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진영 무관심이 '극우 탈북자' 만든다

2014. 9. 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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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탈북자 강룡

▶ 이진순 언론학 박사. 희망제작소 부소장.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하다가 사직하고 귀국해 시민운동 현장에 합류했다. 경험과 논리에 갇히지 않고 즐겁게 소통하고 진화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따뜻한 남쪽 나라”는 더 이상 없다. 1987년 김만철 일가의 귀순은 “자유 대한”의 체제 우월성과 탈북자에 대한 뜨거운 동포애를 상징하는 한 편의 드라마였지만, 탈북 인구가 2만5천명을 넘어서는 이 시대에 탈북자는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굶주림과 학정을 피해 조국의 품으로 달려왔다는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지만, 내게 그들은 여전히 불편한 동거인이다. 애처로운 시선만으로 바라보기에 그들은 정치적으로 너무 맹렬하고, 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엔 너무 안쓰럽다.

한 달 평균임금이 남한 사람의 절반(141만원, 2013년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조사)에 불과하고 자살률은 일반 국민의 세 배(16.3%, 2012년 경찰청 조사)에 이를 만큼 탈북자들의 현실은 참혹하다. 이들을 이렇게 방치하면서 통일을 논하는 건 위선이다. 그러나 극우 종편방송에 나와 대북지원을 극렬반대하고 남한의 “종북세력”을 맹비난하며 이념전의 첨병이 되는 탈북자들을 볼 때면, 도무지 따뜻한 손을 내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가 가진 이 모순된 감정이 혹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아닐까. 마음 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 탈북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며칠간 수소문을 한 끝에 찾아낸 사람이 강룡(37)이다.

강룡은 1977년 원산 태생으로 북한 최고의 교원양성기관인 평양의 김형직사범대학을 다니다가 탈북해서, 중국을 거쳐 2005년 서울에 왔다. 연세대 교육학과로 편입해서 대학원을 다니다가 “법을 몰라 피해를 보는 탈북자를 보호하고 싶어”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연세대 탈북자 동아리 ‘통일한마당’과 남북한 청년이 함께하는 ‘새코리아청년네트워크’의 대표로 활동했고 현재는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8월27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한 시립도서관으로 그를 찾아갔다. 도서관 앞에 도착해 전화를 걸자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을 한 그가 내려왔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이었다.

탈북자들을 위한 프로그램
거의 다 보수단체에서 하더라
하다못해 교통비 쥐여주는 곳 중
진보성향 단체는 하나도 없다
그러다 보면 동화돼 버릴 수밖에

3년 사이 부모님과 여동생 잃고
장사밑천이라도 벌 생각에 탈북
대학원 교육학과 다니다가
법을 몰라 피해 보는 탈북자들
보호하고 싶어 로스쿨 다니는 중

아이 기저귀값 없어도 양심은 안 판다

-종일 도서관에 있는 건가?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아주 심플하다. 아침 8시에 도서관 문 열 때 나와서 밤 11시 문 닫을 때까지 공부하다 간다.”

-로스쿨 공부하는 게 만만치 않은가 보다.

“여기서 태어난 ‘공부기계’ 애들도 힘들다고 휴학하고 자살하는데…. 교육학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성적우수 장학생으로 최고 점수도 받고 하면서 나름 재밌게 공부를 했는데 여기(로스쿨) 오니까 우와, 완전 ‘외국어’다. 같은 한국언데도… 너무 힘들다.”

-지금 몇 학기째인가?

“첫 학기 마치고 일년간 휴학했다. 이번 가을학기가 두번째 학기다.”

-휴학은 왜? 공부하기 힘들어서?

“공부도 힘들지만 등록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마련하고, 고시학원에 다니며 부족한 기초도 보충하려고 했는데 돈벌이든 공부든 “하나에 올인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보니” 돈은 돈대로 안 모이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한다. 이번 학기는 고마운 지인들과 교회의 도움으로 겨우 등록금을 맞췄지만 변호사 시험 준비까지 앞으로 3년을 어떻게 버틸지 난감하다. 강룡에겐 부양해야 할 처자식도 있다. 함경북도 온성 출신의 하나원(탈북자 교육기관) 동기와 2009년 결혼을 해서 슬하에 두 아들을 뒀다. 다섯살짜리 큰애와 첫돌을 앞둔 아기를 돌보느라 부인이 일을 그만둔 상태여서 살림은 더욱 빠듯하다.

