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女 2차 피해 막는 '2m 가림막' 보니

중앙일보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높이 2m 가림막.#1. 지난 9월 말 서울중앙지법 526호 형사법정 밖. A양(19)은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다가 사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한 시간 전, A양은 법원 내 한 사무실에서 '증인 지원관'을 만났다. 지원관은 "사장의 변호인이 '사장과 서로 동의하고 그런 것 아니냐'는 식의 상처 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며 "사장을 변호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니 사실대로 침착하게 얘기하면 된다"며 조언했다. A양은 지원관의 안내를 받아 법관만 드나드는 통로를 통해 법정으로 향했다.

 #2. 같은 날 526호 형사법정 안. "피고인은 뒤로 돌아 앉으십시오." 재판장의 말이 떨어지자 법정 오른쪽 피고인석에 앉은 사장은 벽을 보고 뒤로 돌아앉았다. 법정 가운데 증인석은 높이 2m짜리 가림막으로 둘러쳐 있어 어차피 사장은 증인을 볼 수 없었다. 방청객은 법정 밖으로 모두 퇴장시킨 뒤였다. 잠시 후 피해자인 A양이 고개를 숙인 채 법정 뒤쪽 법관 출입구로 들어섰다. A양이 증인석에 앉자 사장도 돌아 앉았다. 하지만 사장은 증인 신문이 끝날 때까지 A양을 볼 수 없었다.

 성폭력 범죄 재판이 달라지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이달 초부터 성폭력 피해자 등 증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정 차폐시설(가림막)을 8개 형사법정에 새로 들여놓았다. 재판장 재량으로 일부 법정에서 운영하던 가림막을 확대 설치한 것이다. 신설한 가림막은 'ㄷ'자 형으로 증인석을 완전히 가려 재판장 외에는 증인을 볼 수 없도록 했다. 법원 관계자는 "성폭력 범죄 특성상 피해자(증인)가 가해자(피고인)에 대한 노출을 극도로 꺼린다"며 "피해자 인권을 보호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진술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법원에서 지난 3월 도입한 '증인 지원관' 제도 활용 건수도 100건을 넘어섰다. 지원관은 성폭력 상담기관에서 100시간의 교육 과정을 이수한 '성폭력 피해자 도우미'다. 지원관은 ▶피해자에게 연락해 증인 지원 절차를 설명하고 ▶재판 직전 법원 내 지원관실에서 피해자를 만나 상담한 뒤 ▶이동 중에 피고인 측과 마주치지 않도록 법정으로 안내하며 ▶신문을 마치면 지원관실에서 상담한 뒤 청사 입구까지 동행하고 ▶선고 후엔 e-메일·문자메시지로 결과를 통보하는 역할을 한다.

 서울중앙지법의 유일한 증인 지원관인 형사합의부 김선의(43·여) 지원관은 "피해자들은 법원에 나오는 것 자체를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피해자 입장에서 상담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도와줘 고맙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이 같은 조치는 강력 성범죄가 잇따르자 피해자 보호 차원에서 마련한 것이다. 지난해 6월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한 성폭력 피해자가 재판 뒤 자살하는 등 그동안 성폭력 피해자의 '2차 피해'가 자주 발생했었다. 법원은 지난달부터 '증인지원위원회'(위원장 노태악 형사수석부장)를 열고 앞으로 화상증언실·증인지원실을 확충하고 성폭력 전담 재판부 업무 매뉴얼을 만들 예정이다.

김기환 기자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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