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전범기가 뭐에요?' 기형적 역사교육의 심각함

김종원 기자 2013. 4. 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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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독도'라는 참치집이 있습니다. 이 독도 참치 옆엔 일본식 선술집, 이자까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자까야의 간판은 욱일승천기, 일제 전범기 문양입니다. '독도참치' 간판 옆에 붙은 전범기 간판. 이 웃지못할 아이러니가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8뉴스에 방송된 제 기사를 보고 독도참치 집에서 전범기 간판을 쓰는 것으로 착각한 분들이 계신데, 두 간판은 전혀 다른 업소의 간판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취재진이 간판에 전범기 문양을 쓰는 이자까야를 찾아 왜 간판을 저렇게 만들었냐고 물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자까야 사장님이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사장님은 햇살 비치는 그 문양이 그런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고 항변합니다. 그저 간판 만든 업체가 알아서 디자인 해 온 간판을 그대로 쓴 죄밖엔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손님도 크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까지도 잘 몰랐다고 합니다. 다만 최근에 한 손님이 간판 문양이 전범기라고 알려줘서 지금 간판 디자인을 바꾸려고 알아보고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지난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한 대학교 디자인 학과 학생들이 전범기 문양을 배경으로 홍보사진을 만들어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해당 대학교와 학생들 역시 '아무런 정치적 의도가 없었으며, 단지 몰랐을 뿐이다'라고 해명했습니다.

이번엔 영국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한 초밥회사집 로고가 전범기 문양이었다고 합니다. 이걸 본 한국 유학생이 그 초밥 회사 사장에게 메일을 보냈다는군요. '당신들이 쓰고 있는 로고는 일본의 '욱일승천기'인데, 이게 나치의 꺾어진 십자 문양 '하켄크로스'와 똑같은 전범기이며, 아시아인들에겐 잊을 수 없는 아픔이다. 그러니 전범기의 로고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영국의 초밥회사 사장은 곧바로 이 유학생에게 답장을 보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로고도 바로 바꿨습니다.

영국인 초밥회사 사장님은 아는데, 우리나라 이자까야 사장님과 손님 그리고 디자인과 학생들은 모릅니다. 전범기가 뭐가 그렇게 나쁜 건지, 왜 사용해선 안되는지 말입니다. 참 속터집니다. 일제의 만행을 전혀 알 리 없는 영국인 초밥회사 사장은 '전범기'란 말 한마디에 얼굴도 본 적 없는 외국 유학생에게 사과를 하고 회사 전체 로고까지 바꿀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데,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은 정신대 할머니와 강제징용 할아버지들이 여전히 사과 한 마디 못받고 고통받고 계신 우리나라에선 '전범기'를 갖다 써도 그저 '몰랐다'고 하고 넘어가는 일이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게 말입니다. 취재 내내 참 씁쓸했습니다. 조국의, 민족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아픔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우리의 무엇이 자랑스럽고, 무엇이 성찰해야 할 일인지 헤아리지 못하는 것. 바로 '역사감수성'이 실종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취재중 만난 역사학자들은 하나 같이 걱정이 한가득이었습니다. 역사감수성은 역사인식이 올바로 잡혔을 때 생기는 것이고, 역사인식은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꾸준히 받아야 생기는데, 입시 위주의 기형적 교육 체제때문에 요즘 우리 젊은이들은 역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문제를 파고 들어보니 정말 한도 끝도 없었는데, 대표적으로 몇 가지 꼽아보겠습니다.

1. 집중이수제

중고등학교에 '집중이수제'란 제도가 있습니다. 한 과목을 짧게는 한 학기, 길게는 1년 안에 몰아서 배우는 제도입니다. 정부는 집중이수제를 시행하면 학생들이 동시에 많은 과목을 공부할 필요가 없어져서 학업 부담이 줄어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다보니 국영수를 제외한 과목들은 짧게는 한 학기, 길게는 1년 안에 진도를 모두 빼야하는 기현상이 벌어집니다. 미술을 집중이수 하는 학기엔 일주일 내내 그림만 그리고, 음악을 집중이수 하는 학기엔 일주일 내내 노음악만 배웁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여서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1년 또는 한 학기 안에 교과서 한 권을 모두 떼는 학교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되니까 역사를 집중이수하는 학기엔 역사 수업이 일주일에 5번씩 들어갑니다. 학생들은 이렇게 되면 오히려 더 집중이 안된다고 얘기합니다. 특히나 우리나라 역사교육은 대부분 암기식으로 진행되다보니, 학생들이 '역사'하면 피로감부터 느끼는 겁니다. 더 큰 문제는 학생들이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역사를 배우고 싶어도 집중이수를 하는 학기가 아니면 수업을 들을 수 조차 없다는 겁니다.

