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 1년, 여전히 우린 안녕하지 못합니다

입력 2014. 12. 30. 18:13 수정 2014. 12. 3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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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부터 비정규직 대책까지..말이 아니라 행동할 때입니다

[오마이뉴스 주현우 기자]

주현우(고대 경영학과)씨는 지난해 12월 학내에 철도민영화에 반대하며 쓴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를 붙였다. 사진은 대자보를 읽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 유성호

지난해 겨울, 그러니까 2013년 12월 10일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과 관련하여 철도민영화에 반대하는 철도노조의 파업 둘째 날, 코레일 측의 대규모 직위해제를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에 대한 제 나름의 고민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로 써 붙인 지도 벌써 1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시 대자보를 썼던 이유는 이해할 수 없는 사회현실 때문이었습니다. 파업 당일 가해진 4000여 명의 직위해제부터 밀양의 고압 송전탑 문제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에게 내려진 징역 및 수억의 벌금이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전 도무지 안녕하래야 안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글을 읽는 사람들 역시 스스로의 삶과 사회가 안녕치 못하다 생각한다면 자기 목소리로 안녕치 못함을 말해야 한다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안녕들 하십니까 1년, 과연 안녕들 하신가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대자보를 쓸 당시 제 나름의 목적은 두 달 여간 붙었던 천여 장의 대자보와 스스로 안녕치 못하다 외치며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들에 의해서 일정 정도 달성되었다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금 현실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셨습니까? 아니, 안녕들 하십니까? 벌건 대낮에 그것도 연해에서 수 백 명의 목숨이 바다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했던 답답함과 안타까움, 연이은 정부의 무능과 기존 정치세력들의 탁상공론, 점점 더 갑갑해져가는 민중의 생활에 대한 분노.

매일 같이 터지는 사건사고는 물론이거니와, 2년이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며 만들었던 비정규직 법을 이젠 4년까지 연장하겠다 공언하고, 공공부문의 민영화를 시작으로 전 사회의 구조조정을 실시하겠다는 사회에 대해 우리는 과연 스스로 안녕한지에 대해 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만일 안녕치 못하다면 다시금 목소리 높여 스스로 안녕치 못함을 외치고 다른 안녕치 못한 이들과 함께 이 사회를, 현실을,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왜냐?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방법이란 게 반드시 대자보여야 할 이유는 없지만 말입니다.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 "우리 안녕하지 않습니다"

철도 민영화에 반대하는 학내 대자보 '안녕들하십니까?'로 주목받게된 고려대 주현우씨와 이에 동참하는 참가자들이 지난해 12월 14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서 모여 철도민영화를 반대하는 '서울역나들이' 행진을 앞두고 집회를 열고 있다.

ⓒ 이희훈

물이 99.999℃로 끓어오른 상태에서 0.001℃만 더 끓어올라도 수증기라는 전혀 다른 물질이 되듯이 당시의 대자보 정국은 속으로 꽉 막혀 있는, 들끓고 있는 한국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해 대자보 운동의 핵심은 첫 대자보나 제가 아니라 스스로 대자보를 통해 안녕치 못함을 말해야 할 만큼 안녕치 못한 현실, 그 자체였던 겁니다.

간혹 1년이 지난 지금, 결국 대자보 운동은 한철의 이벤트 그 이상 이하도 아니지 않느냐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리고 그 당시 함께 했던 안녕치 못한 사람들은 이 물음이 한시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오히려 박제된 대자보만이 아니라 젖은 장작을 말려나가는 실천의 과정으로 전국의 안녕치 못한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녔습니다.

결국 "말하는 건 허락받고 하는 게 아니다"란 아주 단순한 구호와 대리도 포기도 아닌 "자기정치를 실현하자"는 주장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고 필요합니다. 기존의 언로(말의 통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즉각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큰 글씨로 뜻을 전한다는 대자보란 의미 그 자체는 현재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자보에 숨을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대자보를 쓰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학교 밖의 공간에서 학습모임을 꾸리고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이나 기타 고전을 강독하며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한 교육활동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대학을 안 다니는 청년도, 현재 생업을 하고 있는, 또는 한참 생업을 하다가 정년퇴임에 즈음하신 분들도 만나게 됩니다. 나이로 치자면 10대에서 50대까지의 사람들이 한 세미나에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세미나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고민을 듣습니다. 예를 들어 50대 직장인 분은 "아이가 조금 있으면 수능인데..."라며 나름 기성세대 혹은 부모세대의 고민을, 한편으로 수험생은 어떻게 진학 또는 삶을 설계해야 할런지를, 저와 비슷한 청년들은 어느 순간 이번 생이 망한 것 같은데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되냐는 등 각자의 안녕치 못한 고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안녕치 못한 사람들과 함께 세미나를 하다보면 결국 이 사회의 무엇이 문제이고 그것을 왜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다들 알다시피 무엇이 문제인지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을 때, 고민은 계속 고민으로만 남게 됩니다. 오히려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 명확하게 파악할 수만 있다면, 이 문제를 같이 해결할 사람을 만나고 함께 고민하면서 충분히 그 다음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 진정한 '안녕'을 찾기 위해선...

이 글을 쓰며 올 한 해를 돌아보니 130여 일의 시간을 강독 세미나와 강연으로 보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 현실을 고민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구속받지 않은 생각과 실천들을 이어나가야만 지금의 안녕치 못함을 안녕함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과연 현실의 안녕치 못함이 우리들 스스로의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인지, 그리고 그걸 해결하는 것이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건지, 안녕치 못한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즉 나와 이 사회의 안녕함을 찾기 위한 노력이란, 자신만이 살아남기 위한 각자도생이나 타인에게 기댄 대리주의 또는 파편화된 분노가 아닌, 이 사회, 자본주의 한국 사회를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하나 된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때때로 그 과정이 지난하고 의미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 심지어 혹자는 그런 과정을 두고 이런저런 말로 폄하하고 곡해하고 왜곡할 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토를 뚫고 올라오는 새싹을 막을 수 없듯이 안녕치 못한 현실에 대해 터져 나오는 물음과 행동을 막을 순 없습니다. 작년 이맘때 한철의 유행이나 설교가 아닌 자기정치를 주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14일, 철도민영화에 반대하는 학내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를 지지한 '서울역나들이' 참가자들의 깃발 모습

ⓒ 이희훈

자기정치의 핵심은 자기해방입니다. 그리고 자기해방은 결코 타인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될 수 없습니다. 정규직을 줄여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걸 대안이라 부를 순 없습니다. 대학에 진학할 인원이 줄어든다고 대학을 줄이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현명한 방법일 순 없습니다. 왜 G20의 경제대국이라 하면서 비정규직만을 양산하는지,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선 삶의 질을 높일 수 없는 사회적 구조는 가만히 둔 채 경쟁을 부추기는지, 또 다른 억압을 통해 각자도생을 부추기는 걸 결코 해방이라 부를 순 없습니다.

최근 한 예능프로에서 나왔듯이 아프면 환자이지, 결코 청춘이라 미화할 순 없습니다. 열정이 있으면 급여가 없어도 되는 게 아니라 일하지 않고도 급여를 가져가는 것이 문제여야 합니다. 공장에 설비가 가득해도 살아 움직이는 노동자 없이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스로의 안녕치 못함을 넘어 모두의 안녕치 못함을 인식하는 것, 그 과정은 결국 모두를 억압하고 있는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와 대안을 설정하는 데 있고 그걸 우리는 '정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정치가 빛을 발해야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나아가 이 사회의 진정한 '안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입니다.이 기사를 응원하는 방법!☞ 자발적 유료 구독 [ 10만인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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