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진짜 얼굴 찾았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흔들리는 마흔 2013. 6. 1.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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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정 중등조선역사 > 에서 확인된 초상화는 박제화한 이순신 대신 실체에 가까운 모습을 복원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동안 사라졌던 이순신 장군 초상화의 실체가 확인됐다. 전남 고흥 녹동 쌍충사(雙忠祠)본이라는 초상화다. 이 초상화는 서울교육박물관이 소장한 < 증정 중등조선역사 >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초상화는 근·현대에 그려진 이순신 초상화와 달리 이순신의 막하 승병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초상화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상상 속의 이순신 모습이 아니라, 실제의 이순신 모습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1970년 9월 15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동권 체신공보담당관의 기고문에 따르면, 황의돈이 저술한 < 중등조선역사(국문판) > (삼중당·1946)에 쌍충사 보관 이순신의 초상화 사진이 수록돼 있었다고 한다. 김 담당관은 기고문에서 "(이순신의 초상화에 대해) 좌상(坐像)인데 그 좌고(坐高)가 그리 크지 않더라"는 황의돈의 말을 옮겨놓았다.

황의돈의 < 증정 중등조선역사 > (1946·서울교육박물관 소장) 69쪽에 있는 이순신 장군 초상화.초상화 원본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소각했고, < 중등조선역사 > 에 활용된 사진도 황의돈 선생에게서 빌려간 사람이 6·25전쟁으로 행방불명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또한 < 중등조선역사 > 도 오래된 책이라서 찾아내기 어려워 학계에서는 그동안 초상화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 막하 승병이 그렸다고 전해져

이번에 확인된 < 증정 중등조선역사 > 의 초상화는 인쇄상태가 선명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이순신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황의돈의 말처럼 초상화 사진을 새로 얻어 책에 넣었기 때문인지 황의돈이 1923년 저술한 < 신편 조선역사 > 와 1927년 저술한 < 중등조선역사 > 속의 이순신 초상화와 확실히 다르다.

< 신편조선역사 > 와 < 중등조선역사 > 속의 이순신 초상화는 1908년 장세기가 쓴 < 대한역사 > 107쪽의 초상화와 같다. < 대한역사 > 의 초상화는 그린 사람과 출처를 알 수 없고, 구군복(具軍服)을 입은 무인 모습이다.

반면에 이번에 발견된 초상화는 출처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얼굴은 < 대한역사 > 속의 이순신 초상화와 달리 점잖은 문인처럼 보이고, 흉배가 있는 문관복을 입고 있다.

경향신문에 기록된 황의돈의 구술 전언과 달리 < 증정 중등조선역사 > 의 초상화에는 고흥 쌍충사가 아니라 여수 충렬사(忠烈祠)로 출처가 기록되어 있다. 책에 기록된 출처인 충렬사는 여수에 없다. 여수에는 충민사(忠愍祠)가 있다. 황의돈이 충민사를 충렬사로 오해했거나, 아니면 경향신문 기고문처럼 고흥 녹동 쌍충사일 수 있다.

하지만 충민사·충렬사·쌍충사에는 조선시대에 이순신의 초상화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에 이순신의 초상화가 있었던 곳은 통영 착량묘(鑿梁廟)와 순천 신성리 신당(神堂), 여수 장군영당(將軍影堂)이다. 세 곳의 초상화 중 하나가 사진으로 남아 < 증정 중등조선역사 > 에 실렸을 가능성이 높다.

황의돈, 신편조선역사, 이문당, 1923. 왼쪽 위가 이순신 장군이다문인처럼 보이고 흉배 있는 문관복 입어

착량묘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599년 군사와 백성들이 이순신을 추모하고자 자발적으로 세운 이순신 사당의 시초이다. 이은상에 따르면 "왜적이 물러간 뒤에 해상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공의 충절에 감격하여 초가를 짓고 공의 초상을 모시고 제사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그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순천 신당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10년 후에 세워졌다. 죽은 일본군 귀신과 도깨비불 등으로 고통당하던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은 한 승려가 마을사람들에게 이순신의 신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 해결된다는 이야기로 인해 신당이 세워졌다. 이순신의 초상화를 그려 모셨는데, 1944년 일본인에 의해 사당과 화상이 모두 불태워졌다. 그 신당터에 1948년에 지은 사당이 오늘날의 순천 충무사다.

여수 장군영당은 현재 돌산대교 서쪽 입구인 여수시 남산동에 있었다. 순천 신당과 비슷한 성격의 여수지방 해신당이다. 장군영당 속의 이순신 초상화 기록은 조선 말기에 여수군수를 역임했던 오횡묵(吳宖默)이 남긴 < 영당치제문 > 과 1927년 동아일보 여수 주재기자가 쓴 기사에 나온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영당에는 이순신을 주벽으로 최영, 이대원, 정운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3년 이순신 영정은 당시 여수경찰서 고등계 형사 김차봉이 가져가 행방불명되었고, 최영과 정운의 영정은 일제경찰이 태웠다고 한다.

이번에 발견된 황의돈의 < 증정 중등조선역사 > 에서 여수 충렬사본이라고 한 초상화는 실제로는 순천 충무사 자리에 있던 신당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신당과 화상이 1944년에 일본인에 의해 붙태워졌다는 황의돈의 이야기와 일치한다. 또한 이 초상화는 1932년 이상범 화백이 여수 등지에서 보았다는 문관복을 입은 초상화와도 비슷하다.

이제는 박제화한 이순신, 문인 같은 이순신의 얼굴 대신 진짜 무인 이순신의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 1973년 지정한 장우성 화백의 표준 영정도 교체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런 점에서 < 증정 중등조선역사 > 에서 확인된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는 실체에 가까운 모습을 복원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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