2. 근현대사의 대폭 축소

역사학자들은 하나같이 말합니다. 역사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근현대사라고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가장 가까운 근현대사를 확실히 알아야 올바른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중고등학교 교과과정 개정에선 이 근현대사 부분이 대폭 축소됐습니다. 한 때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지정하는 정책이 논의됐지만,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딛혀 천만다행으로 '필수 과목'의 자리는 지키게 됐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근현대사 부분은 대폭 줄었습니다. 그래도 지난해까지는 비록 선택과목이긴 했지만 '근현대사'라는 과목이 엄연히 존재했었는데, 이젠 이 근현대사 과목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겁니다. 한국사 교과서 맨 뒤쪽 챕터에 실린 게 전부인데, 그나마 그 양도 얼마 안되는 걸 끄트머리에 있다고 그냥 빼먹고 넘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하네요. 역사 시간 대부분이 고조선, 삼국시대 그리고 조선시대 얘기에만 편중이 돼 있으니,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은 무엇인지, 어떤 과정을 겪어서 우리나라가 세워졌는지, 앞으로 우리가 계승해야 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서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전범기가 뭔지도 모르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거죠.

3. 암기식 교육

우리나라 역사 교육은 스토리텔링이 안됩니다. 모든 사건은 원인과 과정이 있는데, 그 복잡다단한 원인과 과정 설명 대신 연도와 인물이름, 단체명 외우기 등에 치중이 됩니다. 그건 제가 학교를 다니던 십여년 전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유산이고 무엇이 우리의 치부인지를 알려면 서로 맞물려 있는 수많은 사건을 물흐르듯 배워야하는데, 그저 외우고 또 외우는 과목이 되다보니 역사에 흥미를 잃는 학생이 하나 둘 늘어가는 거죠. 딸딸 외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데 역사인식이 생길 리도 만무하고요.

자, 부족한 역사 교육을 받은 우리 학생들, 그 수준은 어떨가요? 한 마디로 심각했습니다. 다음은 중고등학생의 역사 인식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실제 취재진이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한숨밖에 안나오는데, 대충 이랬습니다.

Q1. "3.1절을 읽어보세요"

적지 않은 중학생들이 3.1절을 '삼점일절'로, 3.1운동을 '삼점일운동'으로 읽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지더군요. 기사가 나간 뒤 일부 네티즌들은 댓글에서 학생 인터뷰가 조작된 것 아니냐고까지 물으시더군요. 취재진이 중학생을 만나기 위해 서울시내 중학교 5군데를 돌아다녔고요, 20명 남짓 되는 중학생을 붙잡고 물어본 결과, 20%정도의 중학생이 3.1절 읽는 법조차 몰랐습니다. 차라리 조작이었다면 저도 좋겠습니다.

Q2. "3.1절은 무슨 날인가요?"

'일제에 항거해 1919년 3월 1일 벌어진 우리민족 최대 독립운동'이란 답을 딱 한 명이라도 해주길 기대했습니다. 저렇게 정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히 '대한민국 만세'정도 기억하는 학생은 꽤 많았습니다. '독립운동'이라고 말한 학생들도 꽤 있었고요. 그런데 중고등학생을 막론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습니다. 북한군이 쳐들어와서 벌어진 전쟁이라는 대답도 있었고요, 아예 모른다고 답한 학생도 많더군요. 중학생 뿐 아니라 고등학생도 20명 정도 붙들고 물어봤는데, 중고등학생 다 합쳐서 오답률은 50%정도나 됐습니다.

Q3.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죠. 문제를 준비하면서도 '너무 쉽지 않나?' 했는데.. 이게 의외로 오답이 많이 나왔습니다. 역시 질문을 한 중고등학생 30명 가운데, 30%가량은 오답을 얘기했습니다. '김대중'이라고 외친 학생도 있었고, 박정희 아니면 전두환 이라고 대답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역시 아예 모른다는 대답도 빠지지 않았고요.

