 논의해 결정했다. 박씨는 말한다. "직접 작업하면 인쇄비용은 의외로 싸집니다. 대충 몇천 장에 10만원이면 떡을 쳐요. 포토샵도 직접 하니… 지방선거 당시 군산시장 후보의 병역비리 의혹을 전단을 통해 제기했는데, 그 양반은 그걸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10만원으로 할 수 없으니 배후세력이 있다는 거예요. 그분 경험에선 그러겠죠. 직접 만들어본 적이 없을 테니." 낡은 관점으론 "자신의 배후가 없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2008년 촛불시위 때 연행자 수사를 담당한 경찰들은 "아고라를 보고 왔다"는 촛불시위 참가자들 수사를 하며 곤혹스러워했다. 가입한 조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이렇게 역정을 냈다. "초를 들고 나왔다면 초를 구입한 자금의 출처가 있지 않겠느냐." 이건 '박 대통령 전단' 수사를 하는 사법당국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전단은 또 하나 잊어버리고 있던 것을 환기시켜냈다. 2008년 촛불시위를 바라보는 조직에 소속된 운동가들을 당황케 만들었던 개인들의 자발적 참여다.

"1인 시위가 개인적 사회운동으로 진화"

사회운동 연구자들은 어떻게 볼까. 이창언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는 기존 조직운동의 특성을 노래 '단결투쟁가'의 가사를 인용해 정리했다.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라는 노래가사가 있지 않나. 기존 운동권의 방법을 요약한다면 집단적인 힘을 모아 뭔가 한방에 해결하겠다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분들의 활동은 뭔가 장난스러우면서도 여론 주도층에게 자각 내지는 분발을 촉구하는 퍼포먼스에 가까운 것 같다." 과거 <경기동부> 등 한국 사회운동 연구서적을 펴낸 임미리 박사는 "전단배포 사건 자체보다도 SNS 등을 통해 중계되는 이후 활동의 의미가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어느 순간 길들여진 면이 있었다. 그건 사소한 행위에 대해서도 제도적 억압이 행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월호 시위 참여자들도 태반이 벌금을 맞고 있다. 박씨 등의 활동에 주목하는 것은 그렇게 길들여지는 것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얼핏 봐서는 일종의 퍼포먼스로 과거의 투쟁방식으로 단순회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새로운 운동양식이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당장 무엇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몇 년 전 한국 사회의 새로운 운동양식으로 주목받았던 1인 시위의 진화된 형태로 '개인적 사회운동' 정도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에 대처하는 정권과 사법당국의 시각이다. 김호기 교수는 "결국 '전단 살포'가 하나의 신드롬처럼 되어버린 건 수사당국이나 보수적 시각이 여전히 과거 방식에 사로잡혀 혹시 배후세력이 있지 않나 의심하면서부터 사건의 주목도가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택광 경희대 영문과 교수는 "리퍼트 주한 미대사에 대한 김기종씨의 테러도 돌발적으로 벌어진 일이고, 정권비판 전단도 사실 일종의 문화적 퍼포먼스에 가까운 것"이라며 "김씨의 경우 침소봉대하여 이용하는 나쁜 선례를 만들었고, 지금 전단문제에 대한 사법당국의 대응도 마찬가지의 길을 걷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결국 정권과 우리 사회 일각의 '문화지체'가 전단 살포 신드롬을 키운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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