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애자, 성욕의 신화와 싸우는 소수자들

2014. 2. 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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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특집1] 동성이든 이성이든 어떤 상대에게도 성적 이끌림 못 느껴성욕의 보편성 부인하는 그들, 성애지상주의 사회의 진정제 될까

끝내 다가서지 못한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은 < 신곡 > 의 시인 단테에게 위대한 영감이었다. 정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플라토닉 러브'는 고대 그리스 이후 인류 역사에서 늘 육체적 사랑인 '에로스'보다 품격 있는 감정으로 여겨져왔다. 비교적 최근까지 정욕은 낭만적 사랑의 필수조건이 아니었다.

위상이 뒤바뀐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다. 잉여 생산이 늘어나자 섹스와 번식이 분리됐다. 갑자기 '행복한 섹스'가 건강한 삶과 사랑의 기준이 되었다. 욕망이 미덕이 된 시대에 욕망하지 않는 이들은 종종 '미완' 또는 '저개발'의 존재로 간주됐다. 현대 의학은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정교하게 가르기 시작했다. 성적 욕망의 적정량을 확보하지 못한 이들이 '정신장애'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성적 욕망은 정말 인간의 '원초적 본능'일까. 성욕이 없거나 약한 것은 치료해야 할 정신장애이거나 미성숙의 증거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나타난 이들이 있다. 섹스 없이 행복한 삶을 꿈꾸는 '무성애자'(에이섹슈얼·Asexual)들이다. 무성애자들은 동성이나 이성, 어떤 상대에게도 스스로 주체가 돼 성적 이끌림을 경험하지 않는다. 2001년부터 '커밍아웃'을 시작한 서구의 무성애자 커뮤니티는 이미 수만 명 규모를 이루며 성소수자의 정의를 다시 내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무성애를 통해 스스로를 찾아가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무성애를 심층적으로 다룬 책 < 무성애를 말하다 > 가 지난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무성애자를 위한 온라인 카페가 2009년 개설돼 1천여 명의 회원이 모였다. 트위터에선 에이섹슈얼봇(@asexual_bot)이 1700여 명의 팔로어에게 무성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 한겨레21 > 은 스스로 '무성애자'로 정체화하는 이들을 만났다. _편집자

'성'(性)은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성(城)이었다. 누군가를 짝사랑하거나 동경해도 성적으로 끌리진 않았다. 소녀 시절, 친구들도 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스물한 살, 설레던 첫 연애를 상처로 끝낸 뒤에야 백연우(24)씨는 사랑에 다가서는 자신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연우씨는 '섹스'가 결코 자기 삶의 일부가 될 수 없음을 확신했다. 성적 충동은 그의 상상력 바깥에 있었다. 남자친구는 말했다. "그건 네가 연애를 처음 해봐서 뭘 모르는 거야."

그녀에게 性은 거대한 城이었다

그가 '성'을 두 사람의 관계에 들여놓으려 할 때마다 연우씨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많이 다퉜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공유하는데, 유독 자신만 상상하기 힘든 그 벽을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불안하고, 난 뭐가 다른 건지 고민스러웠죠." 나중에 그는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찾아냈다. "에이섹슈얼(무성애자)이요."

지난 2월12일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심리학을 전공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차분하게 '커밍아웃'을 해왔다. 성적 욕망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감각마저 무딘 것은 아니다. 벚꽃빛으로 공들여 화장한 눈, 코발트빛으로 맞춘 가방과 스웨터는 그의 감각의 풍요로움을 짐작하게 했다.

연우씨는 매스미디어에 자신이 무성애자임을 고백한 첫 한국인일지 모른다. 무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은 그에겐 아주 소중한 것처럼 보였다. "그 말을 알기 전엔 스스로 정리가 안 됐어요. 그 말을 접하는 순간부터 제 경험에 대해 체계적으로 생각해나가게 됐죠."

무성애자는 일반적으로 '성적인 끌림을 지속적으로 느끼지 않는 이들'을 뜻한다. 경험은 개인마다 다르다. 어떤 무성애자들은 성을 혐오하고 낭만적 감정으로서의 사랑도 경험하지 않는다. 어떤 무성애자들은 낭만적 감정으로서의 사랑을 느끼지만 그 대상에 성적으로 매혹되진 않는다. 누군가는 물리적인 성욕을 갖지만 특정한 대상과의 성관계를 원치 않는다.

