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후보자 매수 공작'사건, 단순 전달자 넘어 직접 모의 나서
[한겨레] 한나라당 지도부에 자금 전달 제안
이인제 직접 만나 입당 타진
공천 미끼로 삼았다는 진술도
"대선 개입 국정원 바꾸겠나" 비판
이병기(67) 국정원장 후보자가 2002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핵심 측근으로서 불법 자금 제공을 모의하는 등 불법 대선자금의 '단순 전달자' 이상의 역할을 한 행적이 법원 판결문에서 확인됐다. 엄격한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되는 정보기관의 수장이 되기엔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12일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사건 판결문들을 보니, 이 후보자는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정치특보로서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뒤 탈당 여부를 고민하던 이인제 의원을 한나라당으로 끌어들이려고 적극 나섰다. 이 의원의 공보특보이던 김윤수씨의 1심 판결문을 보면, "이병기가 한나라당 선대본부장인 김영일에게 이인제가 민주당을 탈당할 경우 한나라당 지지를 부탁하면 충청권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말을 했고, 이에 김영일이 이병기에게 이인제를 지원해 한나라당을 돕도록 제안하면서 돈을 주자고 했다"고 명시돼 있다.
이 후보자는 이 의원을 직접 만나 입당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김윤수 특보를 통해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이 의원의 1심 판결문에는 이 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판결문에는 "(이 의원이) 2002년 11월 말경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할 움직임을 보이던 중,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정치특보인 전 안기부 2차장 이병기로부터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면 한나라당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돼 있다.
이 의원이 2002년 12월3일 민주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하자 이 후보자는 김 특보에게 5억원을 건네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의원의 항소심 판결문에는 "이병기는 2002년 12월 초순께 라마다르네상스호텔 지하주차장에서 김윤수를 만나 현금 2억5000만원이 든 상자 2개 합계 5억원을 건넸으며, 당에서 가져온 돈이니 이인제 의원한테 전달해 이회창 후보 지원유세를 하는 데 경비로 사용하라고 말했다"고 적시돼 있다. 이 판결문에는 김 특보의 진술이 나오는데, 이 후보자가 공천을 미끼로 삼았다는 내용도 있다. "돈 상자 2개를 옮겨 실은 뒤 이병기와 호텔 2층 커피숍에서 이야기하면서, '이회창 후보 지원유세를 잘해서 당선되도록 해라, 이회창 총재가 당선되면 꼭 공천이 되도록 해주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대선 뒤에도 이 후보자는 검찰 수사에 대비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의원의 판결문을 보면 "김윤수 특보가 검찰에 긴급체포되기 1주일 전쯤(2004년 3월 무렵) 이병기로부터 이 사건 수사가 개시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돼 있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당시엔 이 후보자를 단순 전달자로 판단해 기소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판결문에 드러난 사실과 정황을 보면 '단순 전달자'의 역할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박주민 변호사는 "특정 정치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실정법을 어길 수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미 드러났다. 이 후보자는 증거 조작과 대선 개입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는 위기에 처한 국정원을 개혁할 수 있는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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