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에 친절 서비스!" 기지촌 할머니, 지금은

입력 2012. 10. 28. 19:53 수정 2012. 10. 2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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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선 '외화벌이 일꾼' 불렸지만늙어선 무관심속에 방치된 노년

[세계일보]

1992년 10월28일 경기 동두천시 보산동 '기지촌' 내 한 셋방에서 술집 종업원 윤금이(당시 26세·여)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범인은 주한미군 이등병. 시체를 훼손한 잔혹함에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고, 미군 범죄와 함께 기지촌 여성들의 애달픈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년. 기지촌 여성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다시 지워졌다. 취재팀이 만난 기지촌 여성들은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배고프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눈물로 보낸 삶…"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김명자(64·가명) 할머니는 소주를 한 잔 걸친 날이면 가수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읊조린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픈 기억이 가슴을 파고 든다. 9살 때부터 식모살이를 한 그는 16살 무렵 "돈을 많이 벌게 해 주겠다"는 낯선 사내의 꼬임에 속아 경기 송탄의 '기지촌'에 둥지를 틀었다. 포주가 사내에게 건넨 돈은 고스란히 김 할머니의 빚이 됐다. 빚은 계속 늘어나 기지촌을 벗어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미군들은 기지촌에서 달러를 셀 수 없이 써댔다. 기지촌 여성들은 보건소 사람들에게서 '당신들이 애국자'라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 '미군에게 친절하게 서비스하라', '몸을 깨끗히 하라'는 말도 따라붙었다.

'애국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남성 의사에게 아랫도리를 보여야 하는 수치스러운 검사도 일주일에 두 번씩 받았다. '할로(미군을 가리키는 속어)'는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때렸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무렵 포주는 '몸에 좋은 것'이라며 알약을 건넸다. 먹고 나면 모든 아픔과 걱정은 잊혀졌다. 약에 중독된 뒤에서야 그 약이 '환각제'라는 것을 알았다.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여자의 일생…'. 김 할머니는 눈물 때문에 마지막 부분은 항상 다 부르지 못한다.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죽으면 무연고 시신 처리

"이건 정말 창피해서 처음 말하는 건데 월세 10만원짜리 방에 살고 있어."

박정자(74·가명) 할머니는 어렵게 입을 뗐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월 40만∼50만원의 돈을 받고 있지만 월세와 생활비 충당하기에도 빠듯하다. 평택 안정리에 모여 사는 50여명의 기지촌 할머니들은 대부분 박 할머니처럼 수급비로 생활하고 있다.

과거 '외화벌이 일꾼'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이들에게 어떤 보상도 없었다. 1960∼70년대 서울·부산·대구·양주·평택 등 미군기지 밀집지역에 수십개의 기지촌이 만들어졌고, 1만3000여명 이상의 여성이 일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얼마나 생존해 있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파악조차 안 된다.

지난 7월 박 할머니가 사는 동네에서는 최복례(가명) 할머니가 숨진 지 3일 만에 발견됐지만 장례절차도 없이 영안실 냉동고에 머물다 화장됐다. 보통의 무연고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당국은 "관련법이 없어서 돕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대표는 "공무원들에게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대상이 아니다는 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을 돕기 위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7개 단체가 모여 지난 8월 '기지촌여성인권연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기지촌 성매매 피해여성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추진하고 있다.

평택=오현태·박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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