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유시민과 진영..사퇴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심영구 기자 2013. 9. 2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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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에 다시 보는 복지부 장관 사퇴 논란

-2007년 4월, 복지부 장관의 사의 표명..그리고 사퇴

2007년 4월 6일 밤 9시를 조금 넘긴 시각, 나는 서울 종로의 어느 한정식집 앞에 서 있었다.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있다는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날부터 나흘 전, 국회 본회의에서 이른바 '더 내고 덜 받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부결됐다. 기초노령연금법 제정안은 통과됐다. 이 두 법안은 일종의 '패키지' 법안이라고 유 장관은 설명해왔다. 즉, 국민연금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빈곤 노인에게 일종의 '용돈'인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고, 대신 국민연금법 개정을 통해 적자 구조를 어느 정도 개선하자는 취지다. 당시 그 구조대로 가면 2047년이면 연금기금이 고갈될 것으로 추산됐는데 가입자들이 돈은 더 내고 연금은 덜 받도록 해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구조로 바꾸는 게 개정안의 내용이었다. 기초노령연금은 어쨌든 돈을 더 주겠다는 것이니 다들 반기는 것, 국민연금 개정은 반기지 않을 것이란 점은 분명했다.

그런데 막대한 예산을 써야 하는 기초노령연금법만 통과되고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부결돼 재정 상황이 더 악화되게 된 것이다. 유 장관은 부결에 책임을 지고 청와대에 사의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고 이게 흘러나오면서 복지부 담당이었던 나도 수소문 끝에 유 장관의 위치를 확인해 이리 온 것이었다.

유 장관은 10시가 좀 덜돼 빨개진 얼굴로 나타났다. 아래는 그때 나눴던 대화다.

"사의 표명한 거 맞나?"

"어디서 들었나? ...국민 연금법 개정이 잘못돼서 국민들께도 죄송하고 대통령께도 송구스럽고 일이 잘못됐는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 해서 그런 말씀 드렸다. 대통령께서는 지금 한미 FTA 의약품 분야 논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서 그것을 마무리하는 것도 국가적으로 중요하고 그 밖에도 의료법 전면 개정 같은 다른 과제들도 있고 해서 뜻은 알겠는데 그냥 그런 일들을 집중해서 해라, 보류하신 셈이다."

"그럼 사퇴는 하지 않는 건가?"

"여하튼 대통령께서 특별히 말씀하실 때까지는 그냥 업무를 계속...그렇게 하는 게 도리 아니겠나."

금요일 밤이라서 그랬는지 유 장관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서 그랬는지, 아무도 없이 혼자 취재했다. 그 다음날 아침뉴스에는 그렇게 유 장관과의 단독 인터뷰 기사가 나갔다.

유 장관의 이때 사의 표명이 국민연금 개혁을 위해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내가 그 다음날 저녁 그렇게 기사를 썼다. 더 정확히는 당시 팀장이 그렇게 방향을 잡아줬다.^^)

=> 기사 보기

그리고 유시민 장관은 그로부터 한달 반 정도 지난 뒤, 5월 21일에 다시 사퇴 의사를 밝혔고 다음 날 복지부를 떠났다. 국민연금법은 '더 내고 덜 받는' 식은 아니라 '그대로 내고 덜 받는' 식으로 조금 조정돼 같은해 7월 개정됐다.

대선을 앞둔 해였고 그 다음해는 총선도 있었으니 정치권에서 국민 눈치를 엄청 보던 때이기도 했고... 어쨌든 정권은 교체됐고 총선에서도 민주당은 대패했다.

-2013년 9월, 복지부 장관의 사의 표명...

최근 진 영 복지부 장관이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6년 전과 달리 진 장관은 해외 출장 중이어서 장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는 없었다.(또 결정적으로, 그때와 달리 나는 복지부 담당이 아니다.) 장관의 해외 출장에 동행한 기자들의 질문에 진 장관은 "사의 밝힌 것은 맞지만 공약 후퇴에 대한 책임을 느껴서라는 건 와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늘 새벽 귀국한 진 장관은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복지부 장관 사퇴해야하겠다, 이런 생각은 출장가기 전에 했다. 한 2주 전에..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고.