연우씨는 무성애자이지만 '흔한 연애 감정'은 경험한다. 남성과 여성을 두루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판로맨틱 에이섹슈얼'(Panromantic Asexual·범성애적 무성애자)이라고 규정한다. 연애와 섹스를 동일시하지 않을 뿐이다. "설레고, 생각나고, 같이 있고 싶고, 좀더 알고 싶고, 그런 감정들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느끼는 것과는 다르게 느끼는 것"이 연애 감정이라면 말이다. 무성애자임을 자각한 뒤엔, 연애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신중해졌다. "누군가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껴도, 그 사람이 '유성애자'인 걸 느끼면 결코 가까이할 수 없어요. 상대방이 유성애자인 경우 적당히 타협하는 에이섹슈얼들도 있는데, 전 그냥 포기해요."

'성적 트라우마'를 의심하던 친구들

인간은 누구나 확고한 성적 욕망을 갖고 있다는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 무성애를 말하다 > 의 저자 앤서니 보개트의 설문조사(2004년) 결과를 보면, 영국인의 1.05%는 '동성과 이성 모두에게 성적인 이끌림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국제 성의학계에서도 무성애는 동성애나 이성애처럼 하나의 섹슈얼리티 범주로 자리잡는 중이다. 물론 무성애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성적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면 많은 이들은 주로 사회적 원인이 있을 거라 추측한다.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라거나 성적 트라우마를 갖고 있을 거라는 추론이다. 무성애자들은 후천적 요인에 따라 성적 욕망을 잃은 경우는 무성애로 봐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연우씨는 무성애자이지만 '흔한 연애 감정'은 경험한다. 남성과 여성을 두루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범성애적 무성애자라고 규정한다. 연애와 섹스를 동일시하지 않을 뿐이다.

무성애가 선천적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과학적 연구도 있다. 미국 양 연구소의 연구자들이 숫양들의 생산성을 늘리기 위해 2년 동안 실험한 결과다. 연구자들은 숫양과 발정기의 암양 두 마리, 숫양 두 마리를 일정 시간 함께 있도록 한 뒤 숫양 584마리의 '성적 취향'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절반 수준인 56%의 숫양만이 암양과 교미했다. 양들 가운데 9%는 숫양에게 반응을 보였고 12%는 어떤 성적인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기에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적어도 이성을 대상으로 한 성욕이 자연계의 절대 법칙은 아님을 확인한 셈이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무성애의 원인을 따지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견해도 있다.

오정민(32·가명)씨는 '사랑하는' 무성애자다. 무성애자라는 그녀와의 인터뷰에서 정작 가장 많이 나눈 대화 주제는 연애였다. 정민씨는 "인터넷상 분류로 '바이로맨틱 에이섹슈얼'(Bisexual Romantic Asexual·양성애적 무성애자)"이라고 말했다. 남성과 여성을 사랑하는 양성애자인데 성적 매혹은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다.

여러 명의 남자, 여러 명의 여자와 사귀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의 만남이 가장 아픈 연애로 끝났다. 2008년부터 2년여간 사귀었던 애인은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만난 여성이었다. "아주 많이 좋아했거든요." 그렇게 사랑하고도 이별을 예감한 것은 1년6개월이 지났을 무렵이다. 애인은 "몸을 밀착하고 있는 스킨십 자체에 엄청난 의미를 두는 친구"였다.

정민씨는 달랐다. "남의 침이 들어오는 걸 감수하고 키스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섹스는 물론이고요. 그런 비위생적인 걸 감수하고 일상적으로 그런 걸 하려면 대단한 필요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성적인 끌림이) 저한테 없는 게 확실해요. 대단히 필요하지 않거든요." 로맨스 감정만으로 연애에 돌입하는, 불가해한 상태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섹스를 한다고 더 좋아진다거나 싫어진다거나 하지 않아요. 그냥 귀찮고 아프고 더럽고, 이게 다예요. 싫은데도 해야 하는 데이트 코스 같은 거죠."

'오늘은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 사람은 매일 성적인 관계를 원하고, 나는 싫어하기 때문에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좋아도 언제까지나 참을 수는 없잖아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면서도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참다 참다 한계가 오면 끝나는 느낌"의 연애는 또 그렇게 끝났다. '말하지 못한 나'는 부당한 죄인이 되어야 했다.

