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보고서 리뷰]'비단공장 취직시켜 준다더니..'

김동선 입력 2014. 9. 6. 09:05 수정 2014. 9. 6. 10:3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생존 피해 할머니 증언①

[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주상돈 기자, 김민영 기자, 김보경 기자] #1. 강일출 '어머니 친구집 숨었다 돌아오니 순사가…'

경상북도 상주에서 12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강일출(86) 할머니는 16세 늦여 름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張春)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당시 마을에는 '처녀공출'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강 할머니는 이를 피하기 위해 어머니 친구 집에 머물기도 했었다. 가족 품이 그리워 다시 집에 돌아온 것이 화근이었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외딴집으로 칼을 찬 일본 순사와 누런 옷을 입은 황군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강 할머니에게 베를 짜는 공장에 가자며 강제로 짐을 싣는 트럭에 태웠다.

1945년 초여름 강 할머니는 독립군의 도움을 받아 어룬춘(鄂倫春)으로 피신했다. 두 번 결혼을 했으나 모두 이혼했다. 22세부터 53세까지 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했다. 1998년 적십자를 통해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1999년 71세의 나이로 영구 귀국해 이듬해 국적을 회복했다. 강 할머니는 현재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2. 곽○○ '국적도 없이 중국서 60년 떠돌 이 생활'

곽○○(89) 할머니는 19세에 동네 뒷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중국 위안소로 끌려갔다.

중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겪은 곽 할머니는 이후 60여년을 중국에서 무국적자로 살아야했다. 곽 할머니가 다시 대한민국 국적을 얻는 것은 2004년. 곽 할머니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56년 만에 국적을 회복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곽 할머니는 광주에 있는 여동생의 집에 머물며 밭에 나가 일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가벼운 치매증상과 허리 종양으로 인한 요통 탓에 전라남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3. 공○○ '비단공장 취직시켜 둔다더니…'

전라남도 무안 출생의 공○○(94) 할머니는 16세이던 1935년 비단 공장에 취직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평양을 거쳐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하이청(海城)의 위안부로 강제동원됐다.

이후 하이청과 상하이(上海), 하얼빈(哈爾濱) 등에서 3년여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 당시 연을 맺은 전라남도 보성 출신 남자와 1945년 전라남도 해남으로 귀국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 미안한 마음에 결국 헤어졌다. 이후 28 세에 공 할머니보다 20세가 더 많은 박모씨와 혼인했다.

34세의 나이에 박씨와 아들을 낳았다. 같은 해 남편 박씨가 죽었다. 이후 공 할머니는 36세에 당골(무당)이 됐다. 1958년 당골하는 남자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하지만 딸은 3년 뒤 물에 빠져 사망했다. 공 할머니는 현재 아들 내외와 손녀들과 함께 전라남도 해남에서 살고 있다.

#4. 길원옥 '13세, 15세때 두번이나 속아 中 위안소로'

1928년 오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길원옥(86) 할머니는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지내다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13살, 15살 두 차례 중국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갔다. 현재 정대협이 운영하는 '평화의 집'에 사는 길 할머니는 매주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있으며, 지난 6월에는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UN) 인권최고대표 사무실에 방문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 중이다. 당뇨와 합병증 때문에 병원에 다니고 있지만, 할머니는 본인이 시력도 좋고 귀도 밝은 편이라고 자부한다. 지난달 31일 할머니는 기자와 만나 일본 정부를 향해 이같이 말했다. "사람이니까 죄를 안 짓고 살 순 없다.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사과하고 인정해야 한다." 

#5. 김○○ '열여덟살에 일본 히로시마로 끌려가'

1926년에 태어나 열여덟 살에 일본 히로시마로 끌려가 5개월을 보냈던 김○○ (88) 할머니. 서울 강서구에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휠체어 없이는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쇠약해진 상태다. 낮에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저녁에는 하릴없이 혼자 침대에서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다리까지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대협 활동가들이 할머니 댁을 방문하는데, 오매불망 그들만 기다릴 정도로 정이 많다. 할머니는 과일을 손수 사다 놓기도 했다고. 활동가들이 올 때가 되면 "보고싶다. 언제 올거냐"며 정대협 사무실에 먼저 전화를 한다고 한다. 

