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에서 6년.. 유명 출판사도 다르지 않아"

2014. 9. 1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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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재용 기자]

최근 드러난 유아용 그림책 <구름빵> 작가의 매절계약으로 출판사의 불공정한 계약 관행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출판사의 불합리한 관행은 무명작가의 매절계약뿐만이 아니다. 출판계 비정규직 외주노동자(프리랜서 형태로 일을 하는 편집자, 번역가, 디자이너를 말함)는 상시적으로 저임금, 임금체불, 장시간 노동, 불합리한 업무 지시 등에 시달리고 있다.

'2013년 외주출판노동자 노동실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월 소득 5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는 4.5% 정도지만, 150만 원 미만이 45.9%로 가장 많고, 월 소득 100만 원 미만도 24.1%에 달했다. 종사자의 70%가 월 소득 150만 원 이하의 저임금 상태에 놓인 것이다. 월 25일 이상 노동한다는 비율도 26.3%에 달해 종사자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주출판노동자들은 작업비 수령 지연도 수시로 겪는다. 작업물을 완성해 출판사에 넘기면 결제가 바로 이뤄지지 않고, 짧게는 1~2달 길게는 서너 달이 지연된다. 외주 편집자인 K(32)씨는 "이 과정에서 작업비를 독촉하다가 결국 받지 못해 포기하는 비율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노동의 대가를 정상적으로 받지 못하는 전근대적이고 비상식적인 관행이 출판계에 퍼져 있는 것이다.

대다수 외주출판노동자들은 주로 인맥을 통해 일감을 구한다. 일감의 수급구조가 공식적인 시스템이 아닌 이렇게 사적인 인맥을 통해 이루어지다보니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또한 출판 산업의 불황으로 인한 수익구조의 불안정성, 법제도 미비 등이 불합리한 일들을 은폐하고 유지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휴일 없이 일하지만 월평균 수입은..."

▲ 도서관에서 책에 둘러싸여 독서를 하고 있는 시민.

출판업은 산업의 특성상 공익적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문화예술과 마찬가지로 보호와 지원이 절실한 분야다.

ⓒ 김재용

8년 동안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한 전업 번역가의 사례를 들여다봤다. 이 번역가의 사례는 편집자, 디자이너의 것이기도 하다. 지난 5일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나는 남성이고, 지금 39살 미혼이다. 전업 번역가이다. 지금은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서 사무실을 하나 얻어 일하고 있다. 4년제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외국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독립 번역가의 삶을 꿈꾸며 번역 회사에 등록을 했다. 번역 회사는 번역 의뢰인과 번역가를 연결해 주는 곳이다. 거래처가 아직 없는 초보번역가들이 주로 번역회사를 이용한다.

번역 회사에선 의뢰가 들어오면 소속 번역가에게 샘플을 보내준다. 번역 능력을 검증한다는 명분이다. 번역 회사에서 보내준 샘플을 번역해 의뢰인에게 보내주면 의뢰인이 원하는 번역가를 채택하는 것이다. 번역회사에 보내준 내 샘플이 채택되어 첫 책이 나왔다. 번역 회사에서 수수료를 많이 떼가는 통에 손에 쥔 돈은 적었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책에 인쇄된 내 이름을 보곤 뿌듯했다. 비로소 내가 번역가가 되었구나. 그때부터 번역가의 낭만적인 꿈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리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그 순진한 생각 이면에 감춰진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휴일도 없이 하루 장시간 일을 하지만, 지금 내 월 평균 수입은 100만 원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구조적으로 문제가 많기 때문에 몇몇 스타 번역가 외에는 대체로 형편이 이렇다. 현실성 없는 번역료 단가에 대해선 이제 말하기도 지친다. 그나마 그것을 깎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번역료를 제때 받지 못해 형편이 어려울 때도 비일비재하다.

아직도 번역료가 들어오는 날이면 잠을 편히 못 잔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올까,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서다. 월세 단칸방을 작업실 겸 주거지로 삼은 지도 약 6년이 좀 넘었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여자 친구에게 딱지 맞은 적도 있다. 그나마 나는 미혼이라서 이렇게라도 버티지만 기혼자들은 어떨까? 전업 번역가로 온전하게 가장 역할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수입 얘기하는 건 솔직히 좀 창피하지만, 나는 구조적인 문제가 개선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딱히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모든 것에 욕심이 있는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이 있다. 변역가란, 내가 원하는 장르만을 선택해 번역하고도 고고하게 생계를 이어갈 만큼 품격있는 일이 아니다.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거다.

