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범' 신창원에게 '무기징역+22년6개월'은 마땅했을까

입력 2013. 2. 22. 17:31 수정 2013. 2. 2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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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표창원의 죄와벌/ ② 희대의 탈주범 신창원

신창원은 현장에만 있었을 뿐살인은 공범이 저질렀다그러나 강도치사로 무기징역형또 탈주와 절도로 추가징역한 소년을 범죄자로 키운사회적 책임은 고려되지 않고형량은 가혹하기만 했다이태원 살인사건의 경우미군자녀 2명이 함께 있었지만검찰은 1명만을 기소했으며법원은 범인인지 확실치 않다며그마저 무죄를 선고했다

우리나라 범죄 역사에서 신창원만큼 극적인 인물은 찾기 어렵다. 교도소를 맨몸으로 탈출해 2년이 넘게 15만 경찰을 농락하며 전국을 활보하면서 절도 행각을 계속해, 사회에 불만을 느낀 젊은이와 청소년층에게 연예인 같은 인기를 누렸던 범죄자.

그가 검거될 당시 입은 외국 유명 브랜드 셔츠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범죄자 등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패션을 따라하는 '블레임 룩'(blame look) 현상 논란마저 일으켰다. 특히, 신창원이 거쳐간 곳마다 경찰서장이나 파출소장이 문책을 당해 '신창원이 경찰 인사를 좌지우지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름이 같아 '유명한' 신창원의 덕을 본 측면도 있고, 범죄자 이름으로 불리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신창원이 검거돼 한창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때 한 라디오 생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진행자가 '경찰대학 신창원 교수'라고 부르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고, 지난해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40대 남성이 '신창원 교수 맞죠?' 하며 악수를 청한 일도 있었다. '죄와 벌' 연재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다뤄야 할 대상으로 신창원 말고는 다른 대상을 떠올릴 수 없었다.

표창원엔 따뜻했으나 신창원엔 따가웠던…

1997년 1월20일, 부산교도소에는 비상이 걸렸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재소자 한 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신창원. 몸이 날렵하고 체력이 좋긴 했지만, 높고 두꺼운 교도소의 담벼락을 뚫고 탈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물론, 당시 부산교도소는 외벽 보수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사동 건물만 벗어나면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마련되어 있기는 했다. 신창원은 마치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 나오는 것처럼, 오랫동안 치밀하게 탈옥을 준비했다. 최소한의 단백질과 탄수화물만을 섭취하고, 이기지 못할 고통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운동을 해 필수 근육 이외의 살을 모두 뺐다. 그리고 모범적인 수감 생활을 하며 작업장을 드나드는 사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틈타 작고 얇은 쇠톱 하나를 훔쳤다. 드디어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고 판단한 그는 평소 눈여겨봐 뒀던 화장실 쇠창살 하나를 쇠톱으로 끊어내고 뛰어올라 공중에 매달리고 나서, 보통 사람은 몸의 반도 들어가지 못할 좁은 공간 안에 작은 머리를 집어넣은 뒤 얇아진 상체를 밀어넣고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그 뒤 바닥으로 가볍게 뛰어내린 다음에는 뒤도 안 돌아보고 쏜살같이 공사중인 외벽을 향해 달렸다.

그로부터 2년6개월, 전 경찰이 전력을 다해 쫓는 비상경계령을 농락하며 유유히 전국을 활보한, 대한민국 사상 최장기간에 걸친 탈주극이 시작됐다. 외환위기 직전의 경제적 어려움과 답답한 사회 현실에 분노하던 사회 일각에서는 신창원을 '홍길동'이나 '일지매' 같은 '의적'으로 칭송하며 검거되지 않길 바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인터넷에서는 범죄자를 추앙하는 '팬카페'가 신창원을 대상으로 해서 최초로 개설되고, 신창원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까지 등장해 가히 '신창원 신드롬'이라 불릴 만했다.

