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남재준은 지독한 보수주의자

2013. 7. 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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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인 "성격상 회의록 공개하고도 남을 사람"으로 평가

ㆍ민주정부 10년 비하, 좌파세력 척결 등 주장… 참여정부 인사들과 잦은 충돌

남재준 국정원장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전격 공개해 정국을 격랑으로 몰아갔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를 아는 한 지인의 표현에 따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국정원장에 발탁된 직후 남 원장을 만났다는 한 인사는 "내가 박근혜 정권의 조각이 완료된 지 얼마 안됐을 때 이 정권에서 위험 인물을 꼽으라면 남재준 원장을 뽑는다고 했는데 정확히 맞았다"며 "남재준 원장이 육군참모총장을 할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총기는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총기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남재준 원장은 남한이 1년 안에 공산화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국회 정보위원인 민주당 김현 의원도 남재준 원장 후보자 청문회에서 "남재준 원장 후보자의 안보강연 자료를 분석한 결과 과거사 왜곡, 민주정부 10년의 대북정책 비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미화, 좌파세력 척결 선동 등 국정원장 후보자로서 매우 적절치 않은 처신을 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남 원장은 지독한 보수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로 통한다. 지나칠 정도로 규정과 규율을 중시한다는 것이 주위의 평가다. 육사 시절에는 생도들이 지켜야 하는 직각 보행을 야간에도 어기지 않았다고 한다.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는 꼭 마셔야 할 자리에서는 반 잔만 채워 한 번에 입으로 털어넣곤 했다는 것이 군에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군시절 남 원장 평가는 극과 극"

그를 잘 아는 한 인사는 "남 원장은 규정과 규율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상대가 누구든지 그대로 돌직구를 날려버린다"고 말했다.

그는 참여정부 초대 육군참모총장(2003∼2005년)을 지냈다. 그의 성격이나 성향상 486(40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 청와대 참모들과의 관계가 원만할 리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군 사법개혁안과 관련한 충돌이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군 문민화 차원에서 각군 산하에 있는 군법무관(검찰)을 국방부 산하로 옮기려 했으나, 남재준 총장의 반대로 무산됐다. 남 총장은 공개석상에서 노무현 정부의 군개혁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중부의 난'을 언급,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청남대(대통령 별장)를 국민에게 돌려준 뒤 쉴 공간이 없어 계룡대의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청와대 참모진의 요청도 거절했다. 육군참모총장 당시 그는 군 인사비리 문제에 휘말리기도 했다. 지난 2005년 10월 군 인사에서 승진 대상자 17명에 대한 자료가 불리하게 조작됐고, 이 때문에 이들의 경쟁자였던 다른 승진 대상자 52명이 장성으로 승진했다는 의혹이었다. 육군본부를 압수 수색하는 등 군 검찰의 수사 결과 일부 문서조작이 밝혀졌고, 실무장교 4명이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남 총장은 군 검찰의 소환조차 받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당시 군검찰로 수사를 담당했던 최강욱 변호사는 "당시 장성 심사에서 겉으로는 공정하게 하는 것처럼 해놓고 승진 대상자를 이미 다 정해놨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며 "당시 나는 그것을 육군참모총장이 정해놨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책임은 총장 밑에 있는 사람들이 졌다"고 주장했다.

남 원장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도 많다. 군에 정통한 한 인사는 "남 원장에 대한 군에서의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며 "그를 멋있는 군인이라며 따르는 후배들도 꽤 있었다"고 말했다.

남 원장과 박근혜 대통령의 인연은 지난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한나라당(현재 새누리당) 대선 경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는 국방안보 특보로 남 원장을 임명했다. 이후 그는 박 후보의 국방안보 분야 실세로 자리매김했고, 박근혜 정부 초대 국정원장에 올랐다. 군출신이 국정원장이 된 것은 12년 만이었다. 하지만 남 원장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로 3개월 만에 최대 위기에 몰리게 됐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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