-그럼 무슨 돈으로 생활하나?

“그저 닥치는 대로 일하는데, 법률사무소 같은 데서 ‘시다바리’도 하고(웃음) 북한 관련 책을 쓰는 분들 도와서 감수도 하고. 예전엔 북한 관련 강연도 많이 다녔는데 요즘에 잘 안 한다.”

-강연이 시간 대비 수입으론 제일 괜찮은 일거릴 텐데 왜?

“강연은 ‘보내는 측’ 의뢰로 가는 경우가 있고 ‘요청하는 측’ 연락을 받고 가는 경우가 있다. 보내는 측이란, 권력을 갖고 있는 집단… 국정원이나 기무사, 자유총연맹같이 탈북자들을 안보와 관련해서 활용하는 곳인데 (강연료) 액수가 제일 크고. 요청하는 측이란 교회나 엔지오단체, 세미나나 포럼 주최측 같은 곳인데 보수는 앞의 것의 3분의 1 수준이다. 과거에는 보내는 측 일을 많이 했는데, 내 생각과 많이 달라서 이제 그쪽과는 다 끊었고….”

-그럼 수입이 많이 줄었겠다.

“와이프는 그런다. 남들은 국정원 일 못해서 난린데 당신은 왜 연락 와도 안 하느냐고. 차라리 자기라도 하겠으니 소개해 달라고.(웃음)”

-아이 엄마 입장에선 그럴 수 있다. 아기한테 드는 돈은 절약할 방법이 없으니.

“와이프가 기저귀값도 없어서 처음엔 천기저귀 썼다. 이거 참, 괜히 장가가서 고생시키나 생각도 들고.”

-못 이기는 척 부인 말을 따르지 그랬나?

“잘 모르겠지만… 북한에서 온 사람들의 어떤 사명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고 절박하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통일이나 북한에 대한 생각과 너무 상충되니까. 정말 호사할 그런 돈도 아닌데 푼돈에 목숨 거는 게 양심상 꺼려져서….”

-종편방송을 보면 탈북자들이 나와서 북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길 많이 한다. 100% 신뢰할 수 있는 얘기인가?

“내 얘기도 100% 신뢰하면 안 된다.”

-아하!(웃음)

“북한에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다. 본인이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다 죽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건 그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그들이 다른 지역이나 부문에 대해서 말을 하는 건, 추측성이거나 남한 내려와서 들은 얘기가 대부분이다. 내가 강의 다닐 땐 그런 말 많이 한다. 내가 하는 얘길 스스로 필터링해서(걸러서) 들어라. 그리고 한 사람 말만 듣지 말고 크로스체킹(중복확인) 해라. 정말 북한에 관심이 있다면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

-좋다. 북한 사회나 탈북자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려는 당신의 뜻이 곡해되지 않도록 나도 최선을 다하겠다.

“고맙다.”

강룡은 도서관에 남겨두었던 책과 소지품을 챙겨서 다시 내려왔다. 제한시간을 두지 않고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내게 해 달라 부탁했고,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탈북자들은 조선족처럼 못 사냐고?

그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강룡은 원산에서 독립유공자 집안의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일제 때 신포에서 항만파업을 주도하고 노동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닮아, 아버지는 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원산의 수산사업소 지배인(우리로 치면 수산회사 사장)으로 일을 했는데 뇌물이나 물건 빼돌리기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 고지식한 양반으로 유명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95~99년 식량난)에 결국 사무실에서 굶어서 쓰러지셨다. 오랜 영양실조와 과로가 원인이었다.

-지배인인데 월급도 못 받았나?

“그때는 다 끊어지고 본인의 능력으로 먹고살아야 했다. 노동자들은 고깃배가 들어오면 조금씩 고기를 훔쳐서 나가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전혀 그럴 생각을 안 했다.”