Q4. "이완용이 누구인지 아세요?"

이 질문은 거의 올바르게 대답한 학생이 없더군요. '되게 유명한 사람인데 모르겠어요' 정도면 양호한 대답이었고요, 뉴스 보도에도 나갔지만 '일제에 저항해 싸운 분'이라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대답도 있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이 외에도 '안중근 의사가 누구인가?', '독립 선언이 먼저인가 임시정부 수립이 먼저인가?' 등을 묻는 질문도 있었는데, 20~30명 되는 학생 가운데 정답은 한 명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게 과연 틀린 답을 댄 학생들을 탓할 일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오답을 말한 학생들 대부분은 아직 학교에서 역사교육을 받지 않은 학생들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집중이수제'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역사를 배울 학기가 되지 않아 역사 책은 건드려보지도 못한 학생들이 많은 겁니다. 이정도 되니 우리나라 역사 교육 체계가 얼마나 엉망인지 실감이 가시죠?

우리나라 역사 교육이 문제라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외국의 사례입니다. 저는 정말 궁금했습니다. 외국에선 역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친다는데, 어떤게 체계적이라는 건지 직접 얘끼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우리나라에서 유학중인 외국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학생과 우리나라 대학생 3명이 참석했습니다. 참고로 외국 학생들은 모두 자국에서 대학을 다녔거나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었고요,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서울의 유명 4년제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역사 대담'의 진행은 덕성여자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신 한상권 교수님이 맡아주셨습니다.

먼저 역사 수업이 한 주에 몇 시간이나 배당이 되는지 물었습니다. 미, 일, 프, 독 네 나라 모두 역사는 필수과목이었고요, 최소 주 3시간에서 최대 주5시간 까지, 한 학기도 빠지지 않고 매 학기 졸업할 때 까지 배우고 있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주 2~3시간 1년만 배우고 끝났다고 답했습니다.

다음은 역사 과목의 공부 방법입니다. 미국 대학생은 우리 나라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보더니 '와우!'를 외치더군요. 뭐가 '와우'냐고 묻자, 자기네 나라 역사책은 한국사 교과서보다 두 배는 더 두껍답니다. 그 두꺼운 책을 매년 한 권씩 배우는데,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끼리 역사 그룹 스터디를 하고, 그걸 갖고 수업시간엔 발표도 하고 선생님과 토론도 하며 공부를 한다더군요. 이렇게 초중고교를 지내면 없던 역사 인식도 저절로 생길 수 밖에 없을 것 같더군요. 반면 프랑스와 독일은 역사 교과서가 우리나라 교과서와 비슷한 두께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두 나라는 선생님이 교과서 외에 온갖 역사 서적을 읽어 오라고 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교과서는 그저 참고용 서적에 불과하고, 실제 공부는 선생님이 지시한 각종 역사 서적들로 한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한 학기에 읽어야 하는 역사 책이 10권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역사 수업 모두 들어보셔서 아시겠지만, 대부분 암기 위주입니다. 연도, 이름, 단체명, 연도, 이름, 단체명.. 당연히 서술에 약하게 되고,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놓치게 되죠. 이런 식의 공부론 지식은 늘겠지만, 의식은 생기지 않는 겁니다.

이 외에도 각 국 근현대사의 주요한 사건에 대해 묻기도 했는데, 외국 학생들의 경우 상당히 정체성이 확립이 된 상태에서 답변을 하는 반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그저 단편적인 지식을 나열하는 데 그쳤습니다. 외국은 역사교육 잘 시킨다더라고 말로만 듣다가 눈 앞에서 실제로 얘기를 나눠보니 정말 우리나라 역사교육은 개선이 시급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제 뉴스가 나간 뒤 많은 분들이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문구가 생각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근본을 모르는데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겠죠. 요즘 청소년들 역사인식이 어떻게 저렇게 부족할 수 있냐고 분통 터뜨리실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학생 탓 아닙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 한 어른들 탓입니다. 역사 교육 제도의 개선이, 더 나아가 입시 위주의 교육 체제 개선이 정말 정말 시급합니다.김종원 기자 terryabl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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