#6. 김○○ '위안소서 비행기 폭격으로 청력 잃어'

1930년생인 김○○(84) 할머니는 경상남도에 살고 있다. 김 할머니는 위안소로 끌려간 후 비행기 폭격으로 청력을 크게 잃었다. 2010년 경남 도ㆍ시ㆍ군의회 의 위안부 결의문과 대국민 탄원엽서를 전달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종종 집 근처에 있는 주민센터에 들러 차도 마시고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무료함을 달랬다. 주민센터 직원은 "직원들 바뀐 것도 꿰고 있을 정도로 정정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에겐 미국에 터를 잡은 딸이 하나 있다. 올해에도 미국에 있는 딸의 집에서 두 달간 있다가 지난달 딸과 동반 입국했다. 딸은 앞으로 1~2년간 할머니를 곁에서 보살필 계획이란다.

#7. 김군자 '하루에 40여명 상대로 성노리개 생활'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군자(88) 할머니는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1942년 우 리 나이로 17살때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 위안소로 강제동원됐다.

해방 후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는 할머니는 "하루에 40여명을 상대로 성 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고 위안소 생활을 기억했다. 2007년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끔찍했던 과거사를 증언했다.

또 할머니는 정부에서 받은 보상금 등을 고스란히 모았다가 자신처럼 부모 없는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써달라며 2000년,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김 할머니는 1998년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8. 김달선 '포항 시장서 인도네시아로 끌려 가'

1925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난 김달선(89) 할머니는 흥해시장에서 일본 순경에 의해 경찰서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인도네시아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약 5년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1946년 봄 무렵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23세쯤 결혼을 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해 남편과 3년 만에 헤어졌다.

현재 김 할머니는 치매 증상과 노환으로 지난해 5월부터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오랫동안 봐온 낯익은 얼굴은 아직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지난 5월 30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관계자들은 이 병원을 찾아 할머니의 조촐한 생일잔치를 열었다. 

#9. 김복동 '14살부터 8년간 고통, 열혈 인권운동가'

경남 양산 출신의 김복동(88) 할머니는 14살에 위안소로 끌려가 8년의 세월을 희생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인권운동가다. 2년 전 할머니는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으면 전쟁 피해 여성을 돕겠다"고 선언하고, 일명 '나비기금'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재일조선학교를 지원하는 후원금도 내놨다. 할머니는 왼쪽 눈을 실명했고, 최근 오른쪽 눈도 시력이 악화돼 병원 진료를 받고 있다. 요즘 수요집회 때마다 선글라스를 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달 31일 만난 김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제대로 되는 게 하 나도 없다. 앵무새처럼 맨날 똑같은 말만 하니 입이 아플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왕 칼을 뺏으니 끝을 봐야지"라고 말을 이었다.

#10. 김복득 '미안합니다…죽기 전에 그 한 마디 들었으면"

김복득(96) 할머니는 1918년 한산도 제승당이 내다보이는 통영에서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12살 때 아버지를 여읜 할머니는 22살 되던 해 '넓은 세상에서 돈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로 강제동원됐다. 집 떠난 지 7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김 할머니는 학술대회에서 수차례 증언하는 등 위안부 피해자 활동에 적극적이다. 2011년 2000만원의 장학금을 기부한 데 이어 지난해 11월엔 위안부 역사관 건립하는 데 쓰라며 200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일본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수십번은 더 들었을 질문, 대답은 한결같다. 1994년 피해자등록을 한 이후 줄기차게 주장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것. "내한테 마 사과만 하면 되지 . 내 죽기 전에 사과만 해서 나한테 미안타고 그것만 하면 돼. 더는 묻지마라."

▶'위안 부 보고서 55' 온라인 스토리뷰 보러가기: http://story.asiae.co.kr/comfortwomen/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주상돈 기자 don@asiae.co.kr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