털어놓을 공간은 마땅치 않다. 사람들은 정민씨에게 말했다. "여자는 서른 넘어서 느낀다더라." "부모님이 혼전 순결을 강요하니?" 성애 중심 사회에서 무성애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도 쉽게 무지의 폭력을 경험한다. 20대 후반까지 정민씨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참고' 기다렸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스스로 정체성 탐색에 나섰다. 정민씨는 욕망의 부재에 대한 결핍감이 없다고 했다. 유성애자는 모르지만, 결핍은 '있다 없으니까' 생긴다.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거나 하는 게 영화나 소설을 봐서 아는 거지, 나 혼자 살았으면 전혀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이렇게 누군가의 본능은 그녀에게 순전한 학습의 효과다.

이해받고 싶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을 때 연우씨는 친구들로부터 "성적 트라우마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반응을 돌려받고 허탈했다. 소수자 이슈에 꽤 관용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무성애에 대한 반응은 비슷했다. "세상에 무성애 같은 건 없어. 네가 아직 미성숙한 거야." 연우씨는 스스로를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성애가 결합된 사랑을 할 거라고 예상하고, 성적 이끌림이 없는 사람을 미성숙한 존재로 여겨 교정하려는 건, 하나의 폭력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1980년대부터 '문제 상태'로 간주

무시는 때로 혐오보다 강력하다. 막연히 독신주의자라고 생각했던 세하(26·가명)씨는 인터넷에서 무성애에 대한 정보를 처음 접하고 '멘붕'이 왔다. 사람들이 성애를 말할 때 그는 늘 "담벼락 너머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한 남동생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무성애자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그렇거든." 남동생은 생각보다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세하씨의 성정체성을 뒤바꾼 일대 사건이, 동생에겐 시답잖은 수다로 여겨진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동생이 그걸 완벽하게 잊어버린 거예요." 어렵게 말해도 중요한 진실로 여겨지지 않는 벽이다.

두어 해 전까지 '퀴어'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세하씨지만 최근엔 성소수자 차별도 남의 일이 아니다. 회사 대표가 식사 중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교회에 다니는 그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지 않으면 60년 뒤에는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자식을 낳는다는 말은 모두가 성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전제하는 거잖아요. 그럼 나는 세상에 없는 존재구나 싶었죠."

성적 욕망과 경험이 남성성의 잣대가 되는 세계에서, 남성 무성애자에겐 소수자의 경험이 더 깊고 선명하게 새겨진다. 연애에도, 섹스에도 관심이 없는 박영재(28·가명)씨는 여태껏 누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일이 없다. 고교 시절, 남학생들이 흔히 그러하듯 친구들과 어울려 성인물을 본 적도 몇 번 있다. "좀 혐오스럽기도 하고 느낌이 안 좋았어요. 전혀 감정이 동하지도 않았고." 친구들에게 그 이야길 할 순 없었다. '다름'은 또래 집단에서의 매장을 뜻하기 때문이다. "제가 성기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성욕도 없고 여자한테 관심도 없는 걸 들키면 애들한테 왕따당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가족한테 하겠어요?"

기실 성애의 부재가 '문제 상태'로 여겨진 것은 인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80년 < 정신장애의 진단과 통계 편람 > 에 '억제된 성욕'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북미 임상의 대부분이 정신 건강 문제를 진단할 때 기준으로 삼는 의학 서적이다. 10년쯤 뒤, 또 다른 지침서인 < 국제 질병의 통계학적 분류와 관련 보건 문제 > 에 '성적 욕망의 결핍 혹은 상실'이라는 표현이 실렸다. 성애가 없는 상태를 이상심리의 한 범주로 다루게 된 것이다. 당시 여성운동가들은 "무성애를 비롯한 성애의 많은 측면이 의학적으로 다뤄지게 된 이유는 이런 성애들이 이전에는 없던 질병을 만들어냄으로써 얻는 이득이 크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무성애자들이 스스로 각성하고 '운동'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세계적으로 6만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무성애자 커뮤니티 'AVEN'(The Asexual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이 2001년 설립됐다. 창립자이자 가장 유명한 무성애자인 미국인 데이비드 제이는 "우리가 고장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섹스를 하지 않고도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욱 많이 토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AVEN의 일부 회원들은 < 정신장애의 진단과 통계 편람 > 에서 무성애가 '과소 성욕 장애'로 규정된 것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정체성을 정치화하려는 욕망

성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통념에 대해 세하씨는 "왜 그렇게 생각해야 되죠?"라고 되물었다. 작가를 꿈꾸는 그는 남들이 연애할 시간에 글을 읽고 쓰면서 충분히 행복하다. 무의미한 섹스보다 한 조각의 케이크가 낫다는 의미로 케이크 위에 깃발을 꽂은 무성애자 상징물이 있다. 비유컨대, 세하씨에겐 케이크 위에 펜을 꽂은 달콤한 인생이 있다.

