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라는 이름의 '깡패'?

허은선 기자 2014. 8. 1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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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하여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대가 없이 내놓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한 '기부'의 뜻이다. 그렇다면 요즘 여기저기서 들리는 재능기부의 뜻은 무엇일까. 이 '신조어'의 뜻은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은 재능기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개인이 가진 재능을 개인의 이익이나 기술 개발에만 사용하지 않고 이를 활용해 사회에 기여하는 새로운 기부 형태."

재능기부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한창이다. '기부'라는 용어가 들어가 있는 만큼 '재능기부'는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난한 '재능기부자'가 자신보다 훨씬 사정이 나은 '특정 기업이나 단체 등에 기여'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잦다. 기업이나 단체가 재능기부자를 모집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기업이나 단체가 재능을 기부할 사람과 기부받을 사람을 찾아 둘 사이를 연결(중개)해주는 경우다. 기업·단체는 재능기부자에게 재능기부 증명서를 발급해주거나 약간의 실비(도저히 '대가'라고는 할 수 없는)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해당 기업·단체 역시 재능기부자와 마찬가지로 금전적 이익을 얻지는 못하므로, 자신들도 사회공헌 활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이것이 전부일까. 해당 기업·단체는 금전적 이익 대신 '재능기부를 실천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얻는다. 재능을 기부받은 당사자들도 기부자보다는 해당 기업·단체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연합뉴스 벽화 동아리 소속 대학생들이 재능기부의 일환으로 경북 예천군 곤충생태원 진입로 주변의 옹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두 번째는, 해당 기업·단체에 재능을 기부할 사람을 찾는 경우다. 이에 대해서는 '인건비 절감을 위해 재능을 갈취한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첫 번째 경우의 기업·단체는 간접적 이익(이미지 제고)을 취득하는 데 불과하지만, 이 경우에는 직접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정민호씨(가명·30)는 최근 한국 시민사회단체들이 재능기부라는 명목으로 인건비를 아끼려는 행태가 있다고 토로한다. "행사 기획 단계에서 인건비 이야기가 나오면 '이 부분은 재능기부로 충당하자'는 제안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좋은 일에 쓰겠다며 글 써달라, 그림 그려달라는 부탁을 다들 너무 쉽게 한다. 하지만 '돈을 얼마 못 드립니다'와 '재능 좀 기부해라'는 엄연히 다르다. 이것은 노동의 인식에 대한 문제다."

재능기부에 대한 논란이 거센 분야는 아무래도 예술계다. 예술 분야의 재능을 기부받고 싶어하는 곳이 많고, 기본적인 생계 유지도 어려운 예술인이 많다. 둘을 종합하면, 안 그래도 먹고살기 어려운 예술인들에게 재능을 기부하라고 요청하는 사업자나 단체가 많다는 이야기다.

재능기부와 관련된 예술계 종사자들의 증언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재능기부 유경험자 중에는 기부를 자발적으로 하기보다 반강제로 한 경우가 더 많았다. 기부 요청자와 예술계 종사자의 대화는 주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흘러간다. "여보세요. 님이시죠." "예, 맞는데요. 누구세요?" "님께 그림(글, 사진, 일러스트, 캘리그래피) 좀 부탁드리려고요." "보수가 어떻게 되나요." "죄송하지만 저희가 돈이 없어서요. 재능기부 좀 해주셨으면 해요."

이 단계에서 예술가는 본인의 재능을 기부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만일 예술가가 재능기부 요청을 거절할 때, 대화는 둘 중 하나로 이어진다. "예, 알겠습니다"라며 상대가 전화를 끊으면 다행이지만, "다 '좋은 일' 하자는 건데요. 돈이 전부는 아니잖아요"라며 도리어 상대가 언짢아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시사IN 이명익 서울시는 서울시장 취임식(위)을 준비하면서 재능기부자를 모집해 치르는 '비용 제로 취임식'을 선언해 논란을 빚었다.

재능기부를 요구하는 쪽의 '좋은 일'이 정말 좋은 일일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 이른바 '윈-윈 거래'를 내세운 '보수 없는 구인 요청'이 재능기부자 모집 공고로 둔갑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 7월 말, 영화계 정보 공유 사이트 필름메이커스(이하 필커) 게시판에서도 재능기부를 둘러싼 논쟁이 전개됐다. '재능기부라는 허울 좋은 명목 아래 재능을 갈취하지 말라. 하다못해 5만원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일부 구직자들과 '재능기부를 반대하는 배우는 돈을 밝히는 배우다. 그런 배우는 우리도 필요없다'는 일부 제작자들의 의견이 맞섰다.