그 이유는 내가 국민이 요구하는 그런 어떤 복지부 장관으로서 역할을 잘하기가 어렵겠다는 판단을 했고 내가 잘 할 수 없다 판단을 했으면 그거는 사퇴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고 저를 믿고 맡겨준 대통령에 대한 도리가 아니냐 그게 책임있는 게 아니냐 생각했었고. 다만 사우디 출장이 워낙 중요했기 때문에 출장을 성공적으로 갔다 와야겠다 생각했고.

공약과 관련해서는 사실 장관 차원에서 얘기할 사항이 아니다. 그거는 농담으로라도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는데 공약을 축소한 데 대한 책임을 얘기하는 건 상당히 와전된 것 같고.

여러가지 정책적인 면에서나 이런 부분에서 제약도 있고 보육 문제 관해서도 그때도 그런 걸 많이 느꼈는데...정부와 서울시가 갈등설이 있어서 그런 건 참 피해야 한다 생각했고 갈등 되풀이되는데 대해서 복지부 장관으로서 마땅한 수단도 없고 그런데서 무력감도 많이 느꼈고."

진 장관은 사퇴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맞고 주변에도 얘기했다면서도 실제로 대통령에게 사의를 밝혔는지, 이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된건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복지부는, 노인 전체에게 20만 원씩 주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과는 달리, 65세 이상 노인 중에서도 소득 하위 70%에게 최대 20만 원을 국민연금과 연계해 차등 지급하는 내용의 기초연금 실행방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2007년 유 장관, 2013년 진 장관의 차이는...

유시민 전 장관은 국민연금법 개정안 부결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유 장관은 한달 반 뒤에 정말로 장관에서 물러났다. 진 영 장관은 사퇴를 생각하긴 했다는데 복지부 장관으로서 무력감을 느꼈기에 그랬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공약 후퇴 책임설'이 문제가 되니까 면피성 발언을 했다는 해석도 그럴 듯해보인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절차상 잘못된 일"이라며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너무 흔한 얘기다. 복지 확대엔 그만큼 재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6년 전 유시민 전 장관은, 돈 더 내라는 얘기는 안 하면서 더 퍼주기만 하려는 정치권에, 자신의 사퇴를 통해 메시지를 던졌다. 명분이 있는 사의 표명이었다. 지금 진 영 장관의 사의 표명도 뭔가 메시지가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3선 의원에, 인수위 부위원장에, 여권 실세로 불리는 복지부 장관이 "무력해서"라는 이유로 사퇴한다는 건 구차하다. 만약 진 영 장관조차 그렇다면 어느 누가 장관을 할 수 있을까.

장관 사퇴에도 분명한 이유와 메시지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명분이 있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일국의 장관이라는 자리가 그저 한 개인의 출세가 아니라 해당 분야의 정책 전반을 책임지는 자리이듯, 여러 후보를 선정해 고르고 청문회까지 거쳐 장관으로 임명할 때 그럴 만한 이유와 시사하는 의미가 있듯, 물러날 때도 그러해야 한다.

유시민 개인 혹은 정치인 유시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겠으나 6년 전 겪었던 유 전 장관의 사퇴는 그러했다고 느꼈다. 그 뒤로 정치인으로 돌아간 유시민은 여러 곡절 끝에 지금은 정치 일선에서도 물러났지만 나는 적어도 그를,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 있던 정치인으로 기억한다.

진 영 장관도 사의를 밝혔으니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사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저 일신상의 이유가 아니라 혹은 대통령에게 죄송해서가 아니라, 국민에게 의미가 있는, 품격 있는 사퇴가 됐으면 좋겠다. 이후 정치를 계속할 진 장관에게도 그게 더 나을 것 같다.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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