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로서 우리의 스무 살을 축하해주세요

2014. 2. 1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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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 성소수자 인권운동 20년

5일 저녁 7시. 서울시청 지하 3층 바스락홀에 청소년 동성애자 100여명이 모였다. 하리수, 홍석천씨가 출연하는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토크콘서트'를 보러 온 이들이었다. 지난해 친구사이(남성 동성애자 인권단체) 대표를 지낸 김조광수(49) 영화감독이 행사를 준비했다.

하리수(가수), 홍석천(탤런트)씨가 무대에 오르자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다.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1호 커밍아웃 연예인' 홍석천씨가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

"여러분, 동성애자라고 해서 절대 의기소침하게 있지 말아요. 반 아이들이 여러분을 따돌린다면 그건 여러분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의기소침하게 있는 모습 때문인 거예요. 당당하게 생활하면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해요."

우리 사회가 성소수자에 대한 진지한 인식이 없던 때 홍석천씨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반 아이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했던 아픈 기억도 들려주었다. 청소년들은 홍씨의 말을 묵묵히 가슴에 담았다.

김조광수 감독은 요즘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쉼터인 '신나는 센터' 건립 운동에 한창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주로 성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왔지만 김조 감독은 이제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 관심을 돌리고 있다. '성적 자기결정권'(성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은 성인만의 전유물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게 김조 감독의 생각이다. 올해로 스무해째를 맞은 국내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한 단면이다.

국내 최초의 성소수자 인권단체'친구사이'가 문을 연 1994년은한국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시작여성동성애자 인권단체와피시통신 동호회도 뒤를 이었다오랫동안 벽장에 숨어있다이제야 세상에 나왔지만편견과 무지의 힘은 컸다그들은 때론 심각한 사회문제로때론 '변태성애자'로 취급됐다

전화번호 끝자리 7942에서 나온 '친구사이'

국내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1994년에야 시작됐다.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20년 이상 늦었다. 미국에서는 1969년 6월 스톤월 항쟁(미국 뉴욕의 '스톤월 인'이라는 동성애자 전용 술집을 경찰이 급습한 것에 대한 미 동성애자들의 항의 시위)을 통해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본격화했다.

1994년은 우리 사회에 성소수자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아 성소수자를 '호모'(homosexuality·본디 동성애를 뜻하는 중립적 단어이나 국내에서는 폄훼 용어로 쓰임)라고 비하해 불렀던 시대다. 성소수자라는 단어는 여성 동성애자(레즈비언), 남성 동성애자(게이), 양성애자(바이), 성전환자(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성 정체성을 포괄하는 단어로 최근 들어 정착되기 시작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친구사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 친구사이는 1994년 2월7일 발족했다. 이후명(가명·55)씨는 친구사이 초대 대표다. 지금은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지 않지만 그의 20년 전 작은 결심이 지금의 활발한 성소수자 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지난 7일 이씨가 근 10년 만에 서울 종로구 묘동에 위치한 친구사이 사무실을 찾았다. <한겨레>가 '성소수자 인권운동 20년'을 조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방에 머물던 이씨가 급히 서울로 찾아왔다.

"어머, 이게 다 그대로 있네." 이종걸 현 친구사이 사무국장이 1994년 발간된 친구사이 소식지를 한쪽 구석에서 찾아오자 이후명씨의 얼굴에 추억의 미소가 번졌다. 그가 삼십대 중반에 직접 만들었던 최초의 동성애자 소식지였다. 하얗게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이씨의 눈썹이 흥분한 듯 씰룩였다.

"종로 '게이바'(동성애자 전용 유흥업소)들 돌아다니면서 소식지를 배포했어요. 업소 주인들이 소식지를 업소에 놔주긴 하는데 다들 부정적이었어요. 한국에서 동성애 단체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았죠. '일본 같으면 괜찮지만 아직 우린 멀었어' 이런 말들을 많이 들었어요."

처음에 친구사이를 만든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의식이 높은 운동가들이 아니었다. 주말 저녁이면 종로에서 술이나 마시던 평범한 직장인들이었다. '존중받고 싶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 어떤 성정치학자들의 행동보다 앞섰다.

