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끔찍했던 황산테러 고통 딛고… 다시 부르는 30대 여성의 희망가

동아일보

[동아일보]

《대낮 길거리 칼부림, 퇴근길 여성을 살해한 오원춘…. 거의 매일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이런 뉴스가 몹시 불편하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 저런 범죄를 당한 이들은 얼마나 끔찍한 공포와 고통에 시달렸을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생생히 살아난다. 저 범죄 기사의 피해자도 불과 몇 시간, 아니 몇 분 전까지는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사를 보고 공분하겠지만 사건은 금방 기억에서 잊혀질 것이다. 그 후의 삶을 살아내는 건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다. 황산에 당했던 그날 이후, 3년을 지나고 나니 드는 생각이다.》





황산이 할퀴고 간 흉터3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끔찍했던 기억은 시커멓게 타버린 팔처럼 선명하다. "지금은 많이 안정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생살을 에는 듯한 고통을 견뎠고 한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최근 들어 강력 범죄 가해자들을 더욱 강하게 처벌하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피해자에게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함께하는 사랑밭 제공


○ 3년 전 예고 없던 공포


머리를 빗고 화장을 했다. 서둘러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갔다 올게." 신발을 신으며 엄마에게 인사했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응?" 닫히는 현관문 너머로 엄마의 매일 똑같은 인사말이 잔소리처럼 들렸다. 2009년 6월 8일 오전,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출근길이었다.

"세상에 저 여자 어떡하면 좋아."

사람들이 나를 향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을 듯한 고통이 피부를 파고들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헤집는 듯했다.

고통은 순간에 찾아왔다. 저벅저벅. 발을 끌지 않는 남자의 발소리가 뒤에서 들려와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얼굴과 목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막은 팔과 손등에도 불처럼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프고 무서워 집에 전화를 걸려고 했다.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잘 몰랐다. 손에 힘이 빠지면서 전화기도 힘없이 바닥으로 굴렀다. 신발도 신지 않은 엄마가 달려 나오는 모습, 구급차가 삐뽀삐뽀 소리를 내며 나를 옮기는 장면까지는 그래도 기억이 난다.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그날 출근길에 나는 '황산테러 피해자'가 됐다. 2007년 그만둔 옛 직장 대표와 그의 사주를 받은 동료들 짓이었다. 밀린 임금과 투자금을 내놓으라고 낸 소송에서 내가 이기자 앙심을 품고 벌인 일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이 아닌 범죄 피해자로서의 삶은 아무런 예고 없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하는 건 아마 이날, 여기까지일 거다.

○ 지옥이 시작되다

"아이고, 우리 딸 어쩌나."

엄마 우는 소리에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고 또박또박 상태를 설명하는 의사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몸 전체 피부의 25%가 황산에 타버렸고, 황산은 피부 속으로 침투해 살을 태워 일반 화상보다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의료진은 "환자 몸에 뿌려진 황산 800mL는 순도 99%로 돼지고기 한 점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녹일 수 있는 강도"라고도 했다. 말보다 치료과정은 더 무서웠다. 상처에 닿은 의료기구가 '슥, 스∼윽' 소리를 내며 긁어내면 시커멓게 변한 내 살점이 조금씩 떨어져 나왔다. 소독약이 살 속으로 파고들면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생명수다, 나를 살리는 생명수다.'

아프다고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병원비 걱정 때문이었다. 나와 함께 경기 성남시에서 2400만 원짜리 13평 전셋집에 사는 운전사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가 감당하기에 '황산테러' 치료비는 '또 다른 테러'처럼 보였다. 치료비는 최소 4000만 원이라고 했다.

병원비를 아끼려고 내 허벅지 살을 떼어 얼굴 피부에 이식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큰돈을 어디에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정부가 범죄 피해자에게 준다는 '구조금'이었다. 구조금 제도가 있다는 사실도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됐지만, 그조차도 선정되지 못했다. 주로 얼굴을 다쳤기 때문에 팔다리를 움직여 생활하는 데 별문제 없다는 이유였다.

온종일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몸 일부가 불구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나? 아니, 차라리 그랬다면 치료비 지원이라도 받지 않았을까.' '어쩌면 불에 타는 게 나았을까? 그랬다면 다른 화상 환자들처럼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 거울에 비친 '검은 나'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으로 거울을 봤다. 얼굴 반쪽은 검붉은 색이었고 군데군데 누런 고름이 보였다. '울퉁불퉁'이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치지 않은 얼굴 부분이 오히려 낯설었다. 뽀얀 피부를 자랑하던 내 모습은 잊기로 했다. 눈물이 났다. 병실에 찾아온 친구들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창밖을 보거나 손에 든 음료수만 만지작거렸다.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을 때 친구는 "괜찮아"라며 위로를 건넸지만 고맙다는 의례적인 인사도 하지 않았다. 내 모습이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빨리 나가길 바랐다. 낮에도 커튼을 쳤고 그것도 모자라 아줌마들처럼 선캡을 쓰고 모자까지 겹쳐 썼다. 화상 부위가 한 조각이라도 햇빛에 노출되면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지만, 다친 내 마음까지 가려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날 밤 꿈을 꿨다. 어둡고 컴컴한 곳에 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를 하려는데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발버둥을 쳐봐도 그대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꿈인 줄 알았는데 깨보니 눈물이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우울증이 왔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생살을 긁어내는 화상 치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마음의 상처, 사고 당시의 기억이었다.