국내에서도 '에이섹슈얼 운동'을 고민하는 움직임이 있다. 퀴어 모임 '완전변태'의 한 회원은 몇 해 전에 퀴어퍼레이드에서 자보를 붙이고 에이섹슈얼인 누군가를 찾아보려 시도했다. 20대 중반의 바이섹슈얼 여성인 그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 서면으로 설명했다. "정체화는 교류를 통해 문화를 형성하고 자긍심을 가질 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무성애는 나의 단순한 특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함께 활동하는 퀴어 모임 회원들에게 에이섹슈얼임을 커밍아웃하고 자보도 붙였지만 "그 밖의 대상에게는 점차 꺼리게 되어 커밍아웃하지 않았다"고 했다.

'정치적 운동'이 필요할 만큼, 무성애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차별받고 있는 걸까. "사실 에이섹슈얼이 하나의 정체성이고, '차별 사유'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점점 고민이 된다. 혼자 머리 속으로 하는 생각일 뿐이라는 느낌이 강해져서다. 현재는 '이야기'가 없는 선언과 같다." 그는 전했다. "한국에서 에이섹슈얼은 성소수자를 나타내는 LGBTAIQ(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Asexual, Intersexual, Queer) 표기의 가운데 끼어든 알파벳일 뿐이다."

소수자 운동 내부에서 무성애자의 정치적 지위는 아직 의견이 갈린다. 지난해 6월 트위터에서 일어난 논쟁은 국내에서도 무성애와 관련된 논의가 본격화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무성애자는 타인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들 중엔 때때로 자위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취지의 에이섹슈얼봇의 트위트로부터 불붙은 논쟁은, 무성애자 운동의 필요성과 절실함에 대한 것으로 번졌다. 논객 노정태는 자신의 트위터(@JeongtaeRoh)를 통해 에이섹슈얼들을 비판했다. "LGBT라는 정체성은 물론 존재 자체를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만, 어쨌건 그들은 인권을 위한 운동의 성격을 지닙니다. 나는 남들과 섹스하기 싫다는 소리를 하기 위해 소수자 운동을 끌어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논쟁은 그다지 생산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연우씨는 "대체로 무성애자들에게 불쾌감과 씁쓸함을 안겨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고 돌이켰다. "동성결혼 합법화나 호적상 성별 정정 문제처럼 명확하게 공적 영역과 연결된 지점이 무성애에는 아직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성애자 이슈를) 한 차원 낮은 수준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져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당사자에게 안팎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체성이라면 그것은 이미 정체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만한 존중을 받아야지요."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찾은 LGBT들에게 커뮤니티는 동질감의 위안은 물론 연애라는 선물도 준다. 하지만 무성애자 개인이 겪는 고통은 커뮤니티를 통해 해결되는 부분이 적다. 오히려 로맨틱 무성애자는 유성애자 애인과의 관계 속에서 '커뮤니티 이후'에도 고통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거꾸로 성애자, 당신 곁을 떠나며 제대로 속사정도 말하지 못한 '그 사람'을 이해할 근거도 된다.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표현하고 정체화함으로써 그것을 정치화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성적 정체화는 자신을 알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자유롭게 대화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의 한 형태입니다."

태어나고 죽을 때는 다 무성애자다

하나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결국 한 사회의 해묵은 편견을 조정하는 일이다. 이성애 성향과 동성애 성향, 양성애(범성애) 성향을 고루 나눠가진 무성애는 어쩌면 칼로 자르듯 정의 내릴 수 없는 인간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폭넓은 회색 영역을 제공할지 모른다. 임옥희 대표의 제안은 의미심장하다. "한국 사회는 성애로 바싹 달궈진 냄비와 같습니다. 무성애가 이 성애지상주의 사회에 진정제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요."

더 나은 사회는 조금씩, 미세하게, 낡은 편견의 장막들을 걷어올릴 때 장막 너머로 언뜻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결국 우리는 모두 무성애자로 태어나 무성애자로 죽지 않던가.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참고 자료

: 온라인 누리집 AVEN(www.asexuality.org), < 무성애를 말하다 > (앤서니 보개트·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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