범죄학 강의 중 간혹 '표창원과 신창원'을 비교해 설명하기도 한다. 학생이나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흥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창원은 표창원과 딱 1년 차이인 1967년 5월 출생이고, 싸움과 서리 등 말썽꾸러기 어린 시절을 보낸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부친의 베트남 참전으로 수년간 '아버지 없는 유년시절'을 보낸 필자와 달리 신창원은 일찍이 모친이 사망해 '모성이 결핍된 유년시절'을 보냈고, 전쟁 후 복귀한 필자의 부친과 달리 신창원의 잃어버린 모성은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특히, 잘못과 말썽을 저지를 때마다 강한 체벌과 엄한 질책을 받았던 것은 유사하지만, 그럴 때마다 표창원에겐 따뜻한 가슴을 열어 위로와 격려를 해준 이웃 아주머니와 선생님들이 계셨던 반면 신창원에겐 이웃의 싸늘한 시선과 불만, 교사의 욕설과 무시가 뒤따랐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신창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국민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학교에 낼 돈도 가져오지 못하는 놈이 뭐하러 오냐며 심한 욕설을 한 뒤 내 마음에 악마가 생겼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범죄학에선 이러한 '표창원과 신창원의 차이'를 설명할 때 '사회적 유대'라는 개념과 '낙인효과'라는 이론을 자주 사용한다. 한 사람이 주위 사람들과 사회와 긍정적인 연결고리가 강하게 형성될수록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통제력이 강해지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유혹이나 스트레스 등 범죄 유발 요인 앞에 쉽게 무너진다는 것이 사회적 유대 개념이다. 사회적 유대를 구성하는 4개의 요소가 가까운 지인과 애정과 관심으로 연결되는 '애착', 실현 가능한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전념', 소속된 공동체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참여', 그리고 도덕과 윤리, 법 등을 준수해야 한다고 믿는 '신념'인데, 신창원에게는 이 4가지 요소가 모두 결핍되어 있었다.

15살 아들을 소년원에 보내달라던 아버지

게다가 1982년 15살 중학생 때 거듭된 밭과 과수원 서리에 대해 이웃이 항의하자 신창원의 아버지는 어린 신창원의 손목을 잡고 경찰서를 찾아가 '소년원'에 보내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경찰은 아버지의 뜻대로 신창원을 소년원에 보내고, 그 결과는 '범죄자'라는 낙인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학교에 돌아갈 수도 없었고 이웃에서는 자녀들에게 '창원이랑은 어울리지 말라'며 외면했다. 신창원이 찾아갈 곳은 소년원에서 만난 비슷한 처지의 청소년들뿐이었다. 그들과 어울려 다니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 신창원은 1년 뒤인 1983년, 다시 절도죄로 검거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다 결국 1989년, 22살 때 공범 3명과 함께 서울 돈암동 한 주택에 들어가 강도질을 하다가 공범 중 한 명이 피해자를 살해하는 바람에 '강도치사죄'의 공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범죄자 신창원에게는 하나의 '신조'가 있었다. '결코 사람은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의 돈을 훔치는 '도둑'일 지언정 사람을 상하게 하는 치졸한 파렴치범은 되지 않겠다는 나름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공범이 살인을 저지르는 바람에 자신마저 살인범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절망하고 좌절했다. 더구나, 실제로 사람을 죽인 살인범들도 변호사를 사서 적극 변론하면 징역 5년, 7년 정도를 선고받고, 세상을 어지럽힌 대형 권력형 비리 범죄자들도 몇 년 복역하지도 않고 세상에 나가는 현실 앞에서 분노감마저 들었다. 결국, 수감된 지 7년 만인 1997년, 탈옥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탈옥 후에도 신창원은 여러 차례의 절도 범죄를 저질러 총 9억8천만원에 이르는 금품을 훔쳤고, 그중 일부는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에 기부하면서 메모를 남기기도 하는 등 도주중임에도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애썼다. 결국 탈옥 2년6개월 만에 검거된 신창원은 기존의 무기징역에 더해 22년6개월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수감중에 중졸·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신창원은 언론사 등에 보내는 자신의 편지를 발송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도소장을 대상으로 한 소송을 제기하는 등 자신의 권리 찾기에도 열심이었다. 특히, 스스로 법전과 법학서적을 탐독한 뒤 모든 소송 과정을 변호사 도움 없이 수행하고 승소해 100만원의 배상 판결을 받아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1년 7월에 부친이 사망하고 장례식에 참석하게 해달라는 요청이 거부당하자, 신창원은 그로부터 한달 뒤인 8월에 자살을 시도했다. 한때 중태에 빠졌으나 지금은 건강을 회복한 상태다.

