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는 갔어도 그 숨결 오롯이

2013. 7. 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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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사회]고문 후유증 치유 위한 김근태 기념 센터 '숨' 개관… 고문 피해 구제·지원 법안은 여전히 상임위서 낮잠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조용히 웃 고 있었다. 6월25일 늦은 오후, 서울 성북구 정릉동 성가소비녀회(수녀원) 성재덕관 건물 입구에서 맞닥뜨린 사진 속 고인의 모습이 그랬다. 평화가 깃든 이곳에 김근태 기념 치 유센터 '숨'이 둥지를 틀었다. 고문 등 국가폭 력 피해자들을 위해 설립된 국내 첫 민간 전 문 치료기관이다. '숨'은 그동안 눌려왔던 이 들의 '숨길'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의미로 붙 여진 이름이다. 개소식이 열린 다음날은 유 엔이 선포한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이었다.

생전에 고인은 편안히 숨 쉬지 못했다. 가을이 찾아들 때마다 며칠을 심하게 앓았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이던 1985년 9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 실로 끌려가 22일간의 생지옥을 겪고 나서 부터였다. 2011년 가을이 찾아오자, 어김없이 기력을 잃었다. 생애 마지막 가을이었다.

"사제단은 김근태님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 습니다. 더 싸워라, 앞장서거라. 그런데 그분 이 전기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을 앓고 있다 는 사실을 저희들은 잊었습니다."

피해 당사자 등 십시일반 기금 3억원 마련

2012년 1월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 전 고문의 영결미사를 집전한 함세웅 신부는 고인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더불어 폭압적인 정권으로부터 고문 당한 이들을 위한 치유 센터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주 의의 밑거름이 된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건 국가의 의무이자, 우리 모두의 의무라는 뜻이었다. 그해 가을, 김 고문의 아내인 인재 근 민주당 의원,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이석태 변호사 등 각계 인사들과 고문 피해 당사자들이 모여 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회 와 집행위원회를 꾸렸다. 십시일반 3억원가 량의 센터 설립 기금을 마련했다.

성재덕관 1층 치유센터 안으로 들어서자, 센터 설립에 힘을 보탠 이들의 이름이 보였 다. 후원금 1억원을 낸 이들은 송지섭·송기섭·한광수·송기복·송기홍. 1980년대 대표적 조작간첩 사건인 '송씨 일가 사건' 피해자들이다. 개소식에서 만난 송기복(71)씨는 치유센터 '숨'이 억울한 일을 당한 모든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고운 얼굴의 어르신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82년 3월, 당시 중학교 미술교사였던 송씨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가 '북에 다녀온 사실을 인정하라'는 추궁을 받았다. 무려 116일간 안기부 조사실에 불법 구금된 채 모진 고문과 성적 모욕을 감당하다, 끝내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불법 연행되고 며칠 뒤,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동생 기홍(68)씨도 안기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그해 9월 안기부는 6·25 당시 충청북도 인민위원회 상공부장으로 활동하다 월북한 뒤 남파된 송창섭에게 포섭돼 25년간 간첩 활동을 해온 처와 자녀 등 일가친척 28명을 적발했다고 발표한다. 송창섭은 기복씨 남매의 아버지였다. 송지섭·기섭 형제는 송창섭과 6촌, 한광수씨는 송창섭 아내의 4촌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핵심 증거인 자백에 증거능력이 없다'며 무죄 취지로 사건을 두 차례나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서울고법은 대법원 판결에 불복했다. 7차례나 열린 재판 끝에 1984년, 사건 관련자들의 유죄가 확정됐다.

진실이 드러난 때는 2007년이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는 안기부가 대법원 판사들을 미행하고 유죄판결을 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며 송씨 일가 사건을 '간첩조작 사건'으로 규정했다. 2009년 서울고법은 재심 재판에서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송지섭·기섭씨는 이미 숨진 뒤였다. 2010년, 한광수씨도 생을 마감했다. 억울한 누명을 벗었지만, 송씨의 몸과 마음엔 생채기가 남아 있다. "요즘도 순간순간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 얼마 전에는 아침 드라마를 보는데 주인공이 누명을 쓰는 내용인 거야. 그날 아주 많이 우울했지. 몇 달 전엔 우리 아들한테 고백성사를 하면서 붙들고 울었어요. 미안해서. 안기부에서 하도 당한 뒤, 남자들은 다 나쁘다고 생각했거든. 아들하고 대화를 잘 못했어요."

국가 폭력 피해자 최소 30만 명 추산

'숨' 개소식은 김 전 고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 남영동 1985 > 를 함께 보는 것으로 시작됐다. 기복·기홍씨는 이 영화를 볼 수 없었다. 화면을 지켜보던 기복씨는 호흡이 불안정해져 결국 자리를 피했다. 기홍씨는 이 영화를 보려다 쓰러진 경험이 있어, 다시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간첩 누명을 쓰고 16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함주명(82)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1983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 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물고문·전기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요즘 그는 매주 치유센터에서 열리는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하루 두 알씩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는데, 치료를 받으면서부터 먹는 수면제 양이 줄었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을 텐데, 그들도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좋겠다." 센터 설립추진위원인 함씨는 기금 마련에도 큰 정성을 보탰다.

김 전 고문을 비롯해 이 땅의 국가 폭력 피해자는 최소 3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2011년 국가인권위원회와 인권의학연구소가 펴낸 '고문피해자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보면, 고문 피해자 213명 가운데 163명(76.5%)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고 있었다. 우울(25.4%)·불안(31.9%) 등 정서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도 많았다.

한국은 1995년 유엔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했다. 이 협약은 고문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 방안으로 물질적 배상은 물론 국가가 피해자 재활을 위한 치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공권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별도의 법률은 없다. 정부가 운영하는 국가폭력 피해자 치유센터는 지난해 문을 연 '광주 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뿐이다.

인재근 의원은 지난해 김 전 고문을 대신해 수상한 '제2회 진실의 힘 인권상' 시상식에서, 남편의 파킨슨병을 쉬쉬했던 점을 후회한다고 했다. 병의 뿌리인 고문 후유증도 감춰지면서, 국가·사회적 문제인 고문을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만 치부했단 아쉬움이었다. 개소식에서 만난 인 의원은 "김근태는 갔지만, 그의 이름으로 많은 분들이 치유된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며 "국가에서 정식으로 (국가폭력) 피해자 지원을 해야 치유가 되고 사회 통합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 의원 등이 발의한 고문방지 및 고문피해자 구제·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은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정부가 운영하는 치유센터는 광주 1곳뿐

시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국가권력이 존재하는 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치유는 먼 이야기일지 모른다. 함주명씨는 국정원 선거 개입 뉴스를 들으며, 과거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송기복씨는 기자에게 거듭 당부했다.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나도 북에서 쳐들어온 건 줄 알았어. 뭐든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래요. 바른 역사를 알려주는 건 기자분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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