이후명씨는 친구사이 단체의 설립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이씨의 말투는 당당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1993년 초동회라는 동성애자 모임이 있었어요. 구체적 활동을 펴는 단체가 아니라 커피숍 등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열명 내외의 친목 모임이었지요. 그러다가 우리도 단체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종로에서 맨날 술만 먹는 게 게이 문화로 정착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먼저 남성 동성애자들끼리 뭉쳤어요. 그게 친구사이예요."

초동회에서 활동하던 여성 동성애자들은 '동성애 차별 문제'뿐 아니라 '가부장제'(남성 중심 가족주의)의 혁신 또한 과제로 갖고 있었다. 당시의 남성 동성애자들은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나아가는 여성 동성애자들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초동회에서 활동하던 남녀가 각각 인권단체를 세우게 된 배경이다.

사무실은 이후명씨의 강서구 화곡동 월셋집으로 정했다. 월셋집 전화번호 끝자리가 7942였다. 전화번호를 그대로 소리내어 읽자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친구사이 어때?' 이후명씨가 동료들에게 물었다. 그렇게 우연한 계기로 국내 최초 성소수자 인권단체의 이름이 친구사이로 결정되었다.

"사무실을 열었는데 걱정이 많이 됐어요. 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쳐 '미풍양속을 해친다'며 잡아갈까봐 걱정도 되었고요. 하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래도 '남성 동성애자 모임'이라는 간판을 밖에 내걸 수는 없었다. 건물주가 동성애 단체임을 알면 쫓아낼 수도 있었다.

당시 성소수자들은 제대로 된 동성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가 없었다. 가십거리를 주로 다루던 주간지 <선데이서울>에서 '변태 성애자'처럼 소개되는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유일한 동성애 정보였다. 성소수자 스스로 자긍심을 느낄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주류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동성애 인권단체 결성을 소개하는 1994년 여름 <중앙일보>의 기사 내용은 이러했다. "국내 동성연애자들이 '동성애의 권리'를 요구하며 모임을 결성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자는 운동을 벌이고 나서 충격을 주고 있다.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의 모임도 만드는 등 동성애가 점차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략) 한국에이즈연맹 관계자는 '에이즈와 동성애를 개인문제로 방치하면 국내에서도 에이즈 감염 폭발 현상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삐삐에 찍힌 '181818'

친구사이는 외부가 아닌 동성애 사회 내부에 대한 캠페인을 먼저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게이업소 등에 빠져 살지 말자'는 식의 캠페인이었다. 주류 사회가 동성애자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니까,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한 일종의 자기검열이었다. '운동의 오류'에 가까운 캠페인이었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떨어지던 그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주류 사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이성애자들과 같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그대로 존중하자'는 주장에 집중하고 있다.

친구사이 초기의 주 업무는 동성애 관련 상담이었다. 주류 사회가 동성애를 이상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동성애자 스스로도 자긍심을 갖기 어려웠다. 동성애자 스스로 자살 시도가 빈번한 시대였다. 이후명씨는 친구사이로 몰려드는 전화를 받느라 바빴던 당시를 아직 기억한다.

"늘 억눌려 살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단체를 만난 거예요. 친구사이는 아픔을 치유하는 공간이 되었어요. 동성애자들이 친구사이에 그냥 찾아와 앉아서 놀다 가고 그랬어요. 제가 밥도 해먹이고 그랬지요. 콩나물시루처럼 작은 사무실이었지만 여기만큼 편한 곳이 없었던 것이죠. 저는 그때가 참 행복했어요."

구약성서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남성의 몸에서 갈비뼈를 떼어 여성을 만든 다음 함께 살도록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덴동산에 살게 된 두 남녀가 반드시 이성애자여야만 한다고 못박지는 않았다. 성서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는 여성 동성애 관계임을 암시하는 듯한 장면이 많다. 하지만 국내 주류 기독교는 '이성애만이 옳다'며 자신들의 판단을 타인에게 강요해왔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우리 사회는 '남성과 여성 간의 사랑만이 존재한다'는 편견을 쉽게 내던지지 못했다. 굳어진 사고를 깨뜨리려는 사람들에게 종종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1994년 연세대에서 처음으로 동성애자 모임을 만든 서동진(문화평론가)씨가 친구사이 소식지에 남긴 글을 보면, 당시 성소수자에 대한 적대감이 '증오 범죄' 수준이었음을 알게 한다.