형법에는 범죄행위마다 형량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 상한선과 하한선을 둘 뿐이지 단일한 형벌을 정해놓지는 않았다. 특히, 작량감경(정상참작 사유가 있을 때 법관 재량으로 형을 줄여주는 것) 등 감형 사유나 가중처벌 요소 등이 있어 결국 '판사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범죄의 형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 법의 원칙을 '자유 심증주의'라고 한다. 물론, 항소나 상고 등 불복 가능성이 있기에 판결은 신중하게 이뤄지며, 판사 개인의 자유재량이 아닌 과거 판례와 대법원이 마련한 양형기준, 그리고 당시 국민의 법감정 등을 고려해 형량이 정해진다.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할 범죄였나

범죄학에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국가책임론', '사회체계 책임론', '회복적 정의' 등의 요소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해당 범죄자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에 국가의 법과 제도의 미비나 문제로 인한 책임의 정도와 이웃 공동체와 문화, 윤리, 교육체계 등 사회화 시스템의 문제가 기여한 정도를 감안해야 하고, 가해자에게 어떤 조처를 내려야 피해자의 피해 회복에 가장 바람직할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 범죄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형벌의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는 것도 이러한 복잡한 '범죄와 정의'의 본질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각 범죄가 끼친 객관적 해악과 범죄자의 '악의'라는 주관적 요소가 같은 잣대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법 앞의 평등' 원칙은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된다. 특히, 범죄자의 지위나 신분, 경제력과 권력의 차이가 범죄 형량에 반영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더 나아가 범죄자의 말이나 행동, 생김새 혹은 인종이나 지역 등의 요소가 형량에 영향을 주게 된다면, 그 자체가 '차별'이라는 '인권침해'로서 그러한 편파적인 판결 자체가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요소를 모두 고려할 때, 1989년 저지른 강도치사죄의 공범으로,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고 그 현장에 함께 있기만 했던, 신창원이 받았던 '무기징역'형은 공정했을까? '정의'에 부합하는 형량이었을까? 다른 범죄와의 형평성에 문제는 없었을까? 그가 비록 15살부터 절도죄로 소년원을 들락거렸고, 그 뒤에도 절도를 저질러 유죄 판결을 받은 전과자라고 해도, 그가 저지르지 않은 '강도치사' 범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강도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했으며, 범행 이후 자수하지 않고 도주했다가 검거된 죄책만 물으면 된다. 비교 사례로 1997년에 발생한 '이태원 살인사건'을 들 수 있다. 2명의 미군 군속(군무원) 자녀가 함께 한 햄버거집 화장실로 피해자를 따라 들어가 그중 한 명이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에서, 검찰은 그 2명 중 1명만을 살인죄로 기소했고, 법원은 "2명 중 1명이 범인인 것은 확실하나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점은 확신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신창원 사건의 경우, 오히려 피해자를 살해한 자는 명확히 밝혀졌고, 신창원은 그 살인행위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확인되었다. 과연 그에게 '공동정범'(2명 이상이 함께 범죄를 저지를 경우)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무기징역'형을 선고한 것이 정의로운 판결이었을까? 또한 신창원이 태어나 자란 과정에 교육과 복지, 소년사법 등의 국가·사회적 기제가 잘못 작동된 책임은 전혀 없을까? 22년6개월이라는 추가 형량 역시, '경찰과 국가제도를 우롱하고 장기간 도주 성공한' 데 대한 '괘씸죄'라는, '감정'이 작용한 측면은 없을까?

누구나 그저 '평생 감옥에 있어 마땅한' 사람으로 매도한 신창원. '진정한 정의'는 그에게 아직 구현되지 않은 것 같다.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 가장 비난받아 마땅한 자에게 보장되는 권리와 정의가 그 사회의 수준을 말해준다는 말이 있다. 신창원에게 주어지는 '정의'의 수준과 크기는 곧 언제든지 나에게 내려지고 주어지는 '정의'의 수준과 크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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