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수도 부산에서 '사상계' 창간

2012. 9. 12. 09:3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획연재] 장준하는 누구인가 (15)

[미디어오늘 김종철·언론인] 1949년 6월 29일(일요일) 오후 12시 26분 경교장 2층에 있던 김구의 거실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가 권총으로 그를 쏜 것이었다. 김구는 < 중국시선(中國詩選) > 을 읽고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누군가가 김구를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나돌았다. 그때마다 김구는 "왜놈도 나를 죽이지 못했는데 동포가 설마 나를 죽이겠나"하면서 유언비어를 일축했다.

김구가 암살당한 이튿날 대통령 이승만은 묘한 어감이 풍기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구 씨를 살해한 동기에 관하여서도 공표하고 싶은데, 그것은 발표할 때가 되면 반드시 공포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때 모든 사실을 일반인 앞에 공개해 놓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그 생애를 조국 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 , 252~253쪽)

김구의 장례는 7월 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정부가 국장으로 하자고 제의했으나 장례위원회는 "너희들이 죽여 놓고 무슨 국장이냐?"고 항의하면서 '민족장'을 추진했다. 결국 김규식의 조정으로 국민장으로 결정되었다. 김구의 국민장에는 전국에서 100만이 넘는 조문객이 모여들었고, 영결식 날에는 40~50만 명의 인파가 거리를 메운 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준하가 김구 암살 당일 어디에 있었는지, 장례식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기록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다만 그가 가장 존경하던 애국지사이자 혁명투사인 그의 암살 소식을 듣고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과 함께 장준하 일가에게도 비극이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그 무렵 서울 원효로 4가에 있는 교회에서 목사로 일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동네의 고갯마루에 올라가 서울에 진입한 인민군이 탱크를 몰고 오는 것을 보고는 충격으로 쓰러져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장준하는 교회 마당에 어머니를 가매장하는 것으로 장례를 대신하고 한강을 가까스로 건너 상도동으로 피난했지만 거기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그는 1951년 1·4후퇴 때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갔다. 그런 와중에 원효로 교회에 남아 있던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별세했고, 연희대(연세대의 전신)를 졸업한 아우 익하는 유엔군 통역관으로 들어가 일하다 전투 중에 실종되었다. 피난지 부산에서는 장준하의 두 살배기 첫 딸이 목숨을 잃었다.

군인 신분도 아니고 족청 같은 정치단체 구성원도 아닌 장준하는 부산에서 마땅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행동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는 중국 임천의 한광반에서 창간한 < 등불 > 과 시안의 OSS 시절에 펴낸 < 제단 > 의 경험을 살려 잡지 창간에 참여했다. 당시 부산에는 정부기관이 모두 피난 와 있었는데, 문교부 산하에 '국민사상연구원'이 신설되었다. 연구원의 기관지로 1952년 9월에 창간된 잡지가 < 사상 > 이었다. 그곳의 연구원이던 장준하가 편집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 무렵 정부는 잡지 발간에 필요한 예산을 마련할 수 없어서 장준하에게 < 사상 > 의 제작과 판매를 일임했다. 그는 창간호 '편집 후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 민족 4천 년의 역사는 실로 이 땅에 생을 받았던 모든 생명들의 사고와 행위의 집적이다. 그 속에는 이 집단의 고민, 희열, 성공, 실패 등 모든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다. 민족과 인류의 역사가 가장 험난한 고비를 넘는 오늘날 우리 앞에는 과거와는 전혀 그 각도를 달리하는 고민과 과제가 놓여 있으니 이 고민과 과제를 해결하고 이 겨레의 활로를 개척함에는 선인들의 경험과 아울러 새롭고 또는 넓고 깊은 세계적인 사고가 요청된다. < 사상 > 은 실로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느껴 나서게 되는 바이므로 그 편집에 있어서도 특히 연구적이며 이념적인 것에 치중하였다.( < 장준하문집 3 > , 76쪽)