"지난 3월27일 <연세춘추>를 통해 연세대 내의 게이·레즈비언 모임을 조직하기 위한 알림광고가 게재된 이후, 나는 많은 정체불명의 발신자들로부터 전갈을 받았다. 물론 그들은 연세 학우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내 삐삐를 통해 밤낮으로 전해주었던 그 험악한 욕설과 증오, 그리고 거의 모든 전갈에서 들려오던 날 죽이고 말겠다는 협박, 내내 삐삐 화면에 찍혀 나오던 '181818' 따위의 숫자들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중략) 나는 게이라는 나의 성적 정체성이 증오의 대상으로 둔갑하는, 또 견딜 수 없는 삶의 차이를 나타내는 강력한 상징으로 치환되고 마는, 이 집단적 심리공황 상태를 온몸으로 걱정하고 마음 아파한다."

그러나 성소수자들은 위축되지 않았다. 여러 성소수자 모임들이 봇물 터지듯 신설됐다. 94년 2월7일 친구사이가 발족한 뒤 그해 11월 여성동성애자인권운동 모임인 '끼리끼리'(현재 한국레즈비언상담소)가 세워졌다. 95년 말부터 피시(PC)통신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에 동성애자 동호회가 개설됐고 서울대(마음001)와 연세대(컴투게더), 고려대(사람과사람) 등에서 동성애자들만의 동아리가 세워지기도 했다. 1997년 11월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현재 동성애자인권연대)이 설립됐다.

1998년 6월 한국동성애자단체협의회(한동협)가 출범하면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동성애자 단체들이 특정 사안에 공통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동협은 교과서에서 동성애 차별적인 표현들을 삭제하게 하는 청원운동을 시작했다. 음지에 숨어 있던 성소수자들이 오프라인 집회를 여는 등 양지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펴기 시작한 것이 이즈음이다.

피시통신 하이텔 '또 하나의 사랑'을 이끌었던 김현구(45)씨는 90년대 중반부터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놓고 인터뷰를 해온 비교적 유명한 동성애자다. 말끔한 얼굴의 남성 동성애자가 언론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는 '문화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때 동성애자들은 '우리도 당신들(이성애자)과 똑같아'라는 말을 너무 하고 싶어했어요. 동성애자는 에이즈 환자처럼 병들어 있거나, 여성 복장을 하고 다니는 것처럼 생각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벽장 속에 숨어 있던'(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사회 분위기 때문에 스스로 게이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소수자를 은유적으로 부르는 말)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부정하며 살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텔레비전에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 나와서 스스로 동성애자라고 밝히고 있으니 놀라웠던 것이죠. '동성애자가 변태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의 티브이 인터뷰를 보고 나서 동성애자 동호회에 가입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어요."

그러나 얻는 만큼 잃는 것도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김현구씨는 다니던 교회를 그만두어야 했다. 교회 청년회장을 맡을 정도로 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지만 김씨가 동성애자임을 알게 된 교인들은 갑자기 냉랭해졌다. 김씨 가족들의 마음고생도 컸다.

김씨는 현재 한국에이즈퇴치연맹 동성애자사업부에서 일하고 있다. 동성애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김씨는 오늘도 동분서주하고 있다. 실제로 동성애 행위가 바이러스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과의 성접촉 등으로 전염될 뿐이다. 이 바이러스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21세기의 성소수자들은무지개 깃발을 들고 신나게거리에서 행진을 벌이고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며밖으로 더 밖으로 외연을 넓혔다동성애 혐오는 여전하지만성소수자 인권운동 20년은그들의 존재 인정 투쟁이자주름진 한국 민주주의의 얼굴을깨끗하게 펴는 시간들이었다

게이 연예인·레즈비언 정치인 낳은 20년

2000년대 들어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좀더 일반 대중 속으로 파고든다. 2000년 8월 서울 대학로에서 '제1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성소수자들은 거리에서 당당하게 행진을 벌였다. 이 행사는 성소수자들의 자긍심이 일정 수준 이상에 올라 있음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된다. 더이상 '얼굴 없는 은둔자'로 살지 않고, 이제 당당하게 햇빛이 비치는 곳에서 인권을 외치겠다는 선언이었다.