○ 우연처럼 찾아온 희망

병원 1층 로비 맨 구석 자리에서 엄마 손에 쥐여 있던 손수건은 그날도 축축이 젖어 있었다. 코 풀고 눈물 닦은 휴지도 한가득. 그때 로비는 한 비영리단체가 화상 아동에게 후원금을 전달하는 행사 준비로 분주했다. 엄마는 무작정 행사장으로 걸어갔다. 담당자를 찾아 '딸이 많이 아픈데 제발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고 병실로 데려왔다. 내 얼굴을 보고, 당시 사건 기사를 기억한 단체 관계자들은 그 자리에서 '돕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하늘이 도왔다"며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비영리단체의 후원으로 치료비를 마련하게 되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쓴 글. 연필 잡기가 쉽지 않아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이 단체는 사연을 인터넷에 올려 후원금을 모금하자고 제안했다. 내 이야기는 그렇게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됐다. 2주일이 흘렀을까.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후원금으로 7000만 원이 모였어요. 병원비 걱정 말고 치료에만 전념해요.'

얼굴도 모르는 수천 명이 나를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니. 이 후원금 덕분에 '4000만 원 완납'이 찍힌 영수증을 받게 됐다. 남은 돈은 집을 옮기는 데 보탰다. 정이 든 집이지만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오를 것 같아서였다.

퇴원할 무렵 새로 다니던 직장 사장과 동료들도 병원을 찾아왔다. 친구들이 왔을 때와 달리 눈도 마주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주고받다 보니 이런 말이 들렸다.

"몸 상태가 괜찮아지면 꼭 다시 회사로 나와 줘요."

일도 하지 못했는데 6개월 치 월급을 통장에 넣어줬다. 후원은 그 뒤로도 쏟아졌다. 범죄 피해자를 돕는 또 다른 민간단체에서는 성형수술을 지원해줬다. 하얗다고는 할 수 없어도 고름은 사라졌고 비포장도로 같던 얼굴은 화장품을 발라도 될 정도로 팽팽해졌다. 아예 보이지 않던 귀도 분명, 사람의 귀로 다시 태어났다. 고된 1년간의 성형이 헛되지는 않았다.

2009년 10월 퇴원 직후부터는 심리치료를 시작했다. '범죄 피해를 당한 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심리치료 첫날 들은 이 말이 왜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왜 나는 이런 일을 당했을까, 왜 하필 나일까.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자책하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 나는 일어섰다





3년이 흘렀다. 누군가 "괜찮니?"라고 물으면 가끔은 등 쪽에서 땀 한 줄기가 흐르는 듯하다가도 웃으면서 "당근이지"라고 받아치기도 한다. 고통을 이겨낸 나 자신에게 코끝이 찡해질 만큼 고맙다.

올해 초부터는 다시 아침마다 옷을 고르고,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며 회사 출근길을 재촉한다. 대학원 학생증도 손에 쥐어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앞으로 상담사 자격증을 따 범죄 피해자들의 다친 마음을 치료하는 게 목표다. 지난 한 해 강도나 성폭행 같은 강력범죄 피해 건수가 13만3900건에 달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다행히 범죄 피해자들을 다루는 법안이 2010년 개정돼 나 같은 사람도 지원 대상에 포함됐고 피해자 분류도 6단계에서 10단계로 지원 대상이 늘었다고 한다. 이제라도 보다 많은 범죄 피해자들을 보듬을 수 있게 돼 다행이지만, 예전의 나처럼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한 채 고통 속에 방치되는 사람들이 어디엔가 있을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이제 스스로 극복해 나가야 할 숙제만이 남았다. 옛 회사 대표는 2년 전 징역 15년 확정 판결을 받았고 대표의 지시를 받고 직접 범행을 저지른 직원들도 중형을 선고받은 상태다. 이들을 상대로 한 민사 손해배상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날이 밝았다. 오늘도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한다. 서둘러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갔다 올게." 신발을 신으며 엄마에게 인사한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응?" 닫히는 현관문 너머로 엄마의 '잔소리'가 들린다. 2012년 11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출근길이다.

다시 집을 나서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나는 어쩌면 '행운아'인지도 모르겠다.

:: 취재기자의 말 ::

긴 인터뷰를 마친 박정아(가명) 씨는 "늦었지만 이 지면을 빌려 나에게 평범한 출근길을 되돌려준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더 당부한 말이 있습니다. "범죄 피해를 당한 건 나나, 피해자 잘못이 아니에요. 꼭 힘내서 이겨내세요."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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