한번 쓰러진 아버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98년 강룡의 생일날 세상을 떴다. 강룡의 여동생은 고등중학교(중고교 과정)에서 성적도 빼어나고 사로청 부위원장(학생회 부회장)도 할 만큼 촉망받는 수재였지만, 돈이 없어 대학을 갈 수 없었다.

-북한에서 대학은 무료 아닌가?

“등록금은 없지만 돈이 없으면 다닐 수가 없다. 공부도 먹어야 할 것 아닌가. 집에서 다니면 집에서라도 밥을 먹여야 하는데 집에 먹을 게 없잖은가.”

여동생은 한 입이라도 덜어보자고 군에 자진 입대했다. 표창장을 받아 휴가를 나올 기회가 생겨도 속 깊은 동생은 집에 오지 않았다. 군도 자력갱생한다고 휴가병들이 귀대할 때 휘발유나 물자를 구입해서 가져오라 했는데 궁핍한 집안 형편을 생각해 식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러던 동생이 군 훈련 중에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군병원에서도, 이송된 도병원에서도 속수무책, 시티(CT)가 없어 제대로 된 진단도 치료도 할 수 없었다. 동생은 자꾸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나중엔 제대로 걷지도, 대소변을 가리지도 못했다. 결국 몇 년간 약도 한번 변변히 못 써본 채, 2001년 여동생은 다발성 뇌농양으로 세상을 떴다. 부모보다 먼저 죽은 애들은 3일장이 아니라 24시간 이내에 묻어야 한다고, 관도 없이 이불에 싸서 묻었다. 몇 달 뒤 심장병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있던 어머니도 세상을 떴다. 3년 사이 강룡은 부모님과 여동생을 모두 잃었다.

-그래서 탈북을 결심한 건가? 북한 정권에 회의를 품고?

“그건 아니다. 제일 큰 건 경제적 이유였다. 마침 중국에 있던 어머니 친척이 초청장을 보내왔고 장사 밑천이라도 벌어볼 생각에 탈북을 결심했다. 학교 관두고 원산항에 들어오는 일제 자전거를 내다팔면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제법 잘되었다. 근데 학교 때 정말 찌질이 같은 애들은 장사를 더 잘하고 아예 트럭으로 갖다 팔고….”

-그이들은 어떻게?

“부모가 뇌물 많이 받아서 그런 애들은 밑천이 있었으니까. 나도 돈만 있으면 그 애들 못지않게 할 자신이 있었다. 진작 부모님 살아생전에 그렇게 장사나 할걸 뒤늦게 후회도 했다. 아빠는 무조건 대학 졸업해서 큰일 해야 한다고 하셔서….”

자전거를 팔아 번 돈으로 군인들을 매수해서 국경을 넘었다. 중국 친척집에 머물면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한국 기업주의 신임을 얻어 공장장까지 하게 되었다. 그의 후원으로 한국에 올 때까지도 강룡은 한국에 영구히 머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국 가서 3년만 일해 돈 벌어 다시 중국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왜 한국에 정착한단 생각은 안 했나?

“사회주의에서 30년을 살았는데 약육강식 자본주의에서 못 살 것 같았다. 그리고 중국에 한국 방송이 나오는데 탈북자들이 계속 욕먹는 것 같았다. 사회적응 못 하고 일하기 싫어하고 부담스러운 존재고.”

-실제로 그런 면에서 탈북자와 조선족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겉모습이나 말투론 비슷해 보이니까.

“그런 프레임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다. 조선족들은 여기 와서 3D업종이건 식당이건 열심히 하는데 니들은 왜 한 달을 못 버티느냐고. 첫번째 이유가 조선족들은 여기서 평생 살 사람이 아니다. 몇 년 있다가 갈 사람들이다. 근데 새터민은 평생 살 사람이다. 일하는 자세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조금 돈이 생기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한테 송금하느라 목돈을 못 모은다. 탈북자들이 1년에 북한에 보내는 송금이 천만 달러라고 하더라.”

-천만 달러? 그걸 다 어떻게 보내나?

“알음알음 브로커 통해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일이다. 탈북자들 자신도 정착하지 못한 처지에 북한 식구들 생각하면 죄책감 들고 불쌍하니까.”