퀴어문화축제는 현재까지도 매년 한차례씩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게이 퍼레이드'에만 3000여명이 참여할 정도로 국내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최대 축제로 커가고 있다. 1만여명이 참여해 세계 최대 규모로 열리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마디그라 게이 퍼레이드처럼 게이 축제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

커밍아웃한 여성 동성애자인 한채윤(43)씨는 1회 퀴어문화축제 때 참여했던 감격이 생생하다.

"(게이 퍼레이드는) 원래 서울 독립예술제의 여러 출연팀 중의 일부였어요. 덜렁 우리만 참여하는 게이 퍼레이드로 계획됐다면 (용기가 없어) 못할 건데, 여러 행진 그룹 중의 하나로 하는 거니까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행사 당일 비가 와버렸어요. 원래 행진하기로 한 다른 일반 그룹들은 하나도 안 오고 동성애자들만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냥 순수 '게이 퍼레이드' 행사처럼 되어버렸어요. 처음에는 '한국에서 설마 퍼레이드가 되겠어?' 하는 마음이 컸어요. 그런데 50명이나 모인 거예요. 레인보(무지개, 성소수자 자긍심을 상징하는 문양) 깃발을 들고 비 맞으면서 신나게 구호도 외치고 했어요. 정말 가슴이 벅찼어요."

한채윤씨는 1998년 2월부터 동성애 전문잡지 <버디>(buddy)를 만들었다. 동성애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최초의 정기간행물이었다.

"교보문고에서는 판매대에 게이 잡지를 놓지 않으려 했어요. 그런데 영풍문고에서는 저희 잡지를 판매대에 놔주는 거예요. 서로 비교되니까 <문화방송>(MBC) 취재기자가 교보문고를 찾아 취재를 시작했어요. 그제야 교보문고가 눈에 잘 안 띄는 가판대 구석에 저희 잡지를 놓기 시작했어요. 창간호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버디는 성소수자와 관련한 양질의 정보를 싣는 국내 유일한 매체로서 5년간 발행되다 폐간됐다. 인터넷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발전하면서 성소수자 정보의 유통창구는 인터넷 커뮤니티 쪽으로 옮겨갔다.

2000년대 성소수자 운동의 또다른 변화는 타 정치조직과의 연대가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더이상 성소수자들만의 인권운동이 아니라 이성애자들도 함께하는 운동으로 성장했다. 원내 대안 야당으로 자리잡은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의 전신) 안에 성소수자위원회가 설치되고 최현숙(57·전 민노당 성소수자위원장)씨는 2008년 성소수자로서 커밍아웃하며 진보신당 후보로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시에서 1977년 동성애자인 하비 밀크가 시의원으로 당선된 뒤 세계 곳곳에서는 성소수자들이 당당하게 제도권 정치영역에 들어갔다. 아이슬란드의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 총리, 벨기에의 엘리오 디뤼포 총리, 독일의 기도 베스터벨레 외교부 장관, 프랑스 파리의 베르트랑 들라노에 시장이 현재 유명한 동성애자 정치인들이다.

머지않아 우리나라에도 성소수자 정치인이 당선돼야 한다고 최현숙씨는 생각한다. "시민사회의 여러 요구를 법제화하는 곳이 국회이기 때문에 동성애자 정치인이 국회에 진출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출마한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최현숙씨는 지금도 레즈비언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20년 생일을 맞은 국내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열악한 우리 사회 성소수자 인식 현황을 고려하면, 비교적 성공한 편으로 볼 수 있다. 다양한 성소수자 운동이 곳곳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남성 동성애자 인권단체 친구사이와 레즈비언상담소를 비롯해 '성애(sexuality) 연구' 전진기지 구실을 맡고 있는 한국 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정치단체와의 연대 활동에 앞장서는 동성애자인권연대 등 크고 작은 15개 성소수자 인권단체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성소수자들 스스로 성 정체성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한겨레>가 지난 7일 성소수자 1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자신의 '성 정체성이 부끄럽다'고 대답한 비율이 7%에 그쳤다. 20년 전 친구사이가 남성 동성애자 49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서는 '동성애 성 정체성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대답한 비율이 51%였다.