장준하는 < 사상 > 창간호 3천 부를 찍어 세상에 내놓았는데, 주로 학자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조금 반응이 있었을 뿐, 대중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잡지가 나온 지 얼마 뒤 미국공보원의 문정관 슈바커가 장준하를 찾아오더니 < 사상 > 출판은 시기적절한 사업이지만 한국의 실정에서 그렇게 수준이 높은 잡지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미국공보원이 돕겠다고 말했다. 제2호부터 공보원이 2천 부씩을 사서 한국의 여러 기관과 주요 인사들에게 무상으로 배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힘을 얻은 장준하는 10월에 제2호 5천 부를 펴내서 미국공보원에 2천 부를 납품하고 나머지 3천 부는 부산시중에 내놓았다. 그런데 시판용으로 낸 3천 부 가운데 2천 부 이상이 반품되었다. 창간호를 샀던 독자들 대부분이 미국공보원이 무료로 준 < 사상 > 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그 사실을 공보원 측에 알리고 앞으로 도움을 주려면 잡지를 사는 대신에 용지를 공급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제3호(11월호)부터 용지를 지원했다. 그러나 제3호도 1천 부 안팎이 팔리고 나머지는 되돌아왔다. 그 잡지는 미국공보원이 기증하는 것이라고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무가지(無價誌, 기증지)를 함부로 낸다는 것은 그것이 설혹 선전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잡지 경영에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후 일관해서 기증지를 내는 것을 매우 꺼리게 되었다. 비록 반품된 책이라 할지라도 그냥 파괴하여 제지회사에 파지로 넘길지 언정 무가로 내어 놓는 일은 없었다.(앞의 책, 77쪽)

< 사상 > 은 제4호(1952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용지를 무상으로 공급받았는데도 판매가 부진해서 결손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문교부장관에게 사표를 낸 뒤 이미 마련되어 있던 < 사상 > 제5호의 원고를 들고 국민사상연구원을 떠났다. 사표가 몇 차례나 반려되었지만, 장준하는 그를 적극 후원하던 백낙준이 문교부장관직을 떠나자 혼자서 < 사상 > 을 속간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야인이 된 백낙준을 찾아가서 < 사상 > 을 계속 펴내겠다는 뜻을 전하자 그는 좋은 일이라고 격려하면서 얼마쯤 용돈을 주었다. 그 돈이 제5호 발행 준비금의 전부였다.

사상계

사무실이 없어서 다방에서 잡지 속간 준비를 하던 장준하는 뜻밖의 장벽에 부닥쳤다. < 사상 > 의 발행인으로 되어 있던 국회의원이 제호를 인수하려면 3천만 원을 내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3천만 원이 아니라 단돈 3천 원도 없던 그는 난감했다. 몇몇 친구들과 의논한 끝에, 정태섭(당시 연희대 교무처장)의 제의에 따라 '사상'에다 '계'자를 더 붙여 제호를 < 사상계(思想界) > 로 정했다.

< 사상 > 의 제호를 써주었던 서예가 오기석한테 장준하가 < 사상계 > 의 제호를 써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공보처 부산분실에 들러 판권 신청서를 제출한 장준하 앞에는 제작비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민과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한 친구가 < 리더스다이제스트 > 한국어판 발행인이던 이춘우를 소개했다. < 사상계 > 창간 때문에 장준하가 겪고 있던 어려움을 들은 그는 원고를 보내주면 자기가 경영하는 조판소에서 작업을 맡아줄 것이고, 자신이 거래하는 인쇄소에서 책을 찍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원고와 출판계획 서류, 참고서적 등이 빽빽이 들어 있는 큰 가방을 들고 거리를 헤매던 장준하는 < 사상계 > 조판이 시작되자 < 리더스다이제스트 > 기자들이 외근을 나가서 비어 있는 책상 앞에 앉아 편집과 교정 일을 할 수 있었다. 혼자서 그 많은 작업을 다 할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아내 김희숙을 동원해서 교정을 맡기기로 했다. 경험이 전혀 없는 아내는 진땀을 흘렸다. 그럭저럭 조판을 끝내고 인쇄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난관이 장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이춘우의 호의에 힘입어 조판도 인쇄도 외상으로 할 수 있었는데, 사진과 컷 등의 동판대(銅版代)만은 현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판대는 제1차 화폐 개혁 직후의 돈으로 2천2백환이었다. 그때 장준하의 형편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그래도 이런 때 위급을 헤쳐 나가는 지혜는 남자보다 여자의 편이 우월하다고 그 후에도 때때로 기억하여 감탄하고 있지만 실로 그때 돈을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내자였다. 내자의 겨울 외투를 비롯하여 옷가지 몇 벌 있는 것을 내다 팔아 만든 것이었다. 그 어려운 피난통에 내자가 그렇게 돈이 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지만 그보다도 나의 필요한 돈 2천2백 환을 내자가 나의 손에 쥐어 줄 때 비로소 그 의복가지들을 시장에 팔아 만든 돈이라는 고백을 나는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인쇄도 끝나고 제본까지도 다 끝났다. 그것이 1953년 2월 20일이었으나, 뜻밖의 사정이 생겨 3월 10일 에야 배본을 하였다.(앞의 책, 83~84쪽)

나중에 한국의 진보적 지성을 대변하게 되는 < 사상계 > 는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빛을 보게 되었다. < 계속 >

Copyrights ⓒ 미디어오늘.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