-정착을 위한 저금이나 투자는 못 하고….

“거기다가 새터민들은 트라우마가 아주 강한 사람들이다. 나도 수시로 악몽을 꾼다. 건강상의 문제도 많다. 특히 지금 20대 되는 애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영양실조가 된 애들이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병이 많다. 파라티푸스, 장티푸스, 무슨 전염병 앓았던 애들. 실제로 체력이 달려서 오래 근무를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질병관리본부의 통계에 따르면 탈북자들은 신장과 체중이 한국인 평균에 비해 현저히 작고 B형간염이나 결핵, 빈혈 등 유병률도 최대 4배까지 높다. 강룡도 B형간염을 앓고 있다.

북한은 그리 빨리 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탈북자들은 극우세력의 정치적 첨병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은 어떻게 보나?

“탈북자들이 한국에 딱 오면 뭘 좀 배우려는 욕망이 있어서 각종 프로그램을 많이 찾아간다. 돈이 없으니까 무료로 하는 데 어디 없나 해서 찾아보면 다 보수단체에서 하는 거다. 장학금 주는 데도, 하다못해 교통비 쥐여주는 것도 다 보수단체고 진보 성향 단체는 하나도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듣는 얘기마다, 다 보수적인 내용이니…. 나도 처음엔 이 사람들 얘기가 전부구나 생각했다. 대한민국을 빨리 배워야 되겠다. 시간이 지나면 어, 이런 다른 얘기가 있네…. 근데 벌써 여기(보수)에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저기 가기가 쉽지 않은 거다. 탈북자 자신도 문제가 있지만 탈북자 문제에 무관심한 진보진영의 책임도 있다.”

-북한 붕괴를 통한 남한의 흡수통일이 탈북자들의 염원 아닌가?

“다 그런 건 아니다. 탈북자 기성세대는 거의 그렇지만 대학생이나 청년들은 다르다.”

-당신 생각은?

“보수가 얘기하는 통일 방식은 이상주의자들의 얘기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 북한은 빨리 망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북한도 이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다. 김일성 때처럼 한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가 아니다. 북한 정권이 붕괴하려면 붕괴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일반 주민들은 먹고살기가 힘들다 보니 불만이나 반감이 있어도, 어떤 행동을 취해서 변화를 이끌어낼 생각은 하지 못한다.”

-먹고살 만해야 정치적 각성도 가능하다?

“그래서 지금으로선 햇볕정책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우리가 지원해도 군량미로 간다고 하는데 군량미로 가는 거 맞다. 기득권층이 먹는다. 근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대한민국도 예전에 원조물자 받았을 때 그게 다 어디로 갔나? 군량미로 가고 정부와 기득권층으로 먼저 가지 않았나?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원조물자가 군사부문에 먼저 가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구호물품이 들어가면 북한 기득권층이 그걸 현금화하려고 장마당으로 내놓는다. 그럼 서민들이 그걸 사먹을 수 있게 된다. 구호물품이 끊기면 실제로 곡물가격이 폭등한다. 우리가 어떻게 주민들에게 전달을 할 것이냐를 전략적으로 고민해야지, 북에 대한 봉쇄나 압박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주장은 한낱 이상일 뿐이다.”

-북한에서 자라서 남한에서 가정을 꾸리셨다. 당신은 북한 사람인가 남한 사람인가?

“탈북자들이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인데 그런 대립적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새터민들보고 들어가라고 하는 건 사실 ‘폭력’이다. 남북의 경계선에 있는 우리는 그 둘을 모두 포괄하는 ‘한반도인’이다. 남이냐 북이냐가 아니라 한반도인으로 우리를 생각할 때, 그게 바로 통일이다. 새터민은 제일 첫 한반도인, 통일인이라는 자신감을, 탈북자 청소년들이 가졌음 좋겠다.”

통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에게도 통일에 대한 연습이 필요하다. 2만5천명의 탈북자도 끌어안지 못하면서 2500만의 북한 주민을 어떻게 만날까. 탈북자와 소통하고 그들과 함께 한반도인이 되는 것, 거기서 우리의 작은 통일은 시작된다.

녹취 김연지(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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