지상파 방송들도 서서히 성소수자 묘사에 신중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2010년 방영된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는 더이상 동성애자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지 않아 화제가 됐다. 2000년 언론의 아우팅(outing·제3자의 폭로 등으로 동성애자임이 강제로 알려지는 것) 보도 뒤 방송에서 퇴출당했던 홍석천씨도 지상파 방송에 복귀했다. 지난 5일 <한겨레>와 만난 홍석천씨는 한결 편안한 모습이었다.

"2010년쯤부터 방송 섭외가 하나둘씩 들어오더라고요. 이제는 특별히 방송 섭외에서 차별받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 않고 있어요. 커밍아웃하고 나서 방송 활동을 정상적으로 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네요." 홍씨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담긴 미소가 번졌다.

한채윤씨는 지난 '성소수자 인권운동 20년'의 가장 큰 성과를 '존재의 각인'으로 꼽았다. "예전에 동성애자들은 어떤 '존재'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동성애는 일종의 에피소드 취급을 받았지요. 1960~70년대 신문 기사들을 보면 1년에 한번 정도 동성애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 아이가 동성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상담글에 '자라는 과정에서 흔히 있는 일이니 신경쓰지 마세요' 정도의 답변이 실리곤 했어요. 동성애자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게 중요한 변화입니다."

"우리 모두 자기 안에 소수성이 있다"

여전히 과제는 산적해 있다. '성소수자가 있다는 것도 알겠고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란 것도 알겠는데 웬만하면 눈에 띄지 말라'는 정서가 우리 사회에 주류를 이루고 있다. '차별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동성애가 권장될 만한 것도 아니다'라는 정서 또한 강하다.

동성애자인 이계덕(28)씨는 지난해 12월 서울 영등포구 거리에 '서울시민 중 누군가는 성소수자입니다'라는 펼침막을 게재하려다 거절당했다. 영등포구청 광고물관리소심의위원회 위원들이 펼침막 게재 거부를 결정하며 논의한 회의록을 보면, 위원들은 "국가인권위원회법 등의 차별금지 조항은 동성애자들이 취직 등 사회생활에 차별을 두지 말라는 취지이지 마치 동성애는 유해하지 않고 불법이 아니므로 권장하는 듯한 광고물을 게시하는 것은 판단력이 부족한 청소년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호기심을 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우리 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이해가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동성애 허용을 놓고 여전히 찬성과 반대의 관점에서 토론을 하는 것도 문제다. 동성애자에게 양육권과 결혼권을 허용할 것인지는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동성애 자체는 찬성과 반대의 관점에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인류의 피부색에 검은색을 허용할지 말지를 놓고 토론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다.

장애인·성소수자 등의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은 2007년 첫 법안 발의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황우여 대표를 비롯해 적극 반대하는 기류가 강하고, 민주당 의원들은 사분오열되어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군형법은 여전히 동성간 성폭력이 아닌 동성애 자체만으로도 처벌하는 조항을 담고 있다.

보수언론들이 허위정보를 담은 기독교 단체들의 '동성애 혐오 광고'를 싣는 것도 성소수자들에게는 근심거리다. '동성애를 하면 에이즈에 걸린다'거나 '동성애 드라마를 방영하면 아이들이 동성애자가 된다'는 광고들을 보수언론들이 무비판적으로 실어주고 있다. 이러한 광고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성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 경우가 많아 언론의 신중함이 요구된다.

우리 사회가 성소수자 인권운동 20년 역사를 격려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성소수자들만의 인권 신장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성애에 대한 편견과 무지를 깨뜨려왔다. 다양성을 온전히 갖추지 못해 주름졌던 한국 민주주의 사회의 얼굴을 말끔하게 펴는 과정이었다.

진선미 민주당 국회의원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각자 자기 안에 소수성을 갖고 있다. 나의 소수성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소수성이 존중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어준 운동이었다. 성소수자의 친구로서 성소수자 인권운동 20년 역사를 함께 축하하고 싶다"고 말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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