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권리냐, 삭제권이냐

2014. 6. 19. 13: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21] [기획2] 유럽사법재판소 '잊혀질 권리' 인정 판결 이어 국내도 논의 본격화…

표현의 자유와 충돌 등 논점 다양

생각해보자. 지금 이 순간, 문창극 총리 후보자에게 '잊혀질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란?

국내 대표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문창극'이라는 이름을 넣어보자. 관련 검색어로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 '문창극 망언' '문창극 일본' 등이 이어진다. 그뿐만 아니다. 현재 '뜨거운 감자'인 문 후보자의 교회 강연 동영상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총리로 지명되기 전까지만 해도 쉽게 나타나지 않던 자료들이다. 그런데 만약 문 후보자가 총리로 지명받기 전,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며 이런 자료의 포털 검색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다면, '자질 논란'에 대한 보도가 이어질 수 있었을까.

문창극 후보자가 관련 검색어를 지워달라면?

이러한 논쟁에 기름을 끼얹은 유럽사법재판소(ECJ)의 이른바 '곤살레스 사건' 판결로 국내에서도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가 달아오르고 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지난 5월13일, 16년 전 스페인 신문 < 라 방과르디아 > 에 나온 파산으로 집을 공매에 내놓게 됐다는 기사의 검색 결과를 '구글 스페인'(google.es)에서 지워달라는 소송을 낸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하 곤살레스의 손을 들어줬다. 잊혀질 권리 논의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한 이번 판결의 등장으로 국내에서도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이에 맞춰 방송통신위원회는 6월16일 '온라인 개인정보보호 콘퍼런스'를 열고 각계 전문가와 함께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 여부와 실제 적용에 대한 논의를 한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해 2월에는 잊혀질 권리와 관련한 법률개정안이 등장했지만 논란의 소지가 많아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노근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저작권법·정보통신망법의 일부개정법률안은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용자가 온라인 서비스 업체에 자신의 저작물 삭제를 요청할 수 있고, 이를 요청받은 서비스 제공자는 확인 절차를 거쳐 즉시 삭제토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밖에 이미 국내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각종 동영상 등 인터넷에 노출된 자료를 찾아 삭제 요청을 대행해주는 이른바 '디지털 장의사' 업체도 존재한다.

사실 잊혀질 권리는 정보의 주체가 인터넷상에서 자신과 관련한 정보에 대해 삭제나 확산 방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국내에서는 특정 인물을 겨냥한 이른바 '네티즌 수사대'의 신상털기 등의 부작용에 대한 해결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잊혀질 권리에 대한 해석이 복잡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가장 큰 문제로 '잊혀질 권리=모든 개인정보의 삭제 권리'로 과도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현재 국내에서도 지난 몇 년 동안 잊혀질 권리의 범위에 대한 개념 정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를 들어 세상을 떠난 이가 온라인상에 남겨놓은 '디지털 유산'과 개인정보에 대한 자기결정권, 기사나 게시물에 대한 삭제 요구권, 정부를 상대로 하는 공공기록물 삭제 요구권 등으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만 봐도 희생자와 유가족, 그들의 지인에게 모두 잊혀질 권리에 대한 개념은 다를 수 있다. 사고 당사자들에게는 언론의 속보 경쟁으로 확산된 사진·동영상·개인정보 등이 인터넷상에 남아 있는 문제, 그리고 주변 지인들의 경우 인터넷 등으로 '안산' '단원고'를 검색하면 '단원고 학생' '단원고 2학년' '세월' '단원고 교감' 등이 함께 검색되는 점 등을 보면 말이다.

"원인 정보 삭제에 못지않은 검열 효과"

잊혀질 권리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악용 가능성'에 대한 꼼꼼한 분석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지난 6월9일 사단법인 오픈넷이 서울 역삼동 디캠프에서 연 '인터넷의 자유와 개인정보보호' 토론회에서도 이런 지적이 나왔다. 이날 토론회에서 최경진 가천대 법대 교수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알 권리에 대한 제한이 가능한 상황이며,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도 기존에 나왔던 판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재확인하는 정도로 봐야 한다. 끊임없이 논란이 돼온 잊혀질 권리에 대해 더 명시화한 판례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판결 내용이 잊혀질 권리의 범위를 확장하는 식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유럽 판례의 잘못된 해석이 표현의 자유를 침범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쳤다. 그는 "개인정보라 할지라도 공익을 증명하지 못하면 삭제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는 여태까지의 흐름을 돌려놓는 결과를 낳는다. 비록 검색 결과를 배제하라는 결정이지만, 원인 정보 삭제에 못지않은 검열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유럽사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 효과를 생각해야 한다. 가능성을 저울질한다고 했을 때 포털 등이 그냥 두기보다 삭제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공인에 대해서는 국민이 알 권리가 있지만 일반인(사인)에 대해서까지 진실을 모두 알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나오지만, 이를 판단하는 몫은 개인에게 맡겨야 표현의 자유가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 포털 사이트에서는 게시물 중단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네이버는 게시물이 명예훼손이나 저작권·초상권·사생활 침해에 해당되는 경우, 게시물 게재를 30일 동안 중단하는 '게시 중단 요청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다음은 권리침해 신고 중 명예훼손 신고를 통해 문제가 되는 게시물을 30일 동안 차단한다. 그러나 그 뒤에도 게시물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경우 법원 등에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윤종수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국내에서 잊혀질 권리는 개인정보 삭제권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에는 삭제권에 대한 근거가 구체적이지 않아 이미 어마어마하게 센 삭제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6월10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연 '정보인권 포럼'에서 잊혀질 권리에 관한 토론회에 나온 이민영 가톨릭대 법학과 교수도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개인정보에 있어 정보 주체의 '잊혀질 권리' 보장에 관한 논의는 우리나라의 경우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보호 차원에서 적정 규제의 선을 넘지 않는 수위에서 어느 정도 구현돼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규율 내용에서는 현행 법제와 비교해볼 때, 유럽연합(EU) 규정의 잊혀질 권리가 그대로 원용돼 반영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국내서 잊혀질 권리는 어느 정도 구현 중

"최근까지 기억은 적어도 망각보다 훨씬 어려운 과정이었다. 이런 사실은 인간이 과연 가능한 모든 것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이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서 벗어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렇지 않다."(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의 < 잊혀질 권리 > 중)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가 출발선에 섰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공식 SNS [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구독신청 [한겨레21][한겨레신문]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