나는 그렇게 이름 있는 번역자가 아니라서 한 달에 두 권을 번역하지 않으면 생계 자체가 어려울 지경이다. 20권을 번역했다는 나도 이런데, 초보 번역가는 오죽할까.

출판사가 직접 의뢰할 때는 샘플을 따로 번역하지 않고 바로 계약한다. 작업이 끝나고 원고를 보내면 한 달 후에 번역료의 절반을 받는다. 그후 책 출간일 다음 달에 나머지 전액을 받는다. 출판사마다 계약사항이 천차만별이다. 출간 후 번역료를 다 받는 계약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책이 순로롭게 출간이 되었을 때 얘기다. 출간이 1년, 2년씩 미뤄지는 경우에는 나머지 절반의 번역료를 받기 위해서 수개월, 아니 수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 와중에 번역료를 일부 또는 전체 떼이는 경우도 많다. 대개 책 출간에 맞춰 결제가 이뤄지기 때문에 번역가는 계획적인 생활비 지출이 어렵다.

?내가 번역을 마친 뒤 3년 뒤에 책이 나온 적도 있다. 지금도 네다섯 권 정도가 출간이 지연된 실정이다. 그래서 번역가들 중에는 당장 생계를 위해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도 많다. 어떤 동료는 나이 마흔에 새벽 편의점 알바를 한다. 막노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출판사와의 거래는 연줄이 없는 한 맺어지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번역가들이 불합리한 관행을 겪어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혹시 불이익을 당할까봐서다. 출판사의 나쁜 관행은 결제문제 뿐만이 아니다. 사소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번역의 오역을 트집 잡아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한다거나, 무리하게 일정을 짧게 잡아 '몰아치기'를 지시하는 몰상식한 고용주도 많다. 출판사 측의 대리 번역이라는 '사기성 관행'도 없어져야 한다. 이건 신예 작가를 죽이는 일이다. 근데 그걸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모르는 사람은 영세 사업체가 그런 불합리한 관행을 많이 행하리라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출판사들의 어이없는 행태도 적지 않다. <구름빵> 작가의 매절계약 문제? 출판계에서 그건 차라리 양반이다. 책이라는 교양을 다루는 곳에서 정작 교양이 실종된 예는 허다하다. 이게 출판계의 이면이다.

지금 내 주변에서 변역가를 직업으로 봐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냥 다시 직장 다니라는 진지한 조언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나는 좋은 책을 만드는 일에 많은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점점 나아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 지쳐간다."

예술인 위한 사회복지시스템 운영하는 유럽

이런 문제점들은 출판노동자들의 다양한 네트워크 안에서 수시로 고발된다.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의 한 관계자는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는 외주출판노동자는 자본주의의 위기 비용을 전가 받으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거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일은 드물다"고 말했다.

유럽의 경우 예술인을 위한 사회복지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는 일반적인 근로자보다 수급자격을 낮추어 특별실업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독일은 국가와 저작권 사용자가 예술인의 보험료를 절반씩 부담해 이들의 생계를 보호하고 있으며, 네덜란드는 예술인 최저생활보장제도(WIK)를 통해 10년 동안 최대 4년 간 일반복지지원의 70%에 해당하는 보충소득을 지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프리랜서 예술인을 위한 예술인복지법이 2012년에 제정된 이래 지난 8월 17일 개정안이 발효되는 등 조금씩이나마 제도가 개선되고 있다. 하지만 문화예술의 첨병인 책을 만드는 외주출판노동자에 대한 보호와 지원은 여전히 전무한 상태다.

노무사모임의 한 관계자는 "출판업은 산업의 특성상 공익적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문화예술과 마찬가지로 보호와 지원이 절실한 분야"라고 말했다.스마트하게 오마이뉴스를 이용하는 방법!☞ 오마이뉴스 공식 SNS [ 페이스북] [ 트위터]☞ 오마이뉴스 모바일 앱 [ 아이폰] [ 안드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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