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규 교수, 107년 전 대만신문에 연재된 '대만판 춘향전' 발굴

2013. 2. 18.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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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향단은 없고 춘향 돕는 협객이..

[동아일보]

1906년 8월 17일자 '한문대만일일신보'에 실린 이일도의 '대만판 춘향전' 첫 회.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 제공

'춘향은 곤장을 맞으면서도 끊임없이 욕을 해 대다가 드디어 숨이 끊어졌다. 월매가 와서 춘향의 시체를 보니 혈육이 낭자하고 어루만져도 이미 굳어 있었다. 한참 목메어 울다가 옥졸에게 시체를 묻겠다고 청하니 옥졸이 허락했다. 월매가 가마꾼을 고용해 시체를 싣고 돌아가는 도중 가마 안에서 갑자기 신음소리가 들렸다. 엿들어 보니 과연 춘향이 살아났다.'

1906년 8월 17∼22일 5회에 걸쳐 대만의 신문 '한문대만일일신보'에 중국어로 연재된 '춘향전'의 일부다. 남원부사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 모진 고문으로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과감한 각색이 돋보인다. 이 대만판에는 한국 춘향전에는 없는 이맹협이라는 협객이 출현해 춘향을 돕는다. 다만 감초 역할을 하는 조연 방자와 향단이는 빠져 있다.

박현규 순천향대 중어중문학과 교수가 최근 대만 징이(靜宜)대 도서관에서 '대만판 춘향전'을 발굴했다. 대만의 언론인이자 문인이던 이일도(李逸濤·본명 이서·李書·1876∼1921)가 신문에 연재한 작품이다.

그동안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어판 춘향전은 1955년 월극(越劇·여성들만 출연한 중국 전통 연극) 공연을 위해 나온 것으로, 이번에 발굴된 대만판 춘향전은 이보다 49년 앞선다. 특히 대만판은 한국 춘향전의 기본 줄거리를 따르면서도 유례없이 파격적으로 개작돼 한국 고전소설의 해외 확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원본과 작자, 연대 미상인 춘향전은 줄거리가 비슷한 소설 이본(異本) 100여 종이 전해진다. 한자문화권인 베트남에선 18세기부터 춘향전과 닮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춘향전이 해외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말부터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되면서다.

춘향전 이본들은 그 차이가 크지 않은 데 비해 대만판 춘향전은 내용을 대폭 각색한 점이 독특하다. 대만판에서는 되살아난 춘향이 길에서 나졸과 맞닥뜨려 다시 감옥에 갇힌다. 옆방에 갇혀 있던 의협심 많은 이맹협이 간수장의 생일잔치 때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춘향을 데리고 탈출한다. 춘향은 다시 붙잡혀 투옥되지만 이맹협의 도움으로 처형을 모면하고, 이령(李鈴·이몽룡에 해당하는 남자 주인공)이 구하러 올 때까지 탈 없이 지낸다.

박 교수는 "이일도가 신소설의 특징인 트릭 기법으로 반전을 거듭하고 독자를 긴장시켰다"라며 "이맹협의 등장은 협객을 좋아하는 중국인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곳곳에 중국 고사를 인용하는 등 중국문화를 가미했고,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해 이령이 구미(歐美)로 유학을 떠난 것으로 돼 있다. 조선의 남원을 배경으로 5월 5일 광한루에서 이령이 그네 타는 춘향을 보고 한눈에 반하는 도입부는 원작과 같다. 다만 광한루(廣寒樓)는 한자 표기를 광한루(光漢樓)로 쓰고 관동팔경의 하나라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대만이 일제의 통치 아래 있던 당시 이일도는 일본 문인들과 교류하며 일본을 통해 해외 정보를 얻었다"며 "춘향전도 일본을 통해 접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일도가 춘향전을 대만에 알린 것은 평소 남녀의 정절을 높이 평가하던 자신의 가치관과 일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일도는 춘향전의 머리말(緖言)에서 "천지(天地)는 하나의 정연(情緣·남녀 간 인연)"이라며 "남녀 간 사랑은 뛰어난 절조와 고귀한 행동으로 세상의 도리와 인심을 보완해주지 않으면 일개 사람의 사사로운 정과 같을 뿐"이라고 밝혔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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