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로를 무릎 꿇린 대한민국 '직구족(直購族·해외 사이트서 직접 물건 사는 소비자)' 파워

곽창렬 기자 2013. 7. 2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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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인 양 가격 올리는 바가지 상술 철퇴.. IP조작에 불매운동까지

"그동안 많이 해먹었잖아요. 버티다 결국 인하하네요. 그래도 직구가 더 싸겠죠?"

"진작 그랬어야죠. 25만원짜리 40% 인하해도 15만원인데, 우린 그 돈이면 몇 벌 사잖아요. 한국 아줌마 파워를 뭐로 보고."

최근 미국의 유명 브랜드 '폴로'가 국내 판매되는 아동복 가격을 최대 40%까지 내린다고 발표한 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엔 '직구족의 한판승' '줌마 파워의 결정판' 등 '승전보'를 알리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폴로의 '항복'은 상징적이다. 1990년대만 해도 '압구정 오렌지족'의 '교복'으로 군림하며 명품으로 꼽혔던 그 폴로다. 수십만원 넘는 가격표가 붙어 있어도 한때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파는' 제품이었다.

그랬던 폴로가 무릎을 꿇었다. 똑똑한 한국 '직구족'의 파워를 견디지 못해서다. 직구족(直購族), 즉 해외 사이트 등을 통해 직접 물건을 구매하는 '알뜰족' 때문에 결국 가격을 내리게 된 것이다. 직구족들은 해외 유명 제품을 직접 구입하는 한편, 해외 가격과 국내 가격을 일일이 비교하며 '가격 거품'을 지적한다. 10원 차이라도 꼼꼼하게 비교해 좀 더 싸게 사는 비법을 각종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 등에 올려놓아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한때 '비싸야 명품'이라는 그릇된 인식에, 해외에서 별로 이름 없는 제품의 가격을 한껏 올려 '명품인 냥'하며 소비자들을 유혹했던 업체들도 더 이상 과거의 행태를 반복하기 어렵게 됐다. 2000년대 이후 해외여행이나 연수 등을 하며 현지 브랜드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늘고, 해외 인터넷 쇼핑에 능숙한 '쇼핑의 달인'이 대폭 늘어나면서 '바가지 상술'에 직접 항의하는 소비자층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어떤 해외 업체라도 한국 직구족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옥션이 집계한 지난 상반기 우리나라의 해외 인터넷 쇼핑 규모는 6억4000만달러(약 7172억원). 직구 주문건은 200만건에 달한다.

'뻥튀기 가격'에 뿔난 소비자들 "직접 나서자"

한국 소비자들이 '직구족'을 자처하며 팔을 걷어붙이게 된 것은 한국만 들어오면 '초고가 명품'으로 둔갑하는 일부 제품들 때문이다. 현지 가격보다 두 배 가까운 가격에 팔리기도 한다. 지난해 정식 수입되며 큰 인기를 누렸던 '캐나다 구스' 같은 경우는 해외에서 약 90만원짜리(794.95달러)가 국내 백화점에서 150만원에 팔리고 있다. 직장인 김명지(29)씨는 "'명품 딱지'를 붙여놓고 일부러 고가 정책을 펼치는 브랜드에 화가 난다"며 "국내 구매 대행업체에 알아보니 배송비, 관세, 소비세까지 더하고 마진까지 고려해도 110만원 정도면 충분히 구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제일모직에서 수입하는 토리버치 아만다 호보백 같은 경우 국내 백화점에서 90만원 선에 팔리지만 해외 직접 구입 방식으로는 절반인 46만원 정도에 살 수 있다. 백화점에서 약 36만원에 팔리는 폴로 아동복은 해외 직구를 통해 9만2000원에 살수있다. 한 주부는 "그야말로 한국 소비자를 '봉'으로 보는 업체 측의 횡포 아니겠느냐"며 "그동안 '명품'이라면 눈이 벌게서 달려들던 우리도 잘못이지만, 이제는 업체 측도 유통 마진 거품을 빼고 정신 차릴 때가 됐다"고 말했다.

'쇼핑의 달인'들이 전수한 비법은 인터넷을 통해 마치 '기출문제 족보'처럼 전수되고 있었다. 유명 브랜드가 세일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리거나 단 1원이라도 싸게 살 수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몰려든다.

올해 초 일본의 엔저 현상이 두드러지자 비드바이, 재팬인사이트 등 일본 제품 구매를 대행하는 사이트에 고객이 몰렸다. 이곳에서 정보를 얻은 김모씨는 일본 브랜드 '콤비 F2유모차'를 약 20만원에 샀다. 한국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30만원은 줘야 살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한국 직구족의 힘에 눌려 가격을 낮추는 해외 업체도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최근 고가 유모차로 명성을 높이고 있는 노르웨이 유아용품 전문 브랜드 '스토케 코리아'는 이번 달부터 값을 낮췄다. 169만원짜리 익스플로리 모델은 159만원으로, 기존 99만원의 스쿠트 모델을 89만원으로 각각 10만원씩 인하한 가격이다.

'제왕의 투항'… 폴로, 어떻게 백기 들었나.

'캐주얼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폴로가 결국 투항하고 가격을 내리게 된 건 '직구족'과의 끊임없는 전쟁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폴로 미국 본사는 직구족의 구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한국에서의 접속 자체를 금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폴로는 캐주얼 분야에서 독보적인 1위 매출을 기록한 때였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인터넷 쇼핑이 활성화되고 각종 구매 대행, 배송 대행업체들이 늘어나면서 해외 사이트를 통해 직접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많이 증가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폴로의 정책은 한국 소비자들 사이에 '뜨거운 감자'가 됐다. 미국 본사에 끊임없이 항의 메일을 보냈다. 폴로 측은 IP 차단은 풀었지만 이번엔 또 다른 카드를 내밀었다. 한국 신용카드로는 인터넷을 통해 구입할 수 없게 한 것이다. 미국의 유명 백화점인 블루밍데일스나 니먼마커스도 한국에 결제 주소(billing address)를 둔 신용카드로는 인터넷 구매를 못 하도록 했다.