이 게시판 논란을 지켜본 배우 지망생 김누리씨(가명·23)는 "재능기부는 재능이 있는 사람한테 바라야지 왜 연기 지망생한테 바라나. 제작자가 돈이 없으면 배우 지망생은 돈이 더 없는 거다"라면서 재능기부가 재능 갈취로 악용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이어서 김씨는 "무보수라도 작품이나 시놉시스가 괜찮다면 출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을 뽑는 쪽에서 재능기부를 바라는 게 당연해진 현실에 화가 난다. '우리 작품 할 건데 배우 섭외할 돈은 없거든. 너네는 뭐 스타도 아니고. 하고 싶으면 와.' 이런 느낌이랄까. 이걸 누군가가 끊어주지 않으면 나중엔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연기자가 이상해지는 사회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필름메이커스' 게시판에서 재능기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비용 제로' 취임식이 가능했던 이유

재능기부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 7월1일 치러진 제36대 서울시장 취임식에서도 벌어졌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비용 제로' 취임식을 치러 화제를 모았다.

서울시는 6월20~30일 서울시 홈페이지 등을 통해 서울시장 취임식 재능기부자를 모집했다. 재능기부자를 모집한 배경에 대해 서울시는 "'시민은 시장'이라는 서울시정의 기치가 제대로 지켜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어 서울시는 "이번 취임식은 시민이 주인이 된,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취임식으로 진행했다. 행사장 안내를 희망한 7명을 포함해 총 18명의 시민이 재능기부 신청을 해주셨다. 이 중 11명을 선정해 사회, 애국가 반주 및 안내봉사에 참여토록 하였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부 예술인들은 서울시의 이같은 '무료 취임식'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안 그래도 재능기부를 당연시하는 문화 때문에 힘든데 모범을 보여야 할 지자체까지 재능기부로 행사를 치르면 어떡하느냐는 불만이 주를 이뤘다.

서울시 취임식을 두고 '어떻게 아꼈는가'보다 '어디다 얼마나 썼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취임식을 하루 앞둔 6월30일, 진보 성향 인터넷 매체인 레디앙(redian.org)에는 '재능기부 혹은 노동 착취'라는 글이 올라왔다. 레디앙은 '문어'라는 필자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의 동의 아래 게재했다.

문어는 이 글에서 "세금을 '쓰는' 일이 본업인 지자체가 스스로 재능기부 받는 일을 당연시하는 것은 아무래도 떨떠름한 모습"이라고 지적하면서 "취임식 예산을 아끼면 실제로 서울시의 사회적 취약 계층에게 그 이익이 돌아갈 것인가? 워낙 방만한 지자체들이 많다 보니 '예산을 아낀다'는 것이 마치 일종의 절대선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그렇게 아낀 예산을 실제로 어디다 썼는가 하는 것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서울시는 '지자체가 재능기부를 받는 것이 타당한가'를 묻는 < 시사IN > 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재능기부의 제1의 원칙은 자발적 참여다. (중략) 예술인들의 재능기부는 시가 일방적으로 기여를 받는 차원을 넘어 예술인에게는 폭넓은 공연 기회를, 시민에게는 좀 더 풍성한 문화공연을 제공한다. 예술인과 시민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상생, 윈-윈의 의미도 담겨 있다. 단, 예술가의 창작 과정과 그 결과물에 대한 최소한의 보장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서울시의 기본 방침이다."

서울시장 취임식 재능기부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한 가지 더 있다. 행사장 안내 자원봉사자도 재능기부자로 간주된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흔히 재능기부와 자원봉사를 분류해서 이야기하지만 재능기부는 사실상 자원봉사의 한 종류다. 즉, (재능기부는) 자원봉사 중에서도 시민 개인이 가진 전문성을 좀 더 강조한, 일종의 전문 영역의 자원봉사로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재능기부를 제안하려면 이렇게 하라

평소 영상 촬영과 관련된 재능기부 요청을 많이 받는 임기웅 감독은 지난 5월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당신이 재능기부나 봉사를 제안할 때 알아야 할 것들'이라는 글을 올렸다. 임 감독은 봉사는 어차피 자원하는 것 아니냐면서 '자원봉사' 대신 '봉사'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운동 플랜B 홈페이지(nowplanb.kr)에도 게재된 이 글에는 1000명이 넘는 독자가 '좋아요'를 눌렀다.

임기웅 감독은 이 글에서 10가지 원칙을 제안했다. 10가지 원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초면부터 재능기부를 요구하지 마라. △기부자가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은 되도록 재능기부로 요구하지 마라. △재능기부나 봉사를 권했을 때 상대가 머뭇거린다면 다른 이를 알아보라. 상대가 곤란하다는 뜻이다. △재능기부나 봉사가 필요하면 되도록 공고 형식으로 알려라. 자발적으로 기부자가 직접 움직이는 게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재능기부를 요구하면서 '허세'를 부리지 마라. 차라리 돈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진정성 있어 보인다. △차비 정도는 지급해라. △식사는 꼭 챙겨줘야 한다. △자원봉사자를 '자봉'이라고 성의 없이 줄임말로 부르지 마라. 차라리 '봉사자'라고 해라. △기부자·봉사자에겐 책임의 의무가 없다. 책임이 필요한 일에는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지급해라. △나중에라도 '보상'이 될 만한 대형 프로젝트가 생기면 재능기부자에게 맡겨라. 무급으로 기부·봉사 시키다가 제대로 큰돈 쓸 때 업체에 맡기는 경우를 보면 허탈하다.

허은선 기자 / alle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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