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집단분노] 불신·조롱 제1 타깃은 '승인 받지 못한 권력'

이경원 정부경 전수민 양민철 기자 2015. 1. 6.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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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언제·왜·어떻게 분노하나

"'원도 한도 없다.' 이것은 한국인이 완벽한 만족을 일컬을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삶의 음지도 양지도 꼭 같이 원한에 걸려 있다."

한국학의 거장 고(故)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는 '한국인은 누구인가'란 질문에서 으뜸 자리를 차지할 단어로 '원한'을 들었다(국립국어원 '새국어생활' 2010년 봄호). 김 명예교수는 "원한은 한국인의 정서적 생채기다. 원한의 서정은 이 땅의 문화에서 역사적인 주류로 흘러왔다"고 정의했다. 과연 그래서일까. 1996년 미국 정신과협회는 우리말 발음 그대로 적은 'Hwa-Byung(화병)'을 "한국인의 독특한 정신질환"이라며 새로운 문화 관련 증후군 용어로 등록했다.

화병을 앓는 유일한 민족인 한국사회는 유독 집단분노로 자주 들썩인다. 한국인은 언제, 그리고 왜 원한을 맺고 분노하는가. 김 교수의 생각을 빌리자면 원한은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 또는 '남들을 이해하는 심성'에 상처가 생길 때 온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동시에 이런 마음의 상처를 갖게 되는 데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전문가들의 진단과 분석을 바탕으로 집단분노를 부르는 5가지 코드를 짚어봤다.

①승인 받지 못한 권력=한국사회가 집단분노를 표출한 최근 사례는 역시 조현아(41·여)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집단분노를 자아낸 원동력은 자수성가 노력 없이 그저 물려받기만 한 재벌 2, 3세의 엄청난 자본력에 대한 '고까움'이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3대째 세습독재를 이어온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를 바라보듯 재벌 2, 3세의 '승인 받지 못한 권력'을 불신하고 조롱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 전 부사장에게 주어진 부와 권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노력의 대가가 아니었기에 그것을 이용해 비행기를 되돌린 행태가 국민적 집단분노로까지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뉴욕타임스는 조 전 부사장 사건이 알려진 직후 대한항공을 겨냥해 "마치 왕조처럼 세습과 족벌 경영으로 비난받아온 한국 재벌의 상징적 사례"라고 꼬집었다.

한국의 뿌리 깊은 장유유서(長幼有序) 문화도 젊은 재벌에 대한 집단분노를 키운 요인으로 지목된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높은 지위, 지위에 맞지 않게 철없는 행동이 모두 거부감을 줬다는 것이다. 조 전 부사장의 막내동생 조현민(33·여) 전무를 향한 분노는 특히 이런 맥락으로 풀이될 수 있다.

②개선되지 않는 구태·악습·불공정=지난해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각종 재난과 대형 사고가 잦았다. 그리고 대중은 집단적으로 분노했다. 막을 수 있었던 사고가 관리·감독 소홀로 발생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많은 이들이 한 해 내내 가슴아파하고 좌절했다. 이 과정에서 "슬픔을 넘어 분노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수면 위로 올라온 집단분노가 정치 이슈와 결합해 정부 규탄집회 등 구체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집단분노는 개선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더욱 쌓이는 경향이 있다. 분노 연구 전문가 김종우 경희대 한방신경정신과 교수는 "분노하지만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한국사회에서 분노가 문제되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분노가 실제적 변화를 이끌어내느냐를 따져보면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크게 국민적 공분을 산 대상은 퇴선명령을 내리지 않고 승객보다 먼저 몸을 빼낸 이준석 선장이었다. 8개월 뒤 러시아 베링해에서 침몰한 오룡호도 선장이 문제였다. 애초 "배와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감동을 줬던 선장은 사실 자격 미달의 항해사였다. 노 교수는 "세월호 선장의 행동에 대해 많이 떠들고 분노했음에도 실제 그 직종 종사자들의 변화는 거의 없었던 셈"이라고 지적했다.

③대중만 지는 '책임의 위기'=집단분노의 대상은 대개 불공정한 사회적 시스템이나 권력자다. 책임져야 할 고위층이 특권을 이용해 피해가는 모습에 대중은 위기의식과 함께 분노를 느낀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나의 조촐한 현실에 대한 책임을 권력자들에게 묻고자 하는 경우가 많지만 권력자들은 별의별 수단을 동원해 책임지지 않으려 애쓴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권력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두고 "책임 회피의 운하를 판다"고 표현했다. 그는 "이런 경험이 시멘트처럼 엉겨붙으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고 진단했다.

우리 사회의 '불공정에 대한 분노'는 고발 사건 추이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고발은 범죄 피해와 무관한 제삼자가 수사기관에 처벌을 요구하는 절차다. 2011년 10만4861건에서 2013년 12만2547건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만큼 고발할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④분노는 SNS를 타고=집단분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각종 재난 때 신속한 정보를 전한 것도, '땅콩 회항'을 세상에 알린 단초도 모두 SNS였다. 분노의 결집과 폭발을 SNS가 주도한다는 데 전문가들은 이견이 없다. 전 교수는 "분노가 쉽게 모이게 된 데는 모두 한마디씩 할 수 있는 SNS 계정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집단분노는 인터넷 공간에서 다소 익살스러운 풍자 코드와 결합하기도 한다. 5년 전 입대를 피하려 어금니를 빼냈다가 비난받은 가수 MC몽 사례가 대표적이다. MC몽은 지난해 11월 오랜 침묵을 깨고 음반을 발표하며 연예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네티즌들은 그를 조롱하기 위해 실시간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군가인 '멸공의 횃불'을 반복 재생했다. 급속도로 퍼져나간 이 운동에 힘입어 '멸공의 횃불'은 뜬금없이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했다.

⑤동조되는 분노=한국인 집단분노의 가장 큰 뿌리는 특유의 집단주의에 있다. 김종우 교수는 "분노할 대상이 생기면 그 화가 한꺼번에 급속도로 퍼져 여러 사람이 함께 분노하는 것도 한국인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가 발달해 있음을 수치로 설명한 연구 결과도 있다. 네덜란드의 비교문화 연구가 호프스테드(Hofstede)는 한 국가의 개인주의·집단주의 성향을 1∼100점(1점에 가까울수록 집단주의)으로 표현했는데, 한국은 18점이었다. 이는 아시아 평균인 24점보다 낮다. 개인주의가 지배적 정서인 미국(91점)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김열규 명예교수는 한국인의 원한을 정(情)과 복(福)으로 승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한과 복은 맞물려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지론이다. 그는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는 한국인도, 정월 초하룻날 새벽엔 마루 끝, 방문 앞, 그러고도 모자라 부엌문에 복조리를 정갈하게 모셨다"고 강조했다.

이경원 정부경 전수민 양민철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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