그러자 직구족들은 미국 내에 있는 구매 대행업체와 제휴를 맺고, 그 업체들이 보유한 미국 신용카드를 이용해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한 소비자는 "10년 전만 해도 폴로가 최고로 고급스러운 옷인 줄 알았는데 미국에선 국내 백화점 가격의 반의반의 반값도 안 되게 팔리는 걸 보고 충격받았다"면서 "15만원 이하면 관세도 안 내도 되니 당연히 직구에 몰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폴로는 이 전쟁에서 완패했다. 직구족을 비롯한 한국 소비자들은 한국 카드를 받지 않는 폴로 측에 수년 동안 강하게 항의했고, 결국 지난해 미국 본사 측은 한국 카드도 받기로 했다. 한 대형 백화점 관계자는 "직구족들이 형성한 여론 때문에 일반 소비자들마저 '폴로는 백화점 가서 제돈 주고 사면 바보'라는 인식이 강하게 퍼졌다"고 말했다.

자연 매출도 떨어졌다. 국내 한 백화점에 따르면 지난 2011년 매출은 4% 증가에 그쳤고, 지난해에는 -3% 성장률을 기록했다. 1위 아성도 국내 브랜드인 제일모직 빈폴에 내준 지 오래됐고, 최근엔 3위 라코스테와 4위 토미 힐피거에도 바짝 추격당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 아동복 제품의 국내 백화점 가격까지 낮추게 된 것이다.

IP 조작에 '불매운동'도 불사

미국 아동복 브랜드 '짐보리(Gymboree)' 역시 직구족과의 '전쟁'을 선포했다가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짐보리 측은 지난해 1월 해외 사이트에서 배송 국가를 고르는 항목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롯데와 새로운 계약으로 더는 한국에 배송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앞서 짐보리는 지난 2011년 롯데백화점과 계약을 체결하고 국내에 독점 매장을 열었다.

직구족들은 롯데 측에 "다시 짐보리 사이트에서 옷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했고,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아이들 옷값 거품 빼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라는 글을 올리며 온라인 서명운동도 했다. 2주 만에 3200여명이 동참할 정도로 호응이 컸다. 이런 여론 때문에 공정거래위원회까지 나서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결국 약 8개월 뒤 짐보리 측은 한국에서도 물건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브랜드를 잘 정착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데, (배송지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에 대한 비판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가 더 나빠지는 것을 우려해 내린 조치"라고 말했다.

미국 의류 브랜드 갭은 지난해 말 한국 직구족과 '한판 인터넷 전쟁'을 벌이다 진땀을 뺐다. 미국 추수감사절 뒤 세일 기간에 한국 소비자에겐 '접속 금지'를 시행한 것이다. 한 주부는 인터넷 게시판에 "그렇게 한국 엄마들이 열심히 팔아줬는데도 어디 두고 보자"라며 "한국에 수입되는 갭 의류를 불매운동 하자"라는 글을 올렸고, 댓글이 수백개에 달했다.

직구족들은 또 한국 측 수입 업체인 신세계 인터내셔널(SI)에 항의 전화를 걸었고, 미국 갭 본사에 항의 메일을 보냈다. 결국 갭 측은 SI를 통해 "인터넷 접속이 안 된 것은 기술적인 결함 때문이지, 절대 고의는 없었다"며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모양상 '결함'을 주장했지만, 현지 사정에 밝은 한 구매대행업체 관계자는 "결국 한국 직구족들이 집요하게 항의해 이룬 승리"라고 했다.

막으면 뚫는 것이 한국 직구족이었다. 한국에서의 인터넷 접속을 막는 해외 업체들이 생겨나자, 직구족들은 인터넷 IP 주소를 미국의 것으로 조작하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미국 의류 브랜드인 아베크롬비는 할인 행사를 하더라도 외국에선 가격을 보지 못하게 IP를 차단했다. 이 소식이 알려진 지 채 몇 분도 안 돼 각종 블로그에 'IP 바꾸는 프로그램'이 쫙 퍼졌다. 주부 이모(38)씨는 "블로그에 가면 IP를 조작해 해외 사이트에 접속하는 방법이 상세히 다 나와 있다"며 "나도 친구들이나 다른 직구족들에게 그 방법을 열심히 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구족 "명품 값 내려야"

직구족들은 "해외 업체들이 더는 한국 소비자들을 얕보고 한국에서 폭리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번 폴로의 가격 인하를 보고도 직구족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평가를 하는 것도 극심한 가격 거품 때문이다. 직구족 이모(39)씨는 "40% 내려도 판매할 수 있다면 그간 소비자를 우롱했다는 것"이라며 "한국을 무시하니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주부 박모씨도 "우리나라 백화점이나 대리점에서 판매하는 제품과 내가 직구로 산 제품을 비교해 보면 전혀 차이가 없다"며 "예전에는 그냥 '안 사고 말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하는 것을 보니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해외 제품 판매를 대행하는 한 백화점 담당자는 "한국 인터넷을 막거나 배송을 중단하는 것은 미국 본사의 영업 정책"이라며 "우리 백화점 가격이 비싼 것은 유통 및 매장 운영에 드는 비용과 AS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직구업체 관계자는 "한국의 직구족들의 열정과 치밀함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며 "이들과 정면으로 맞서 이겨낼 외국 업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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