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네 상상력 너머에 있다

2014. 3. 7. 15: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21] [마이너리티 리포트] '장애인-트랜스젠더'를 상상 못하는 사회현실 속 소수성의 존재 양상은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장애인 학교에 다니는 한 학생은 평소 똑똑하고 행동이 얌전해 학교 관계자에게서 칭찬을 듣는다고 했다(학교 관계자의 '얌전하다'라는 평가가 마냥 좋은 의미는 아니다). 학교 관계자가 그 학생과 지내며 겪는 어려움은 적은 편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학교 관계자가 주장하는 '어려움' 혹은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을 여성이라고 얘기하며 여자화장실을 사용하겠다는 학생의 요구가 학교 관계자가 주장하는 '어려움'이다. 그 학생은 태어났을 때 남자로 지정받았고 가족과 타인에 의해 남자아이로 양육됐다. 학교엔 남학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그 학생은 스스로를 여자로 인식하기에 여자화장실을 이용하고 여성용 복장을 입기 원한다.

소수자에 대한 경직된 상상

전해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학교 관계자는 이 학생의 언행을 보고서 이 학생이 장애인이면서 트랜스젠더라고 이해하지는 않은 듯하다. 대신 학교 관계자는 이 학생을 아직 젠더 규범을 "제대로 습득 못한" "미숙한" 장애남성으로 인식하는 편이라고 했다. 이 학생은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또 그렇게 설명하기에 학교 역시 자신을 여성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학교 관계자는 학생의 요구를 수신하지 않았다. 수신을 못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다고 장애인은 지적 수준이나 인지능력이 떨어진다는 식의 그릇된 사회적 편견이 장애인 학교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짐작일 뿐이지만(혹은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장애인 학교에선 사회적 통념이 다른 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럼에도 학교 관계자에게 그 학생은 트랜스장애여성이 아니라 그저 규범적 이원 젠더 질서, 즉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로 일평생을 살아야 하고, 여자라면 이러이러해야 하고 남자라면 저러저러해야 한다는 사회적 맹신을 '제대로' 인식 못하는 장애남학생이다.

학교 관계자가 트랜스장애여성을 대하는 이런 태도는 특이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사회에선 만연하고 일반적인 태도다. 우리 사회의 주된 상상력에서 '소수자'의 형상은 단 한 가지만 예외고 나머지는 다 규범에 부합하는 모습이다. 장애인이라면 장애는 있지만 이성애자고 비트랜스젠더다. 바이라면 애인이나 파트너의 젠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비장애인이고 비트랜스젠더다. 트랜스젠더라면 그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자신의 젠더로 받아들이지 않는 점만 '다를' 뿐 이성애자고 비장애인이다. 이 사회가 요구하고 또 상상하는 '소수자'는 다른 모든 점은 규범에 부합하는데 단지 딱 한 가지만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으로 상상된다. 이런 상상력은 장애인의 삶,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LGBT(레즈비언·게이·바이·트랜스젠더)의 삶을 제한된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나라고 해서 제한된 상상력의 예외가 아니다. 몇 년 전 나는 장애여성 단체에서 처음으로 트랜스젠더 이슈로 강의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기본 내용을 설명했고, 몸과 젠더의 다양한 실천 방식을 얘기했다. 하지만 얘기하는 과정에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중엔 말을 꺼내는 것도 어려웠고 약간의 현기증도 느꼈다. 지금까지도 그때 왜 그렇게 강의했을까, 반성한다. 강의 때 심각한 장애 혐오 혹은 비하 발화를 했던 것은 아니다. 강의를 하면서, 트랜스젠더 이론을 설명하는 나의 언어가 철저하게 비장애 몸을 밑절미 삼고 있음을 깨달았다. 장애단체에서 비장애인의 몸을 중심으로 이야기함이 어떤 의미인지, 당시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내 삶에, 내 강의에 그리고 내 상상력에 존재하는 트랜스젠더는 거의 언제나 비장애인의 몸이었다. 많은 사람이 여성이나 남성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 비장애-이성애-비트랜스젠더인 것처럼. 여성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여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하리수씨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극히 드물듯, 내가 트랜스젠더란 말을 사용할 때 나는 장애-트랜스젠더를 상상하지 않았다. 나 역시 장애와 트랜스젠더, 장애와 LGBT를 별개의 존재로 상상하고 있었다.

모든 트랜스젠더가 이성애자는 아니다

이런 식의 상상력은 (아직은) 비장애인으로 분류되는 나 자신의 삶도 설명하기 힘들게 한다. 앞서 적었듯 이 사회에서 유통되는 이미지로서 트랜스젠더는 언제나 이성애자다. 하지만 나 자신을 비롯한 많은 트랜스젠더가 바이/양성애자거나 동성애자다. 모든 트랜스젠더를 이성애자라고 가정하는 상상력에서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는 때때로 자신이 바이거나 동성애자여도 괜찮은지 고민한다. 트랜스젠더 온라인 게시판엔 자신이 이성애자가 아님을 고민하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그리고 '나도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다'란 댓글이 여럿 달린다. 트랜스젠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비이성애자란 점은 그저 삶의 다양한 양상 중 하나다. 비슷하게 나는 내가 레즈비언이면서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란 이유로 갈등한 적이 없다. 이것은 내게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를 이성애자로만 가정하는 인식론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란 점 자체가 삶의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모든 트랜스젠더는 이성애자여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 혹은 강압,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비트랜스젠더여야 한다는 이 사회의 광기가 문제를 일으키고 삶의 갈등을 야기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얘기한 장애트랜스여성의 경험으로 돌아가자. 아마도 그 학생에게 자신의 장애와 트랜스젠더란 범주는 그 자체로 어떤 갈등을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갈등으로 이해하는 사회적 인식과 상상력이 개인의 몸을 전쟁터로, 갈등의 진원지로 만든다(이 말이, 개인이 겪는 또 다른 어떤 갈등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장애트랜스젠더와 비장애트랜스젠더가 동일한 방식으로 젠더를 겪진 않는다. 자신의 젠더 고민이 장애의 한 '증상'으로 이해되면서 완전히 무시되는 경험은 비장애트랜스젠더가 겪지 않는 지점이다. 즉 인간을 이해하거나 인식할 때 장애를 주요 축으로 삼는 사회에서 우리는 장애인 아니면 비장애인으로 분류되고, 이 분류에 따라 삶의 의미도 다르게 해석된다.

제한된 상상력으로 현실을 재단 말라

우리의 삶이 이렇게 다양한 층위로 직조됐음을 이해한다면, 삶을 설명하는 방식 역시 매우 복잡해야 하고 개개인의 삶을 더욱 조밀하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삶을 타인이 살아간다고 해서 타인이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빈약한 상상력이 문제다. 그러니 나의 상상력과 이해 수준으로 타인을 재단할 것이 아니라 타인이 살아가는 삶으로 나의 인식 수준과 상상력을 바꿔나가야 한다.

루인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이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이브리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공식 SNS [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구독신청 [한겨레21][한겨레신문]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